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딜레마, 종교와 숫자, 젠더와 색깔
*내용 전반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해당 이미지는 2월 팬딩 수업(https://m.blog.naver.com/cjswodlswn/222572408112)에서 소개한 습작.
그림 속 인물은 교재인 [친절한 금자씨]의 주인공 금자와 그의 딸 제니이다.
2월 이미지 착상 강의에서는 [친절한 금자씨]를 영화의 기본 베이스인
-종교적 메타포를 색상과 숫자에 관한 메타포와 더불어
-유명한 윤리학 딜레마인 트롤리 딜레마에 빗대기도 하고
-여성과 남성으로 유리된 세계를 서사와 촘촘하게 엮어 설명한 후
수강생 분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 시연을 함께 진행한 후 마무리했다.
해당 영화 독해의 경우 워낙 레이어도 많고, 영화적 근거도 세부적이기 때문에 수업 때보다 부연설명을 덜어내도 각주가 꽤나 있다.
그래서,
처리하였으니, 읽는 데에 참고 하시라.
또한, 트리거가 될 만하거나 직접적으로 폭력이 드러나는 장면은 이번에도 검열했다.
*이번 독해에 미리 듣고 피드백을 주시고,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주시는 등 여러모로 도움 주신 미씨 작가님의 만화! (늘 사랑하고 고마워요~)
세간이 주목한 아름다운 살인자 금자. 20살의 금자는 원모라는 어린아이를 살해했다고 자수했다고 한다.
금자는 경주 여자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한 전도사에게 종교를 권유받고서, 13년간 천사라는 소리를 들으며 교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출소 후 바로 차갑게 돌변하며 또 다른 살인을 계획한다.
출소 후 또 다른 살인을 계획하는 금자.
그는 ‘속죄하기’ 위해서 살인을 하려고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금자의 속죄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질문하기 위해 우선 유명한 윤리학 사고 실험인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서 알아보자.
다음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당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하며 보고 가시라.
트롤리가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해당 방향의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당신은 선로 밖에 서 있고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선로 전환기를 당기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선로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이 죽게 된다.
선로 전환기를 당기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가?
대부분은 여기에서 ‘당긴다’라고 대답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다음 사례를 보자.
마찬가지로 트롤리는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당신은 선로 밖에 서 있고, 바로 옆에는 상당히 무거운 사람이 한 명 서 있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선로 위로 밀쳐서 그 무게로 트롤리를 멈추게 하는 것인데, 이 경우 트롤리는 멈추게 되지만 그 사람은 죽게 된다. 이는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가?
여기에서는 ‘당기지 않는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한 사람이 희생되고, 다른 다섯 명을 살리는 행동임에도 말이다.
더 능동적으로 피해를 ‘야기하는 것’과 피해를 ‘방치하는 것’은 각각 도덕적 경중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 또한 이런 극단적인 딜레마 상황에서 ‘속죄’와 ‘복수’라는 중심 키워드를 통해 도덕적/종교적/사회적으로 다양한 상황과 상징들을 교차시킨,
잘 만들어진 트롤리 딜레마 상황과 같다.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될까? 지금부터 아래와 같은 목차로 이야기해보자.
-6계명 김양희: 살인하지 말라
-7계명 오수희: 간음하지 말라
-8계명 우소영: 도둑질하지 말라
-9계명 고선숙: 거짓 증언하지 말라
-10계명 박이정: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붉은색의 의미
-선행의 이유와 다섯 명의 조력자들
영화적 근거1-복수의 립스틱
-진정한 속죄의 준비, 원모
-진정한 속죄의 준비, 제니
-베이커리 사장과 근식,
-담당 형사
-백한상
-전도사
영화적 근거2-성경에서 바라본 여성
-두 명의 살인 청부업자
-총과 여성의 목소리
-진정한 속죄의 시작
-두 번째 간증
-조건 1 : 선로에 묶여있는 사람
-조건 2: 선로 전환기를 쥘 수 있는 조건
-조건 3: 트롤리를 운전하는 승객들
영화적 근거3-원죄론
-조건 4: 선택지는 승객들에게
-심판과 규칙
-다섯 명의 천사
-두 명의 신
-죄와 남성의 신
-금자의 원죄
-근식
-제니
-회색 세상
영화적 근거4-입양아동의 심리
영화적 근거5-아동기의 젠더 사회화
-제니의 심리
-금자의 심리
금자는 20살 때 원모라는 아이를 죽인 혐의로 13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했는다.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지도 못한 금자는 처음에 감옥에 들어왔을 때는 줄곧 울기만 했다고 하는데,
그때의 금자를 보자
나레이션은 “힘들 때마다 금자는 어떤 남자가 가르쳐준 대로 엎드려서 심호흡을 다섯 번 했다”라고 말하는데,
그리고 금자도, 종교를 접한 후 성녀의 모습을 한 채 교도소 안에서 다섯 명의 삶을 구원하는데,
특히, 제 6계명부터 제 10계명에 이르는 다섯 계명을 어겼는데
이 다섯 계명은 이웃과의 관계를 깊이 다루고 있기도 하다.
먼저 그중 제 6계명 “살인하지 마라”를 어긴 김양희씨부터 보자.
6번째, 살인하지 말지니라를 어긴 김양희씨.
양희는 기둥서방을 목졸라 죽여서 교도소에 들어왔다.
차라리 자신이 죽을 걸 후회하는 양희에게 금자는 빛나는 얼굴로, 지나간 자기의 생을 애도하는 법을 가르쳤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양희를 사랑으로 품은 것이다.
7번째 율법을 어긴 수희는 간통죄로 들어왔다.
수희는 ‘마녀’라고 불리는 재소자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는데,
금자는 목욕탕 바닥에 비누를 발라 수희를 위해 그런 마녀에게 대신 복수해주었다.
간통한 이를 성적 괴롭힘에서 구해준 거다.
소영은 남편과 함께 8번 율법, “도둑질하지 말지어다.” 즉, 강도 범죄를 저질렀다.
강도 범죄 당시 뱀 껍질 같은 것을 뒤집어쓴 소영.
성경에서 선악과를 건넨 유혹과 탐욕의 상징이 어떤 동물인 뱀은, 창세기에서는 가장 간교한 존재로 표현되었지만,
이집트에서는 뱀은 풍요와 다산, 불멸의 영원성을 상징하기도 하는 다면적 상징성을 가진 동물이다.
