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 사내(11) + 여자(11)
[제19편] : 사내(11)
그녀의 차를 타고 휴게소에 와 내렸다. 아까 갈 때 꼭 경제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좀 더 같이 있고 싶어 내 차는 여기 박아두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워낙 사람이 많아 누가 적인지 찾아낼 도리가 없지만 의심스러운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녀더러 앞서 가라 했더니 이번엔 자기가 뒤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제는 미행도 없는데 괜히 긴장하며 뒤따라오느니 편히 가라는 배려이리라.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 처음에 한동안 오르막이다가 이내 내리막길로 바뀐다. 이제부터는 한참을 엑셀레이터 밟을 필요가 없다. 브레이크로 적당히 조절하면 된다. 속도계가 이내 110을 넘어서기에 브레이크에 발을 얹었다. 너무 가볍게 밟았는지 속도가 줄지 않는다. 브레이크 성능이 나빠 며칠 전 손을 봤는데도 이 모양이다. 제법 세게 밟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 힘껏 밟았지만 속도가 줄어든 것 같지 않아 계기판을 보니 어느새 140을 가리키고 있다.
‘브레이크인가, 속도계인가?’
순간 불길함이 번개 같이 뇌리를 스쳐간다. 누군가 브레이크에 손을 댐이 분명하다. 갑자기 온몸이 떨린다. 속도계는 160을 가리키고 있다. 경사길이라 그대로 두면 200 넘는 건 시간문제. 주차브레이크를 살짝 당겼다. 그러나 듣지 않는다.
더 당기려다 너무 세게 당기면 차가 방향을 잃어버려 그때는 내 의지가 아니라 차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이치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이제 방법은 없다. 방호벽을 들이받거나 도로 옆 낮게 자리한 논으로 떨어지거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후자를 선택했다. 날았다. 그리고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 여자(11) -
앞에서 차들이 속도를 늦출 때만 해도 도로 공사하느라 한쪽 차선을 없앴거니 했다. 가까이 가서야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속도를 늦춘 채 그곳을 보았다. 차 한 대가 저 아래 보이는 논에 처박혀 있다. 혀를 찼다. 어떻게 차를 몰았으면 저렇게 되었을까. 여기서 거기까지는 차가 아니라 비행기가 되어 날아간 거나 마찬가진데...
아무래도 저 높이라면 운전자가 살아나기 힘드리라. 혹시 논이어서 목숨은 건질 수도…. 성호를 그었다. 이내 차들이 제 속도를 내면서 나도 상념에서 깨어나 엑셀레이터에 발을 얹었다. 조금 전에 본 차의 빛깔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
‘초록빛’
주차장 같은 데선 둘러보면 한두 대 찾을 수 있는 빛깔이지 분명 그리 흔한 빛깔은 아니다. 그런데 그이의 차도 바로 그 빛깔이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킬 겸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내려 뒤쪽을 보았다. 이미 많이 지나쳐 사고 장소는 보이지 않는다. 어쩔까,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만에 하나….
뛰어갔다. 경찰들이 운전자로 보이는 사람을 들것에 싣고 고속도로 건너 국도로 옮기고 있는 중이다. 이 자리에서는 아무리 눈이 좋아도 인상착의를 알아볼 수 없는 거리다. 대신에 비교적 가까운 논 쪽에 시력을 모았다. 그러나 물이 가득 찬 논에 빠진지라 차 번호판이 잠겨 보이지 않는다.
‘번호판만 볼 수 있다면….’
망설였다. 얼마 안 있으면 레커가 와 끌어낼 때 보면…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레커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확인하려면 바지를 걷고 신발을 벗고 직접 물이 가득 찬 논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다시 망설였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웬 정신 나간 여자가 하는 짓을 보려고 차들의 속도가 다시 느려질 게고.
망설임은 잠깐, 결단을 내렸다. 창피는 순간이지만 그이는 내게 영원한 존재 아닌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논을 가로지르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 바닥은 늪처럼 한 번 디딘 발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미 스커트는 물론 블라우스까지 흙탕물이 튀어 엉망이 됐다. 그만둘까 하다가 내친김에 가보기로 했다. 허탕 치면 옷 세탁비만 날리면 된다는 마음으로. 가까이 가 차 뒷면의 번호판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곳이 뻘탕이라는 것도 의식 못한 채.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누가 이상한 여자의 행동에 신고한 모양인지 경찰 찾아옴이 다행이랄까. 정신없이 묻는 말에 사정은 이해한다면서도 나를 보는 눈은 정상인을 보는 눈이 아니다.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관할이 다르다면서.
그러나 마구마구 억지 부렸다. 그래도 그이를 데려간 병원을 알아낸 건 그로부터 삼십 분은 더 지나서다. 그곳은 그와 내가 사는 도시에 위치한 병원이었다. 가까운 시골 의원에서는 아예 손대 못 대고 곧바로 큰 병원으로 옮겼다 했으니.
아득했다. 하늘의 빛깔을 잊었다. ‘안 돼’라는 소릴 속으로만 했는지 밖으로도 내질렀는지 모르겠다. 차를 몰 자신이 없었지만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택시를 잡을 수 없어 억지로 차를 몰았다. 계속 응급실로 전화했지만 ‘아직은 뭐라 말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어야 했고.
