<피키 블라인더스>시리즈와 영화

위선의 시대를 폭파한 가장 낮은 곳의 가장 우아한 일갈

by 김별
글쓰기 외에는 장편 소설이나 다작 시리즈 드라마도 시간 아까워서 안 보는 편이다. 요즘엔 왠만한 영화도 YouTube 압축된 것만 본다. 그런 내가 이 시리즈는 정주행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멎은 영국 버밍엄, 자욱한 연기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BBC 역대 최고의 시리즈로 꼽히는 <피키 블라인더스>의 주인공 토마스 쉘비다. 최근 시즌 6와 피날레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 :불멸의 남자> 까지 완주했다.

이는 단순한 갱스터의 성공기가 아닌 거대한 운명에 맞선 한 남자의 처절한 투쟁기였기 때문일수도 있다.


제작자 스티븐 나이트는 처칠과 IRA, 파시스트 모즐리 등 실존 인물을 엮어 정교한 '로망 아클레'를 구축했다. 그 중심에는 킬리언 머피가 있다.

"내가 배우임을 기억하라"는 단 한 줄의 메모로 배역을 따낸 그는, 전쟁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텅 빈 눈동자와 고도의 지성으로 치환해 '상처 입은 지식인 범죄자'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창조했다.

나 역시 전형적인 느와르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주인공 토마스 쉘비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의 압도적인 연기력과 '뇌섹남'적 카리스마에 매료되었다.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는 기존 BBC 시대극이 주로 귀족이나 상류층의 화려한 삶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밑바닥 노동층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디테일 또한 놀랍다. 당시 갱스터들 사이에서 유행한 '언더컷' 헤어스타일부터 소품 하나, 억양 하나까지 재현해낸 제작진의 집요함은 극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만약 긴 시리즈를 정주행할 여유가 없다면, 감독이 팬들에게 주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넷플릭스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 불멸의 남자>만이라도 꼭 확인해보길 권한다.



토마스 쉘비: 재(Ash)에서 태어나 불멸(Immortal)이 된 사내


"신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뿐이지."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토마스에게 삶은 '덤'에 불과했다. 그는 공포를 잃어버린 대신 치밀한 설계를 얻었다. 가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그의 대담함은, 평생을 죽음과 함께 걸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이었다.


토마스 쉘비역(킬리언 머피)_

내가 토마스를 진정한 '상남자'로 느꼈던 결정적 장면은 그의 품격이 권력이 아닌 '의리와 인간에 대한 예우'에서 나옴을 증명했을 때다. 비즈니스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관계를 맺었던 영국 상류층 여성이, 매춘부 출신인 그의 아내 리지(Lizzie)를 비천하다고 조롱하자 그는 서늘하게 일갈한다.


"너희 눈에는 그녀가 낮아 보이겠지만, 리지는 나라를 팔아먹는 위선적인 너희들보다 훨씬 과분하고 고결한 여인이야. 진짜 천박한 건 너희의 그 역겨운 위선이지."


이 대사는 그가 아무리 맞춤 수트를 입고 의원 배지를 달았어도, 그의 심장은 여전히 낮은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은 동료와 가족들의 편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마지막 설계: 집을 허물어 희망을 짓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 저택 폭파는 그의 생애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였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던 거대한 성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빈민들을 위한 주거지를 짓겠다는 선언은 그가 평생을 싸워온 계층이라는 감옥을 스스로 폭파한 행위였다. 그는 결국 자신의 죽음마저 설계했다. 빛의 아들 찰리에게는 평범한 삶을, 어둠의 아들 듀크에게는 조직의 검을 쥐여주며 파시즘이라는 거대 악을 막아낸 뒤 미소 지으며 사라진 그의 뒷모습은 죽음으로써 완성된 전설이었다.




느와르의 두 정점: <피키 블라인더스> vs <대부>

느와르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도덕적 모호함을 다루기에 시대를 불문하고 매혹적이다. 영국의 <피키 블라인더스>와 미국의 <대부>는 이 장르의 양대 산맥이다. 두 작품 모두 소외된 계층(아이리시 집시와 이탈리아 이민자)의 생존 투쟁을 다루지만 결은 다르다.


<대부>가 시스템 자체가 되어 질서를 세우려는 '우아한 포식자'이자 아날로그적 고전이라면, <피키 블라인더스>는 시스템에 맞서 균열을 내는 '거친 혁명가'이자 트렌디하고 힙한 현대적 느와르다. 알 파치노가 작은 키를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승화시켰듯, 킬리언 머피 역시 172cm라는 단신을 신비로운 푸른 눈과 날카로운 광대뼈의 매력으로 완벽히 커버하며 새로운 보스상을 정립했다.


킬리언 머피와 배리 키오건의 만남

킬리언 머피의 캐스팅 일화도 흥미롭지만 그의 조직을 이어받는 아들 듀크 역의 배리 키오건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복싱으로 단련된 그의 거친 생명력은 듀크라는 캐릭터에 생생한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아이리시 라는 혈통적 뿌리를 공유하는 두 배우의 앙상블은 이 시리즈가 가진 저항의 서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13년 전의 당돌한 선언을 예술적 증명으로 승화시킨 킬리언 머피. 그는 전쟁광과 부패 정치인이라는 진짜 괴물들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더 큰 어둠이 되기를 자처한 역설적인 영웅이었다. 토마스 쉘비는 떠났지만, 위선에 찬 세상을 향해 날렸던 그의 우아한 일갈은 우리 가슴 속에 불멸의 불꽃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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