(실제로 소영도 남편과 아주 금슬이 좋다.)
소영은 감옥에서 만성 심부전 탓에 고통받는데, 금자가 그런 소영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부한다.
에베소서 4장 28절에서는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을 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고 말했다.
성경 속 가르침에 따라 남의 물건을 훔치던 이에게 자신의 것을 나눠준 것이다.
9번 율법을 어긴 선숙을 보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표면적인, 법적인 의미도 있지만 거짓말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교도소에는 치매에 걸린 골칫거리 죄수, 남파 간첩 선숙이 있었다.
금자는 그런 선숙을 지극정성을 다해 돌본다.
그런 금자에게 선숙은 자신이 늘 끌어안고 살던 노란 책, 법구경을 금자에게 주며 “이 꽃을 너에게 준다”라고 했는데,
《법구경》은 불교의 수행자가 지녀야 할 덕목에 대한 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내용은 폭력, 애욕 등을 멀리하고 삼보*에 귀의하여 선한 행위로 덕을 쌓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
*삼보: 불교도의 세 가지 귀의처인 부처, 부처의 가르침, 승가(승려 공동체)를 의미
즉, 거짓말을 한 이를 진실되게 간병하며 다시 한번 종교의 덕목을 넘겨받은 셈.
10번째 율법을 보자.
이 율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단순히 집을 훔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지 못한다.” 가르침이다.
이정은 소위 ‘꽃뱀’이었다고 한다.
그런 이정에게 불륜을 싫어하는 ‘마녀’는 이정에게 밤새 모기를 잡는 일을 시키고, 모기에 물릴 때마다 이정을 혹독하게 괴롭혔다.
그런 이정을 위해 금자는 식판에 3년 동안 조금씩 락스를 타서 마녀를 중독시켜 죽인다.
그에 금자는 마녀라는 별명을 물려받았지만, 여전히 친절한 금자씨로 불리기도 했다.
누구나 친절한 금자씨를 도와주고 싶어 했고, 누구도 마녀 이금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마녀 금자이자 천사 금자는 그렇게
애인을 살해한 양희에게 다정과 사랑을 주었고
도둑질을 한 소영에게는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주었으며,
간첩이었던 선숙에게는 길고 진실된 간병을,
불륜을 저지른 수희에게는 성폭력에서의 해방을,
성을 이용해 금전적 이득을 취한 이정을 위해서는 본래의 마녀의 생명을 빼앗으며,
총 종교적 가르침을 저버린 다섯 명의 삶을 구제한다.
그리고 간증도 한다.
금자 말로는 기도를 하며 자신 안의 천사를 부르면,
그 안에 있던 천사가
이렇게 말하며 존재를 드러낸다고 말하며, 강당의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는 모두 죄인이기에, 천사를 부르는 기도를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금자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속죄를 통해 자신 안의 천사를 끌어낸 듯 보였다.
종교로 인해 죄를 극복했다 주장하고, 금자가 이를 간증할 때, 종교를 권했던 전도사의 표정을 잠깐 보자.
감화와 속죄와, 종교적 뉘우침이 모두 통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지 않나?
금자는 그렇게 감옥에서의 시간을 견디고, 전도사가 기다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금자는 바로 변했다.
여기서부터 붉은 세계가 시작되며, 반종교적인 장면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다.
먼저 붉은 옷을 입은 성가대원들이 감옥을 나온 금자에게 성가를 불러준다.
“내 나아갈 길에 높은 담과 깊은 함정 많도다. 나약한 내가 능히 넘을 수 없으니 누구의 도움 있을까. 주님의 숨결이 나를 불어 담을 넘게 함이오. 주님의 손바닥 다리가 되어 함정을 건너게 함이로다.”
(참고로 이 성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가짜 성가다.)
그 후 전도사가 금자에게 ‘두부처럼 하얗게, 다시는 죄짓지 말라’며 흰 두부를 건네는데 여기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금자는 그렇게 성가고 뭐고 부정하며, 영화의 본 시작을 알린다.
또한 전도사가 겨울 옷을 넣어주었지만, 여름옷을 입고 나온 금자는
20살 때 입소할 때 입은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그대로 입고 있다.
이는 금자의 죄가 종교로의 속죄로는 씻기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물증이기도 하다.
자, 본격적으로 독해해보자. 이제까지 본 금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순하고, 이타적인 모습이었다.
이는 종교에서 그리는 성녀의 모습이기도 했지만,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아름답고 선한 외피가 벗겨지지 않은 채 두부를 엎는데,
이는
(독해가 진행될수록 왜 그런 의미인지 점점 더 드러난다)
그렇지만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운 외피는, 이후 붉은 아이 섀도우를 바르며 극대화하는데
그 또한 이유가 있다.
이 아름다움이 뜻하는 바가 이 영화에서는 굉장히 중요하다.
우선 빨강은 기독교에서 첫 번째로는 구세주의 색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색,
정신과 힘과 속죄의 징표이다.
이 색은 성서에서 유래한 피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성경에서 금지된 것, 즉 불순과 폭력 그리고 죄를 상징한다.
(참고로 이러한 피에 대한 금기를 다룬 문구가 여호와의 증인이 수혈을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통교회에서는 물론 잘못된 해석이라고 바로 잡고 있지만.)
그러니까 지금은 금자가 구원의 이름으로 도모한 폭력과 죄의 전환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금자가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이 거짓이라면, 금자의 기도와 속죄도 거짓일까?
여기에도 교도소에서 기도할 때 붙어있던 원모의 실종 포스터와 금자의 몽타주가 있지 않나.
이 죄를 속죄하는 것이 금자의 행동 동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럼 종교를 처음부터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교도소 안에서 금자는 왜 선행을 베풀었던 걸까?
사실 나레이션 말대로이다. 작전은 13년 전에 시작됐다. 감옥에서 금자가 보인 선행에는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
금자는 우선 맨 처음, 자신의 삶을 애도하는 법을 가르쳤던 양희에게 집과 옷을 빌린다.
그리고 신장을 떼어준 소영에게서는 총의 도안을 건네며, 작전을 위한 총의 제작을 부탁하는데
그 도안은 이 법구경, 치매에 걸린 간첩 선숙 갖고 있던 법구경 속에 있던 것이다.
