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57
서로의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자매였다. 농사짓는 이모와 병원생활하는 엄마는 서로를 향해 눈을 떼지 못했다. 얼마만의 만남인지조차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만에 이모가 엄마를 보러 오셨다. 엄마보다 체격이 작은 이모는 농사일 때문인지 꼬부랑 할머니가 되셨다. 기역자처럼 허리가 굽은 것을 제외하고는 까무잡잡한 얼굴로 건강해 보이셨다.
6남매 중 막내인 엄마 위로 이모가 두 분 계셨지만 모두 남도의 섬에 사셨기 때문에 자주 뵐 기회가 없었다. 이모와 친한 친구들이 부러울 정도로 우리에게 이모는 동네 아주머니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다. 형제자매와 떨어져 가난한 서울살이를 했던 엄마와 달리 두 이모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사셨다. 서로 사는 게 너무 달라서였을까, 아님 성격이 달라서였을까는 짐작만 할 뿐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다. 엄마도 이모 이야기를 자주 하시지 않았다. 그저, 외할머니 생전에 부잣집으로 시집을 보낸 두 이모들과 달리 엄마만 가난한 아빠에게 해치우듯 시집을 보냈다는 말만 들었다. 옆 동네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갔던 이모들은 초반에는 풍족하게 사셨지만 중년 이후부터는 재산을 탕진한 이모부들로 인해 썩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이와는 반대로 아빠의 사업 확장으로 엄마의 인생 역전이 시작되었다. 서울에 사는 우리 집이 부유하게 되자 이전과는 다르게 친척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 친사촌, 외사촌 가릴 거 없이 우리 집에서 하루 이틀 보내기가 일쑤였고 나중에는 아빠 사무실에서 일도 했다. 친척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부치고 매번 아빠는 나섰다. 사모님이었던 엄마의 노후가 이리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다 지나간 옛이야기가 되었다.
할머니가 된 두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늙었다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고 어루만졌다. 살기 바쁘다고 자주 못 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헤어지기 전 엄마 손에 봉투를 쥐어 주셨다.
먹고 싶은 거 사 먹어. 많이 못 줘서 미안하다.
난 줄게 없는데.
예전에 많이 줬는데, 됐어. 또 올게.
이모부가 2년 전 돌아가시고 혼자 농사일을 하시는 이모는 돈벌이를 하신다고 엄마에게 용돈을 주고 가셨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소일거리 하며 지내니 얼마나 좋겠냐고 엄마는 부러워하셨다. 혼자 힘으로 독립된 삶을 사시는 이모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악착같이 일을 하신다. 젊은 시절도,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들이 거의 다 사라졌어도 자매라는 핏줄의 정은 남아 있었다. 자주 볼 수 없어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변함없었다.
두 분을 바라보며 이모의 딸들과 엄마의 딸들이 곁에 앉아 있었다. 우리의 노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금처럼 큰 역경 없이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 엄마와 이모처럼, 사실 나도 여동생과 그리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어릴 때부터 신체적 특징부터 성격까지 우리 자매는 참 달랐다. 언니지만 패션 감각도 사회생활 감각도 동생보다 뒤떨어졌던 나는 공부 말고는 크게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지내지 못했다. 그렇게 다른 우리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공통의 관심사가 많아지자 서로를 예전보다 자주 찾게 되었다. 미국에서 살던 동생이 귀국해 같은 하늘아래 살게 되니 자연히 만남의 기회도 늘어났다. 물론 좋을 때도 있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매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안쓰러워하고 챙겨주는 엄마의 두 딸로 살고 있다. 동생은 엄마를 보러 올 때마다 먹을 것을 챙겨 온다. 이번에는 대봉과 밤을 들고 왔다. 엄마를 곁에서 살피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속마음인 거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게 먹었다.
자매끼리는 얼마나 가까울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