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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 Jul 04. 2023

회사의 부품이 되는 것이 꼭 나쁜 걸까?

대형로펌 변호사의 삶에 대한 자조

"나는 회사에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톱니바퀴일 뿐이야."


회사 일로 힘들어하는 친구가 술을 마시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꼭 친구가 아니더라도 드라마 같은 곳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대체될 수 없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전문직을 꿈구었고, 많은 노력 끝에 마침내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회사의 부품이 되는 것이 꼭 나쁜 것이기만 할까?

여느 대형로펌 변호사가 다 그렇겠지만, 나는 주말 혹은 휴가 때 정말 업무에서 해방되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한 번은 공휴일 점심 직후 병원에서 진료 대기를 받다가 시니어 변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님, 지금 바로 업무 착수 가능하신가요?
"제가 지금 병원에서 진료 대기 중이라 조금 어렵습니다."
그렇게 통화가 종료된 후, 1시간 정도 지나 다시 전화가 왔다.
"변호사님, 지금은 업무 착수 가능하신가요?"
"아직 진료가 끝나지 않아서 조금 어렵습니다... 많이 급한 건인가요?"
"급한 건입니다. 그러면 이따 저녁에는 업무 착수가 가능하신가요?"
"제가 저녁까지 병원에 있어야할 것 같아 조금 어렵습니다(다른 약속이 있었는데, 조금 둘러댔다).
"야단났네... OO 변호사님께 문의는 드려보겠는데, 업무 착수 가능하시면 바로 연락주십시오" (결국 연락은 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격무에 시달려 금요일 야근과 주말 풀 근무가 당연히 예정된 때에 메일을 하나 받았다.

"변호사님, 혹시 내일(토요일) 밤까지 OO 건에 대한 리서치 업무 수행이 가능하실까요?"
"제가 월요일 오전까지 마감해야 할 ㅁㅁ건, △△건 업무 때문에 주말 내내 풀 근무를 하여야 하여 여력이 없습니다. 송구하오나 곤란합니다."
"그러시군요..... 그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곤란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납기를 지킬 수 있을지 불분명합니다."
"그럼 되는대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정말로 되는대까지 대충해서 납품한다면 두고두고 욕먹을 일은 눈에 선하다)
"....."


다음과 같은 경우도 종종 있다.

"OO 변호사, 내일 오전까지 ◇◇ 건에 대한 검토 작업 좀 부탁해"
"(시계가 오후 10시 45분을 가리키는 걸 보고) 변호사님, 지금.. 퇴근하려고 했는데... 밤 새야 하는 건가요?"
"음.. 부탁할게. 생각보다 오래 안 걸릴 수도 있어"
".... 저 요즘 좀 힘듭니다."
"음.. 힘들 때지. 부탁할게"
"....."
(결국 새벽 3시경 퇴근하였다. 철야 근무를 하지 않아 다행이었달까)


높은 급여를 받는 대가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선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데, 태생이 이렇게 생겨먹어서 그건 잘 안된다)

그런데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몇 개월을 이와 같이 보내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물론, 항시 바쁜 것은 아니므로 때로 업무 없이 주말을 보내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법원 휴정기 등).

그러나 그 때에도 메일은 언제나 돌기 마련이고, 회신은 즉각즉각 하여야 하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기가 힘들다(메일이 와서 긴장했는데, 나에게 일을 시키는 내용이 아니면 안도의 한숨이 든다).


다음은 로펌에서 사내변호사로 자리를 옮긴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온 이야기다.


"사내변 가니까 워라밸이 좋긴 하더라. 한 명의 회사원일뿐어어서 나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가. 나라는 부품이 없으면 다른 여력이 되는 부품을 갈아끼우면 되니까. 덕분에 쉬는 날에 업무 걱정 없이 푹 쉴 수가 있지. 생각해 보면 회사의 부품이 되는 것이 꼭 나쁜 건가 싶어. 뭐 로펌변인 네가 듣기에 미안한 얘기지만, 주말에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금요일 퇴근 시간쯤 로펌에 던지면서 월요일 오전에 내가 출근 전까지 볼 수 있게 준비해달라고 하면 돼."(진상 고객이 여기도 있었네!)


물론, 무엇이든 장단이 있다. 그렇게 한참 사내변의 장점을 얘기하던 친구도 힘든 얘기를 이어서 하였다.


"급여 줄어드는 건 뭐 각오했던 거고. 걱정되는 건 계속 이대로 (실무 경험을 쌓지 못하고)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점점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실력있는 후배들 치고 올라올텐데 정년까지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는 시점이다. 워라밸 지켜지는 사내변호사라고 하여 걱정이 없지는 않으니 말이다. 남들보다 특출나게 잘난 부분도 없는데, 이 정도 고액 연봉 받는 거면 고생하는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고... 라고 생각하는 순간 메일을 하나 받는다.


"고객 메일에 대한 회신은 1시간 내로! 고객 만족은 낮과 밤, 주말을 떠난 완벽한 업무 수행에서 시작됩니다."


일상적인 법인 공지사항에 관한 메일을 보면서, 오늘도 사내변호사에 1승을 준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룹 변호사 한 분이 휴가 메일을 회람한다.


"그룹분들께, 제가 이번주에 휴가를 낼 예정입니다. 메일은 수시로 확인할 것이며, 진행되는 건들은 휴가 중에도 차질 없이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급한 건은 유선 연락 부탁드립니다."


사내변호사에 2승을 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로스쿨 때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전문가는 죽어도 일터에서 죽어야 한다. 그게 전문가다."

학생 때는 그 말이 그렇게 멋져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섬뜩한 말이다. 섬뜩함을 왜 이제서야 느끼는 걸까?


3승은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



2023. 7.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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