<법구경>이 폭력과 애욕을 멀리하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경구로 이루어진 책인 것을 생각해보자면
이 연출은 두부를 엎는 장면에 이어 다시 한번 반종교적 연출인 것.
대놓고 그 가르침을 놀리는 거다.
또한 금자는 성폭력에서 해방시켜줬던 수희에게 총에 들어갈 은세공까지 부탁해, 총을 완성시키는데
여기서도 ‘아름다움’이 강조된다.
근데 그게 지금 무력의 상징인 총에 들어가 있다.
이 총은 금자 자체이며, 죄인 여성들이 모두 조력해서 만들어낸, 영화에서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 그 자체이다.
이 총이 상징하는 바를 더 자세히 짚기 위해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하며 참고했다는 영화,
‘복수의 립스틱’을 한 번 보고 가자
‘복수의 립스틱’ 속 주인공 여성은 말을 못 한다.
그렇지만 금자처럼 누구나 돌아볼 정도로 아름다워 남성들에게 욕망당하는 표적이 된다.
주인공은 그렇기에 어느 순간 피해자로 살기를 거부하고,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데
그 후 주인공은 자신을 해치려 했던 남성의 총을 얻고, 그 총으로 자신을 욕망하는 남성을 쏘고 다닌다.
이 여성의 변화에서도 붉은색이 복수의 상징이 되며
성녀의 얼굴과 아름다움을 미끼로 욕망하는 남성을 단죄하고 다닌다.
(스트리밍 지원은 찾아봤는데 없었다... 이번 리서치를 위해 나는 DVD로 구매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대로이되, 남성의 욕망이 방아쇠가 되어 그들을 쏘는 영화에서 친절한 금자씨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것.
그렇다면 금자가 손에 넣은, 이 아름다움으로 치장된 무력은 어떻게 복수라는 목표를 관통할까.
우선 마지막 조력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반복하자면
누구나 친절한 금자씨를 도와주고 싶어 했고, 누구도 마녀 이금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금자는 그를 이용해 먼저 출소한 다른 이들을 이용해 이정과 백선생을 만나게 했고, 둘이 살림을 차리게 했다.
살인이라는 가장 큰 빚을 진 만큼 이정은 금자의 복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며,
사치를 좋아하던 이정은 실제로 백선생에게 가혹한 취급을 받고 있기도 한데.
이렇듯, 금자는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그들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각각 저지른 범죄의 특성을 이용해 자신의 원대한 목표, 복수에 이용했다.
이 사실이 밝혀질 때, 금자는 선한 마리아의 탈을 벗고, 붉은색을 입었다.
그리고 출소한 금자를 향해 모두가 말한다.
“변했다”고.
그건 눈화장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금자가 더 이상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이야기는 나중에 또 이어진다. 우선 금자가 진정한 속죄를 위해 우선적으로 행동한 일들을 보자.
먼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었더라도, 자신이 가담한 범죄의 피해자, 원모의 부모님에게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래서 금자는 원모의 부모님을 찾아가 새끼손가락을 자르는데,
원모의 부모님의 도움으로 손가락을 다시 붙인 금자는 교도소에서 13년 동안 노동해서 번 돈을 몽땅 수술비로 써야만 했다.
여기서 성경 속 숫자 13.
기독교에서는 불길하기로 유명한 숫자이지 않나.
정말 파괴하는 배반과 불신의 수이며, 완전한 숫자로 여겨지는 12에 1을 더한 것으로, 완전함을 파괴하는 수로 간주된다.
이것부터 반기독교적 메타포였던 셈.
또한 금자는 백 선생으로 인해 잃어버린 딸을 다시 만나러 간다.
호주로 입양된 제니를 만나러 간 금자는 먼저 특유의 훌륭한 화술과 사교력으로, 제니의 양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반대 심리를 이용해 제니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제니가 ‘나를 왜 버렸냐’고 물어봐도 ‘그래 소풍’하며,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이게 왜 진정한 속죄를 위한 준비였는지는, 조금 있다가 더 이야기된다.
일단 다시 영화로, 다음 챕터로 돌아가 보자.
최종적인 복수, 즉 백한상에게 가는 길에는 일곱 명의 남자들이 있다.
먼저 7의 의미가 뭘까.
그리고 영화에서도 일곱 남자들이 나온다.
먼저 교도소 안에서 금자의 빼어난 용모와 실력을 알아보고 금자를 고용한 베이커리의 사장이 있는데,
이 남성은 금자가 가불을 받으러 밤늦게 찾아오자 기대하며 웃는 모습을 보이는 등 금자에게 관심이 많고
같은 베이커리에는 금자에게 홀딱 반해서 순정을(…) 바친 근식도 있다.
또한 베이커리에 금자를 맡았던 사건 담당 형사, 최반장이 찾아오는데, 이때 사건의 진상 또한 밝혀진다.
20살의 금자는 자신이 원모를 죽였다고 자수했었지만 원모가 가지고 있던 구슬이 무슨 색인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자수를 받아달라고 떼쓰는 금자에게
금자는 사건 파일을 바탕으로 살해 과정을 재현하는데,
어떤 베개인지 형사가 색으로 힌트를 주기도 했다.
왜 금자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자수를 했을까?
그 이유는 백한상이 금자를 협박했기 때문이다.
열아홉 살에 임신을 한 금자는
고등학생인 자신에게 추파를 던졌던 교생, 즉 백 선생에게
‘임신했으니 선생님에게 가서 살면 안되냐’며 찾아간다.
그에 백 선생은 천진한 금자를 범죄에 연루시킨다.
박찬욱 영화에서 색욕과 죄의 상징으로 많이 등장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죄의 시작과 끝에 강이 나오고
올드보이에서도 근친을 저지른 이우진과 이수아 중, 이수아가 물에 빠져 죽는다.
또 박쥐에서도 불륜과 살인을 저지를 때 강과 물이 나오며,
영화 아가씨에서도 소위 신사들이 음란서적의 낭독을 듣는 장소에서 물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물에 젖은 채로 금자를 맞았던 백 선생이
“세상에는 좋은 유괴가 있고, 나쁜 유괴가 있다. 아이를 잘 데리고 있다가 건강하게 돌려주는 것은 좋은 유괴이다. 부잣집은 (…) 며칠 속이 타겠지만 감동적으로 다시 만나면 더 화목한 가정이 된다”
(이 말은 복수의 나의 것에서도 사용된 대사)
라며, 금자를 유괴에 가담시킨 후
앞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백 선생은 원모를 죽여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금자의 딸을 납치해, 금자가 다 뒤집어쓰고 자수하지 않으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렇기에 금자는 앞과 같이 자수를 한 것.