정신없이 달려왔어도 병원 앞에 와서는 정신을 차리려 했다. 아무리 그이가 위중하다 해도 여기는 우리가 생활하는 도시. 맹세코 그 사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이런 차림으로 그이에게 갔을 때 매스컴을 탄 덕으로 단번에 소문이 날 게고. 그러면 그이가 죽더라도, 살더라도 누(累)가 되리라.
근처 옷가게에 들르고 목욕탕을 찾고 하던 중에서야 하느님을 찾았다. 가장 먼저 찾았어야 할 분이었는데 가장 필요할 때 잊고 있었다니.
“제가 대신…”이란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살려만 주신다면…” 하면서 살아났을 때 이행할 수 없는 ‘… 주신다면 ~~~ … 하겠습니다’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살아야 해요. 당신은 반드시 살아야 해요.”
하는 말을 최면 걸 듯하면서 응급실에 뛰어들었을 때, 비로소 그이가 홀몸이 아님을 깨달았다. 여러 사람이 있었으나 그이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나를 보았다. 흐늘거리는 발길을 되돌렸다. 그이가 가장 위급할 때 지켜볼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문을 손으로 여는 걸 잊고 이마로 열었는데도 부딪히는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으나 무의식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누군가 어깨를 잡는다. 그제서야 돌아봤다. 그이의 아내로 보였던 여자다. 얼굴을 내밀었다. 뺨이라도 실컷 맞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 저기 잠깐 앉아요.” 하며 나를 부축하다시피 긴 의자에 앉혔다.
“생명엔 지장 없다고 해요. 아직 정신은 차리지 못했지만 곧 의식을 회복할 거래요. 마지막 순간 핸들을 아주 잘 꺾어 현재 상태론 갈비뼈 두 개가 나간 것과 장파열이 의심되는 정도라 해요. 그쪽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같이 타지 않으셨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교통사고라 하던데 사고 장면은 목격하셨어요?”
“아뇨. 그… 정말 살 수 있대요?”
“네.”
우리 둘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참 이상하죠. 아내인 제가 그쪽보다 훨씬 더 침착하잖아요. 그쪽은 아직도 넋이 나가 있는데.”
“죄송해요… 일이 이렇게 돼서….”
“오늘은 사과받을 기분이 아니군요. 그런데 어디서 뵌 분 같은데요?”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애들 아빠에게 물었어요, 저보다 나은 여자냐고.”
아직도 빠진 얼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단한 여자란 생각이 든다. 이 와중에 이런 얘기를 친구에게 하듯이 자연스레 꺼낸다는 건 나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
“뭐라 답했는지 아세요?”
가만히 있었다.
“저랑 비슷하다 했는데, 오늘 보니 저를 위로해 주느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욕을 하든지, 뺨을 치든지 하세요. 전 지금 너무너무 피로해서 쓰러질 것만 같거든요.”
“욕하고 뺨을 때리는 대신 한 마디만 하지요. 다음에 또 이런 일로 만나지 않길 바래요.”
“얼굴에 생기 도는 걸 보니 오늘 하루가 즐거웠나 보군.”
빙글거리며 놀리듯이 말하는 그 사람에게 떨어져 나와 잠시라도 빨리 눕고만 싶은 심정에 대꾸하지 않고 침실로 한 걸음 한 걸음 겨우 발을 떼놓았다.
“고향에 가니까 누가 반갑게 맞이해 주던?”
‘고향에 가니까…’
갑자기 머리끝이 곤두섰다. 이 사람은 내가 ‘피아트’에 다녀온 걸 알고 있다. 허나 그런 사실을 안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내 일을 알고 있다면 그이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교통사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노려보았다.
“당신이 그랬어요?”
“뭘?”
“그이를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난 네년이 뭘 말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걸.”
하면서도 이죽거리는 말투에 나는 이성을 잃었다.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떨어져 나간 건 나.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정말 사람 아닌 짐승이에요!”
고함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역시 되돌아 튕겨 나올 뿐. 이번엔 벽에 머리를 부딪혀 일어설 기운조차 사라진다. 의식까지 몽롱해지는데 앞에 와 서는 기척이 느껴진다.
“전에 말 안 했던가. 나는 짐승이라고. 그리고 왜 네년에게만은 짐승처럼 행동하는 가도…. 가관이라더군, 온몸이 흙 범벅, 물 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미친 여자처럼 헤매 다니는 꼴이.”
“신고할 거야.”
반말을 처음 사용했다. 그 무서운 존재에게. 그러나 이젠 겁나지 않는다.
“신고해 봐, 너만 병신이 되고 말 뿐이지. 아 물론 나도 조금은 타격을 받겠지. 마누라가 바람나 정신병자가 됐다고 하면. 그렇지만 이용하기에 따라선 호재가 될 수도 있어. 지금 가르쳐 주면 네년이 머리 쓸까 봐 못 가르쳐주겠고…. 어때 오늘밤 기분도 그렇잖은데 찐하게 사랑이나 나눌까.” 하며 앞가슴을 잡으러 들었다.
오늘 저녁에 사 입은 원피스가 나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간다. 정신을 차리려 했다. 절대로 짐승에게 당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의 의지는 살았으나 육체의 의지는 죽어 브래지어가, 팬티가 차례를 비명을 질러도 손 끝 하나 움직일 힘은 없다. 마지막 온 힘을 입에 다 모았다.
‘안녕, 내 사랑!’
“이런 미친년 봤나.”
하는 소리를 귓가로 흐릿하게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다음 호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