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36)
시골의 겨울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쉬는' 또는 '숨죽이는'이란 접두어를 붙여 '생기를 잃은' 계절로 생각하기 쉬우나, 겨울은 두 가지 일을 하는 중요한 계절이다.
우선 봄의 새싹을 길러내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래서 농투사니들은 논밭에 애써 모은 거름을 잘 삭도록 무더기무더기 쌓아놓는다. 그러면 눈과 비로 땅속에 스며들어 그걸 먹이로 봄날 씨앗은 싹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또 시골의 겨울은 가으내 거둬들인 농산물을 갈무리하는 계절이다. 봄여름 가을을 걸쳐 이런저런 나물을 수확했으면 삶아 말린다. 이렇게 마련한 묵나물은 싱싱한 남새(채소)를 맛볼 수 없는 계절에 언제든 데치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하고...
무도 가늘게 잘라 널어놓아 오가리(말랭이)를 만들고, 무청이나 배춧잎은 시래기 만들려 널어놓고, 고구마는 썰어 빼떼기나 쫄떼기로 말리고… 그러니 겨울은 쉬는 계절이 아니라 새로운 변신의 계절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마을을 한 바퀴 돌다 보면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은 감을 깎아 곶감 만들려고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광경이다. 우리 집도 원래 감이 열리지 않아 곶감을 포기하려 했는데, 아는 이들이 갖다 줘 두 접 가까이 매달아 놓았다.
감에서 곶감이 되어가는 과정은 시각적인 면에서는 그리 예쁘지 않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빛깔이 퇴색하여 희끄무레하다가 까무잡잡하다가 나중에는 허연 곶가지(분)가 핌으로써 끝나니까.
비록 빛깔은 그렇게 바래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감에 단맛이 배여 우리의 입맛을 돋우게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해와 바람에 부대끼며 익어가는 과정을 우리는 '숙성(熟成)'이라 일컫는다.
숙성은 비단 곶감 만들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당장 우리 집 무지개대문에 주렁주렁 달렸던 키위도 마찬가지다. 키위를 먹으려면 딴 상태로 그냥 먹으면 안 된다. 그대로는 이빨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여 한 달 이상 숙성시켜야 한다.
집 아래 감나무 옆의 텃밭에서 조금 거둬들인 고구마도 캔 그대로 먹으면 제 맛이 안 나고, 오래 놔두면 놔둘수록 맛이 든다. (단 따뜻한 곳에 저장해야 한다) 그래서 겨울 시골 고방(표준어 '광' : 창고)은 숙성을 기다리는 작물들로 가득 찬다.
숙성을 사전에서 찾으면 ‘충분히 잘 익음’이다. 충분히 잘 익게 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러니 익어도 충분히 잘 익지 않으면 숙성이 아닌 셈이다. 키위나 홍시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빨리 상품화하기 위해 카바이드 가스류의 약품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요즘도 빨리 숙성시키려 첨가제를 간혹 사용하지만 참숯 원료 등을 활용한 과일 연화제라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연화제를 사용하면 보름 이상 걸리는 걸 그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먹을 수 있는 상품이 된다.
그리고 과일 연화제를 이용하여 만든 홍시는 빛깔과 모양 면에서는 저절로 익은 홍시보다 더 낫다. 허나 둘을 먹어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리라, 그 맛의 차이를. 바로 제대로 오랫동안 숙성 과정을 거쳤느냐 거치지 않았느냐의 차이에서.
그러면 사람도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할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숙성' 대신 그걸 뒤집어 '성숙(成熟)'이라 한다. 성숙은 단순히 생각하면 ‘신체의 발육’을 가리키지만, ‘몸과 마음이 자라 어른이 되다.’란 뜻도 담겨 있다.
이런 논리라면 어른이라면 모두 성숙한 인격을 갖추었다고 해야 할 텐데, 모든 어른이 다 숙성되었을까? 아마 고개를 저을 사람이 더 많으리라. 그 가운데 나도 포함된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은 곪아 터지기 직전이니까.
감을 곶감으로 만드는데 햇볕과 바람과 시간이 필요하다면 사람의 숙성에도 필요한 요소가 있다. 옛 성현들은 '고난'과 '훌륭한 스승'과 '좋은 벗'이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 부자들은 자식에게 바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일부러 고난을 겪게 했나.
그런데 이런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어받았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몇 년 동안 갑질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재벌 2세, 3세들이 좀 많은가. 자기네 아버지야 어려움 속에서 재산을 일구어 고난이 사람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아들딸과 손자 손녀들은 제대로 된 숙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마치 카바이드로 만든 홍시처럼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스승을 만나 평범한 사람이 빛나는 인재가 된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스승을 굳이 학교 선생님에 국한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 어머니도, 이웃 어른도, 아니 가까운 벗도 스승이며, 미용사로서, 요리사로서, 용접기술자로서 일하다가 만난 존경할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스승이 아닌가.
‘2020 올해의 인물’ 스포츠 부문에선 2019년에 이어 손흥민 선수가 또 선정되었다. 그 해의 업적뿐 아니라 향후 기대되는 업적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2021년에도 받지 않을까)
손흥민의 성공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반드시 동반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아버지 손웅정 씨다. 아버지의 혹독한 수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러니 인간의 숙성, 아니 성숙에는 ‘고난’과 ‘스승’과 ‘벗’, 그리고 '세월'이 그 역할을 함은 분명한 듯하다.
그렇게 보면 나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고, 훌륭한 스승을 학교에서 또는 책에서 만났고, 좋은 벗들도 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그럼 나는 성숙한 인간이 되었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내가 앞에서 욕했던 이들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을지 (아니면 모자랄지) 모를 변변찮은 인간이다.
이런 걸 보면 성숙한 인간이 되는 데는 또 필요한 요소가 더 있는 것 같다. 그게 무얼까? 참 궁금하다.
*. 오늘 글은 2022년 1월 8일 올렸는데,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