또한 초반에 나왔던 전도사도, 사실 처음부터 TV 속 금자의 외양에 이끌려, 범죄를 저지른 금자의 천사를 이끌어내겠다고 찾아왔었다.
그는 변한 금자의 사는 곳까지 알아내 찾아와서,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라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이 모습이 굉장히 섬뜩하고 질척이는 이유는,
애초에 전도사가 처음 금자에게 가진 마음은 선한 마음이 아니라
금자의 외양에 대한 육욕으로 인해 ‘천사’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며
이 캐릭터 자체가 종교를,
그리고 남성의 정욕적인 사고방식을 희화화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도사는 금자가 개종했다는 말에 굉장한 짓을 하는데,
그는 돈을 받고 알아낸 금자의 정보를 백 선생에게 넘기기까지 한다.
또한 여기서 전도사와 백한상의 모습은 예수의 정보를 팔아넘긴 유명한 배반자 유다와 자신의 이익 도모한 아둔했던 종교지도자이자, 성경 속 예수를 처형하도록 모의한 가야바와도 비슷하다.
정보를 확인한 백 선생은,
금자가 자신을 해치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감정이 격해졌는지 호흡을 다섯 번 하는데
금자도 아까 맨 처음에 ‘한 남자’에게서 배웠다면서 호흡을 5번 하지 않나.
이는 금자의 모든 계획과 죄의 가르침이 백 선생에게서 나왔다는 암시이며
은혜(5)를 상징했던, 그렇지만 복수가 목적이었던 금자의 행동의 핵심이 백한상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장 원죄에 가까운 행동을 한 것은 세간에서 주목한 아름다운 여성 범죄자인 금자가 아니라, 사실은 백한상이고,
금자는 그에 가담했기에 속죄의 길을 걷고 있는, 원죄의 객체임을 알 수 있다.
이 흐름은 성경에서 여성과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인지하고 바라보면 더욱 또렷하게 알 수 있다.
더 상세히 보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창세기, 민수기에서 가져온 인용들을 보고 가시라.
아담은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그 가운데는 그의 일을 거들 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오시자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창세기 2장 18-24절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창세기 3장 16절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어라."
민수기 31장 17절~18절
이렇듯, 성경을 직관적으로 해석하자면 ‘남성으로 분류되지 않는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에서 태어난, 남성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로 인식되기 쉽다.
종교에서 여성은 순종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순결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하거나 죄인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서, 이게 뜻하는 바와 백 선생이 저지르고 금자에게 흘러왔다는 원죄 또한 영화에서 어떤 것인지,
조금 이따가 알아보자.
백 선생은 구매한 정보를 이용해 두 남자에게 금자의 살인 청부 일까지 맡긴다.
또한 재밌는 것은 여기서 청부된 살인 청부업자 신하균과 송강호 역은, 맨 처음 복수 시리즈인 ‘복수는 나의 것’에서 각각 유괴범과 유괴당한 아이의 아버지 역할이다.
또한 이 둘은 마지막에 서로를 먼저 죽이기 위해 대치하기도 한다. 지금 금자와 백 선생과 연결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금자는 이들을 제거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심지어 다급한 상황에서도 금자는 자신의 총의 유효사거리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금자는 두 명의 남성을 추가로 죽였고
백 선생을 심판하는 장면을 보기 전,
우선 여기까지의 금자의 여정을 짚어보자.
먼저 경주여자 교도소에서는 금자가 우상이자, 두려움의 존재였으며, 천사였다.
이들, 여성들에게는 금자가 주체가 되어 은혜나 구원을 선사하는 쪽이었다.
그렇지만 남성들의 세계에서는 금자는 객체였다.
일곱 남자 모두 금자를 욕망하거나, 금자에게 죄를 짓게 하거나, 혹은 금자를 욕망하는 남성들이며, 영화 속 가장 극단적인 원죄를 저지르는 존재인 백 선생의 하수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5와 7 사이의 숫자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맞다. 6은 대표적인 악마적 숫자이다.
즉 금자는 아까 은혜를 뜻하는 5의 세계, 하얀 여성의 세계에서 남성의 세계, 7이라는 속죄의 개념을 갖고 원죄와 욕망의 틈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나 돌아볼 만큼 예뻤던 금자, 남성 위주의 종교에서 아름다운 여성은 성녀/악녀 이분법적 시선으로 해석되기 쉽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니까 금자가 걸어가는 이 세계는 사회적 성별,
누구나 돌아볼만큼 예뻤던 금자.
남성 위주의 종교에서 아름다운 여성은 이타적이거나, 혹은 유혹의 존재로 해석되기도 쉽다.
앞서 봤던 붉은 세계, 성녀였던 여성의 악마화 챕터는 즉, 금자가 5의 세계에서 7의 세계로 건너오기 위해서 악마로 변해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남성도 아니고, 규격화된 여성에서도 어긋한 죄인 여성의 목소리 그대로, 유혹당하고, 무력으로 대응하며 말 그래도 혼란에 가까운 악마적 존재가 되어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 ‘페미니즘 형이상학’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장을 인용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의 항목들 18권: 페미니즘 형이상학 58p. 전기가오리)
이러한 젠더 위주의 해석은, 금자가 죄인 여성들의 조력으로 무력을 행사하게 된 전제도 반증한다.
금자가 죄를 지은 여성들에게 은혜를 선사한 후, 그들의 죄에서 조력을 얻은 후,
남성들과 대치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이미지로 보고 가자.
이 영화는 여성으로서 정의 내려지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무기로 삼아 남성의 세계에 겨냥하는 영화인 것이다.
종교적 원칙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면 이렇듯 성인 여성들은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순종적인 성녀/창녀 관점은 굳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유구한 여성객채화적 시각이다.
이러한 시선은 영화의 구조와 사건의 인과를 또렷하게 볼 수 있게 한다.
금자는 그런 이분법적 세계에서
자신을 거두고 죄인으로 만든 남성에게 총을 겨눈 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친절한 금자씨 속 금자는 즉 결국 여성이라는 젠더, 종교적/사회적으로 너무나 쉽게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혼란스러운 여성의 세계에서
그들이 갇혀있던 단단한 젠더의 껍질, 아름다움이라는 여성에게 주워진 사회적 산물을 총으로 만든 셈이다.
무엇보다 이 여성 죄인들은 다 함께 힘을 합쳐 심판대를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여성들에게 원죄를 저지르게 한, 남성 권위자를 심판하러 가는 여정으로도 읽힌다.
물론 이러한 젠더 역할론을 그대로 수행하며 무력을 행사하는 것에는 왈가왈부가 많지만 중요한 것은 그만큼 논의할 가치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며, 그를 토대로 영화에서도 반문해 볼 가치도 있겠다.
이 이야기는 그렇기에 계속된다.
실제로 영화 내에서도 이러한 단죄가 과연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한 갈등 상황들을 영화의 절정 부분으로 가며 덧대어 보도록 하자.
조력자 이정이 수면제가 든 밥을 먹여서 금자는 무사히 백 선생을 손에 넣었고,
금자는 백 선생을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다. 다만 백 선생의 머리카락을 마구 잘라댄다.
(곧 백 선생은 검은 머리카락 속에 누워있게 되는데, 이 장면은 결말을 독해할 때 기억해두면 좋은 장면이다.)
잠든 몸뚱이는 이제, 죄인 여성들이 함께 만든 무대가 있는 폐교로 옮겨지게 된다.
(이 시점부터, 친절한 금자씨의 다른 버전에서는 점점 화면이 흑백으로 변해간다. 참고로 넷플릭스에서는 컬러, 왓챠에서는 흑백으로 친절한 금자씨를 볼 수 있다.)
폐교로 따라온 제니는 금자에게 편지를 쓰는데,
금자는 영어를 전혀 못하다보니 영한사전을 하나하나 넘겨가며 읽는다.
이 모습은 꼭 성경을 살펴보는 모습 같다.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고 생각하지 마.
난 아이를 버린 엄마들은 다 감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
어렸을 땐 당신을 찾아가 복수하는 상상을 하곤 했어.
하지만 당신을 죽이는 장면은 상상할 수가 없었는데 그건 당신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어.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복수까진 몰라도 적어도 납득할만한 설명은 해줘.
미안하다고 한 번 말하는 것은 부족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미안하다고 해.
-관대하지 않은 당신의 딸, 제니.
여기서 ‘관대하지 않은 당신의 딸, 제니’라고 썼는데,
이 장면은 또 두 갈래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금자는 ‘납득 가능한 설명’을 위해 백 선생을 데려와, 자신의 말을 번역시킨다.
너 가졌을 때가 생각나, 제니.
배가 불러오니까 지갑이 불룩해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었는데.
근데 네가 돌도 되기 전에 엄마는 감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널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
이제 이 사람하고 볼 일이 끝나면 널 다시 호주로 보내려고 해.
엄마의 죄는 너무 크고 너무 깊어서 너처럼 사랑스러운 딸을 가질 자격이 없거든.
(…)
근데 그것까지도 내가 받아야 하는 벌이야.
잘 들어둬.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되는 거야.
(…) 큰 죄를 지었으면 크게.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게.
그리고 화면이 붉게 물드며, 금자는 자신이 백 선생을 도와서 원모를 죽게 만든 이야기를 털어놓자,
제니는 “걔네 엄마한테 미안하다 말했어? 내가 걔네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줄까?”라고도 하는데,
그 말에 금자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렇게
그리고 금자는 제니에게 제니의 언어로 세 번 사죄하는데,
이 장면은 두 번째 간증이자, 금자가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간증하는 첫 장면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제니의 편지와 더불어 결말에서 덧대어진다. 기억해주자.
그리고, 겨우 7의 세계의 중앙에 도달한 금자.
정말 속죄의 시간이 돌아왔다.
모든 조건이 갖춰졌고, 죄인들이 만든 선로에서, 트롤리가 움직인다.
먼저 트롤리의 조건을 함께 살펴보자.
-백한상은 강남 영어학원의 교사인 점을 이용, 총 5명의 아이들을 유괴/살해했다.
-아이들을 몹시 귀찮아해서, 유괴하자마자 비디오로 찍어 놓고 곧바로 죽이곤 했기에 보호자들이 범인과 협상하는 동안, 이미 죽은 뒤의 목소리였으며.
-심지어 돈은 요트를 사려고 저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죄를 대하는 태도도 엉망이다.
살해한 아이들의 소지품을 핸드폰에 주렁주렁 매달아 두는 등 거의 범죄를 자랑스러워하는 수준이며
살인의 이유를 묻자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예요. 사모님.”
이라고 답할 정도로 반성의 태도 또한 일절 없다.
트롤리 딜레마에서, 선로에 묶인 단 한 사람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 한 명에게 달려가는 트롤리의 선로 전환기를 돌려 5명에게 향하게 할 수 있을까?
백 선생의 휴대폰에 있던 전리품은 금자가 자수한 후 추가로 죽은 아이들이다.
즉, 금자는 백 선생을 진범으로 고발하는 대신 제니를 살리며, 또다른 4명의 아이가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인데
20살 때 이미 선로전환기 앞에 서서 누군가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금자는 백 선생에게 향하는, 트롤리와 선로전환기를 통제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갖춰져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의 근거를 보충하기 위해 원죄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성경에서는 유명하지만 태초의 인간인 아담이 존재한다.
그리고 앞서 첨부했던 이 인용과 같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내 하와를 만들어내는데,
이 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함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는 죄를 저지른다.
짐작했다시피 이 선악과의 색이 보통 붉게 표현되며,
보편교회(공교회, 가톨릭)에서는 이때 아담이 선악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서 울대뼈가 생겼다고 하여 ‘아담의 사과(Adam’s apple)’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 선악과는 보통 사과인 셈인데, 돌이켜보자면 이 사과는 완숙되기 전에 초록색을 띄는 경우가 많다.
(초록색 부분은 원래 넘겼었는데, 수강생 분이 의미심장해 보인다고 한 번 짚어주셔서 추가했다. 감사합니다!)
그걸 기억하고 잠시 과거를 보자.
열아홉 살 때 임신해서 초록빛 케이크를 먹던 금자는
원모의 살해에 가담한 후, 원모가 갖고 있던 붉은 구슬을 건네받는다.
그 후에는 감옥에서 복수를 결심하고 속으로 변하다가
(초록-붉은색 사이의 색깔인 노란색 죄수복)
나중에 붉은색 케이크를 만들고, 붉은 아이섀도우를 바른다.
원래 성경에서는, 원죄에 분노한 하느님은 아래의 인용처럼 그 타락의 대가를 후손들이 지게 했는데.
극 중 금자도 이러한 원죄의 대가를 치른다.
다만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이 ‘원죄’에 가깝게 표현되는 바는 좀 다르다.
그건 바로 아직 설익은 존재. 즉 무고한 아이를 죽이는 행위이다.
이 원죄를 가장 심각하게 저지른 것은, 원모 이후에도 4명의 아이를 죽인 태초의 원죄인 백한상이고,
그다음이 원모의 죽음에 가담했고, 딸 제니에게 상처를 주고, 마지막으로 무고한 존재인 개를 쏠 수 있을 만큼 백한상이 가진 원죄의 부속체로서, 속죄의 길을 걷고 있는 금자이다.
태초의 원죄를 저질렀다고 알려진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둘 또한 성경처럼 대가를 치른다.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된 성경 속 대가와는 달리 금자는 딸 제니를 기를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극 중 백한상의 경우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금자는 그러니까 원모의 유괴에 가담하며 간접적으로 원죄를 저지른 후,
교도소에서 한 번,
살인 청부업자와 대치할 때 두 번 살인을 저질렀고,
폐교로 오기 전, 개를 한 마리 쏘아 죽이기도 했는데, 이를 포함하면 백 선생과 같이 이후에 다섯의 생명을 앗아간 셈이다.
그런데 트롤리 딜레마에서 승객들이 트롤리에 타고 있다면?
그 트롤리를 움직일지, 멈출지도 승객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또한 선택권이 없더라도 과연 승객에게 사람을 치는 트롤리에 타고 있었다는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것은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그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트롤리에 묶여있는 백 선생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아동들의 부모들이 폐교에 모여서,
살해당한 아이의 테이프를 보며 울고, 절규하고, 쓰러지고, 분노한다.
그리고 선로전환기를 쥔 금자는, 이들에게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즉, 유족들에게 딜레마를 제시하는 셈인데, 지난번에 독해했더 케빈에 대하여속 TV씬과 조금 겹친다.
이는 부모에 대한 딜레마이기도 하지만, TV 너머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무고한 이들을 살해한 범죄자를 단죄할지 말지를 윤리적으로 정해야 하는 우리 관객들의 몫이기도 하다.
트롤리에 함께 타보자.
금자는 방향만 틀고, 트롤리는 직접 운전해야 하며, 정답은 없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나?
유족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다수결에 따라 그 자리에서 직접 백한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했고
백한상이 스피커로 듣고 있는 상황에서 규칙을 정한다.
총 4차례에 거쳐 유족들이 복수를 마친다.
그리고 금자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다, 살아있는 백한상의 발에 두 발, 백한상이 죽은 후 머리에 총을 두 발 쏘았다.
유족들이 4차례에 거쳐 백한상을 죽이고, 금자가 4번 총을 쏘며
성경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숫자 8은 안식일이 지난 7일 이후인 8일째, 즉 예수님의 부활을 뜻하며
그날 새로운 출발의 기점이 되어 선택받은 자들을 천국의 길로 인도하기도 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헬라어 알파벳의 숫자 체계를 합치면 888이 나오는데, 정확히는, 예수라는 이름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예수스’ 구원자라는 의미이다.
그처럼 8번에 거쳐 거사를 마친 그들은
금자가 만든 검은 케이크에, 아이들의 숫자에 맞추어 다섯 개의 붉은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를 부른 후,
붉은 속죄(촛불, 죽은 아이들의 숫자)와 검은 죄악(케이크)을 나누어 먹는다.
그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 이가 “불란서에서는 이렇게 말이 끊어질 때는 천사가 지나가는 거라고 그러던데.”라며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는데,
잘 보면 초가 9개다.
물론 유족들도 총 9명이 모였는데, 당연히 상징이다.
9는 3의 3곱으로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 나오며
‘심판(審判:judgment)’ ‘종국(終局:finality)’ 완성(完成:completion)을 의미한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아홉 또는 아홉과 관련된 개념을 죄인 하나의 회개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곧 아홉이라는 개념은 잃어버린 하나가 돌아올 때까지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 18:12-13, 눅 15:4, 7)
사실 여기까지 와서 돌이켜 보자면 영화에서 죄가 없는 어른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가 없는 것은 아이들 뿐이다.
다만 유족들의 경우는 그들, 즉 천사 같던 아이들을 앗아간 원죄인을 단죄를 함으로써 죄와 동시에 구원을 얻는 셈이다.
또한 이를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유족들이 원죄를 저지르며 자격이 박탈당하지 않은,
아이들의 무력함에 전지전능한 역할이 부여된 부모였기 때문이다.
유족들이 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할 수 있냐면,
9명의 어른은 아까 아이들의 유품과 함께 9개의 붉은 인공 초가 달린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각각 한 번씩 종소리를 들었다.
금자가 맨 처음에 천사를 부르면, ‘나 여기 있어요’라고 대답했듯이.
유족들은 ‘천사’의 진실을 만난 것이다.
처음에 금자는 교도소 안에서는 모두 죄인이기에, 천사를 부르는 기도를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말했었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모두가 죄인이 된 상태에서야 천사의 존재와 구원을 느끼게 된다.
즉 죄 없는 아이들이 천사이고, 천사가 된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안식을 선사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이 죄의 무대가 곧 구원이자 안식이라는 의미인데,
이곳에서는 13년간 무대를 마련한 금자만이 허공을 보지 않고,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원죄를 저지른 금자에게는 아직 영혼의 안식에 대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의 단서를 찾은 유족들은 흰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현실로 돌아가버리지만, 금자는 여전히 베이커리에 남아있다.
금자는 영혼의 안식은 어디에 있을까?
그 단서는 찾기가 조금 더 까다로웠지만, 생각보다는 가까이에 있다.
금자는 총 두 번 속죄를 한다.
13년 간의 돈과, 새끼손가락을 자르며 원모의 유괴에 가담한 것에 대해서 원모의 부모님에게,
그리고 그의 여파로 입양 보내진 딸 제니에게.
금자의 진정한 사죄를 받고 금자를 죄인으로 만든 이 둘은 각각 영화에서 신적 존재로 등장한다.
이 챕터에서는 원모를 보자.
일단 모든 일을 끝낸 금자는 붉은 표식을 지우는데,
그런 금자에게 구석에 앉아있던 원모가 붉은 구슬을 다시 건넨다.
돌이켜보자.
태초에 백 선생이 준 붉은 원죄, 즉 선악과를 금자가 건네받았고,
금자는 속죄하며 원모의 부모님에게 건넸지 않았나.
그렇지만 그 원죄는 지금 원모에 의해 다시 금자에게 돌아왔다.
금자는 원모에게 사과하려 하지만,
갑자기 어른이 된 원모는 금자는 입에 백한상과 같은 재갈을 물리고 금자를 잠시 응시한다.
여기서의 원모는. 복수 3부작의 2부작, 올드보이에 나왔던 유지태 배우 분이다.
2편에서도 최민식 배우(백한상)분의 역할, 오대수를 신적인 역할로 서서 단죄하는 역인데,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원모의 모습으로 금자를 내려다보는 입장이다.
그렇다.
금자는 아직까지도 어린아이를 죽인 죄를 용서받을 수 없었다. 성경의 말씀으로도, 폭력과 은혜로 인한 구원을 퍼트리고 다녀도 금자는 원죄를 저질렀기에 속죄의 열쇠를 얻지 못한 것이다.
또한 원모는, 금자를 어디까지나 죄인으로 만드는 종교적 존재, 신적 존재의 극치이다.
원죄를 저지른 아담과 하와에게 분노한 신의 존재처럼.
즉,
금자가 속죄받기 위한 여정의 목적지, 검은 세계의 종착지는 백한상이 아닌 것이다.
백한상이 아닌 원모가 그 너머에 절대자적 존재로서, 금자의 악한 면을 끌어냈던 태초의 원죄의 모습을 한 채 앉아있다.
하느님이 보통 남성이라 알려져 있듯, 원모는 남성의 영역에서 여성을 단죄하는, 남성신의 모습을 한 채 금자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고,
게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더 붙이자면, 금자에게는 이러한 검은 세계, 남성 권위자들을 살해하는 것에서 오는 희열도 존재한다.
백 선생의 머리카락을 자르던 표정을 보자.
이 표정은 금자가 처음 죄를 저지르던 때, 금자가 원모를 살해하던 것을 재현하던 모습과 겹친다.
기억해보자.
금자는 스무 살이 되고, 최초의 죄 이후에, 폭력으로 속죄해야만 하는 죄악의 길로 빠진다.
또한 그것이 금자가 말하는 속죄의 방식이기도 했다.
종교대로라면 감옥에서 다섯의 생명을 구원하며 금자의 속죄가 완결되어야 정상이었겠지만,
금자는 그를 거부하고, 진정한 속죄에 대한 딜레마를 홀로 겪으며, 해결해왔다.
그 기점에 스무 살의 금자가 있다.
미성년에서 스무 살, 즉 아이에서 본격적인 어른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금자는 죄인이 된 것이다.
근식도 스무 살에 순결을 잃었고,
베이커리 사장도 여자 교도소에 애초에 자원봉사를 간 이유가 음욕 때문이었으며,
유족들도 살인을 저지르는 등 이 영화에서 기본적으로 어른들은 모두 죄를 지은 죄인이다.
종교에서 우리가 모두 속죄해야만 하는 죄인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금자가 이 사이를 헤집으며 구원을 위한 방아쇠를 망설임 없이 당길 수 있었던 것 또한, 이 원죄가 있기 때문이었다.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의 껍질을 무력으로 만든 금자.
남성 세계로 총을 겨눴고, 타인에게도 구원과 혼란과 죄를 퍼트리며 단죄를 마친 금자.
하얀 은혜, 5와 검은 7 사이의 세계를 가르고 온 금자 또한 자신 유족들에게 권한 것처럼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 서있다.
무슨 선택지일까?
원죄로 인해 아이를 보호할 자격을 잃은 금자.
그런 금자가 각각 엄마와 누나로 부르려는 이들에게 ‘그냥 금자씨’라고 정정해준 두 명이 있다.
금자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근식에게 본인의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자, 근식은 눈물까지 흘리는데,
이런 모습은 금자가 감옥에 들어가던 나이인 20살이자, 당시에 금자가 갖고 있던 천진한 모습과 꼭 닮아있으며
금자가 20살이고 근식이 6살일 때 죽은 원모의 나이도 6살이었다.
또한 “가정을 일찍 꾸리고, 결혼은 존경할 수 있는 분하고 하고 싶다”거나,
금자의 집에 초대받자 “저는 얘기를 좀 했으면 싶은데”라는 등
보편화된 젠더 위계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만,
금자의 외모에 반해 죄를 지었으면 “반성하고 다시 하지 않으면 된다”며 금자의 죄를 전도사처럼 합리화하려고 하기도 하고,
이때 금자가 “너, 내가 섹시하다고 생각하니?”라고 묻자
(심지어 이건 백 선생이 미성년자인 금자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에 화답하는 근식도 원모처럼 어디까지나, 금자를 욕망하는 남성 세계에 속한 인물인 것이다.
그도 그럴게 근식이 베이커리 밖을 나서는 금자를 뒤따라 나오며 부르는 이 노래는
여전히 ‘붉은 구두’, 즉 원죄를 신고 있는 금자의 행보의 상징이자, 금자를 욕망하던 이, 즉 남성들과의 검은 세계로의 통로를 뜻한다.
그리고 금자가 낳은, 지키고 싶었던 딸, 제니가 있다.
원모와는 다르게 제니는 금자가 앗아간 생명이 아닌, 탄생시킨 생명이다.
엄격한 듯 보이지만 금자 대신 용서를 구하려고 할 정도로 선하고, 아직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며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아이이기도 하다.
또한 원모와 같이 신적 존재이지만, 정작 원모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즉, 원모와는 다른 영역의 신인 것이다.
선진국으로 입양되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며, 꽃이 많고 화려하고 신묘한 분위기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제니.
일종의 천국 속의 존재처럼 느껴질 정도다.
너무나 먼 곳의 존재여서 언어조차 닿지 않으며, 금자가 간절히, 죄를 속죄할 때에서야 제대로 한 번 대화할 수 있었는데
성경 속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구원자)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며 곁을 지켜주었지 않나.
여기서 발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원하고, 때로 심판하기도 하는 구원자에 가까운 존재
붉은 양면성을 상징하는 존재는 금자이며,
그의 수난과 과정을 지켜보는 이는 바로 제니라고 할 수 있다.
제니도 금자에게 복수하고 죽이는 상상까지 했다면서
“적어도 세 번”이상 사과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것.
이라며 엄격한 척 조건을 걸었지만 자신을 버린 값으로 받기에는 사실 정말 아이 같고 너그러운 조건이지 않나.
그렇지만 제니는 정말 그 후에 금자를 품어주었는데 그 속에는 유대 사상이 내포되었던 것을 기억해보자.
유대 사상에서는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는 세 번 이상 용서해 달라고 하지 말 것이다.’
이 장면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했던 제니를 다시 살펴보자.
과거의 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원죄의 연좌죄법을 적용시키지 않는다.
또한 유족들이 TV에서 아이들을 단죄하려던 것과는 달리,
이 모녀는 제니가 TV에서 금자를 보며, 금자를 가엽게 여기는 관계이다.
그런 제니도 근식처럼 양부모와 다시 호주로 떠나기 전, 하얀 연기를 보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때 성인이 된 제니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제니는 금자가 죄를 지우지 않고 죄를 대하는 자세를, 그 본연의 모습을 비추는 금자의 신이며,
금자가 속죄를 하는 동안 늘 뒤편에서 금자의 곁을 지키고 있던 선한 신의 극치인 것이다.
이런 금자의 세상에, 제니 또한 금자가 자신의 속죄를 대입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근식처럼 금자의 곁으로 왔다.
그리고 금자는 근식과 제니 사이에서 제니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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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는 제니에게 베이커리에서 만든 흰 두부 케이크를 제니에게 건네며
전도사가 처음에 말한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두부처럼 살라고 했던 말을 이번에는 제니에게, 제니의 언어로 건넸다.
그리고 제니가 먼저 흰 두부 케이크를 찍어 먹고, 금자에게도 권하자,
그제야 금자도 유족들이 들은 종소리를 듣는다.
회색의 세상에서 온전히 하얘질 수 없는 금자.
금자가 걸어온 속죄의 끝.
결론의 금자는 조금 더, 조금 더 하얘져야 하는 그저 회색의 인간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었지만, 금자는 왜 제니를 골랐을지, 그리고 제니는 왜 금자를 용서했을지 또 다른 관점으로 보자.
먼저 제니는 그런 금자를 유족들이 죽은 아이들을 보며 고통스러워 대신 칼을 뽑아주었던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
금자를 죄인이나 성자 이금자가 아닌 가여운 인간 이금자로 여겨 품어준 것이다.
또한 이것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어른과,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아이의 세계의 차이로 보인다.
왜 이럴 수 있었을까?
금자와 제니는 피가 이어진 모녀관계이지만 제니가 한 살 때부터 13년 이후까지의 공백기가 존재한다.
입양 사실이 공개된 가정에서 성장한 입양아동은 보통 6세 정도부터 출산과 입양의 차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입양아동은 ‘유전학적 당혹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친부모로부터 떨어져서 성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갖는 욕구로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느끼기 위해서 자신의 배경, 가계와 개인력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입양아는 공허감을 채우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신이 타고난 신체적·개인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친부모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
(Kadushin & Martin, 1988)
영화에서는 종종 제니의 노래가 들리는데,
그 노래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한편, 금자는 누구보다 욕망당하던 여성, 객체화되어있던 여성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낸시 초도로우는 젠더 차이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는 이유로 비판한 사회적 학습이론을 비판했다.
초도로우는 젠더화 된 인격이 계발되는 것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대체로 여성인 점을 전제하며,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아들보다는 딸과 동일시하는 편이기 때문에
아들에게는 어머니 자신을 떠나 심리적으로 개인화되기를 무의식적으로 권하며, 그럼으로써 아들이 명확하고 엄밀한 자아 경계를 계발하도록 자극한다.
(이에 대한 영화적 논의와 파국 대해서는 이전에 강의했던 케빈에 대하여를 참조해주세요.)
그렇지만 딸에게는 심리적으로 개인화되기를 무의식적으로 권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딸이 유연하고 모호한 자아 경계를 계발하도록 자극한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동기의 젠더 사회화는 이렇게 무의식으로 계발된 자아 경계를 증축하고 강화하여,
결국 여성스러운 사람과 남성스러운 사람을 생산하기도 하는 것이다.
(전기가오리,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들6 : 섹스와 젠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점들 24p에서 참조/발췌)
우리는 그렇다면 제니와 금자의 재회도 이를 미루어 생각해볼 수 있겠다.
모녀관계에서 어머니가 여성적 역할 수행을 강요받으며 느꼈던 트라우마와 신경증은 같은 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딸이 흡수하도록 또다시 역할 수행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만약 제니가 한국에서 금자와 붙어 지냈다면 아마 금자의 죄와 정형화된 여성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을 거라 짐작해볼 수 있다.
제니는 금자의 영향에서 벗어났기에 호주의 부모님들 틈에서 자유롭게 자라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기도 하는 등 꾸밈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자신의 감정 또한 날 것 그대로 타인에게 밀어붙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도 짐작해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더욱 자신의 뿌리를 설명해줄 수 있는 생물학적 어머니를 찾고 싶었고,
찾고 나서는 진심으로 그를 연민할 수 있던 것이다.
또한 금자는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자신의 유전학적 분신, 즉 자신에게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자신의 피조물을 발견했다.
미처 손에 넣지 않은 자신의 진정한 깨끗함, 동일시할 수 있는 자신의 유전적 분신을 만나 위로받은 것이다.
즉 제니가 입양 보내지지 않은 채 금자와 유착관계가 형성되었다면,
둘이 동일시되었기에 용서의 길목에 놓였을 때의 해석이 까다로워졌겠으나,
이 떨어져 있었던, 서로를 동일시할 수 없었던 기간은 이 둘의 결과에서 서로를 포용하며 들어가는 관계가 된 셈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철저히 여성이 여성으로 인해 복수의 총구를 겨누고 발포한 후,
그들의 생애를 서로에게 위로받는 영화임과 동시에
악마가 된 여성이 전면에 서서 젠더 역할 수행에 이의를 제기한 영화이자,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회색일 수밖에 없는, 처절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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