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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Sep 05. 2022

어느 속 좁은 날에

  

 라디오를 켰다.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요즘 전 세계를 달구고 있는 K팝 뮤직이 차 안을 메웠다. 한류 열풍에 큰 공헌을 한 바는 없으나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수업하러 가는 길이 내내 신났다.

 

 “우리 원어민 선생님은 미국 사람인데 한국말을 전혀 못해요. 그래서 엄마가 좋대요.”

 책을 펴자마자 아이가 말했다. 한류 열풍이 아무리 드세다 해도, 이 땅에서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아이와 학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말에 무지한 외국인 선생님을 선호하는 것을 아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영어공부를 시작한 지 일 년도 안 된 아이가 원어민 선생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잘해 보라며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얼마 후 그 아이가 말했다.

 “우리 원어민 선생님은 택시 타고 다니는데 아직도 어디 가자는 말을 못 한대요. 우리 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기사한테 보여준대요.”

 “그 선생님이 한국 오신 지 얼마나 됐는데?”

 “이 년쯤 됐대요.”


 타국에서 직업을 갖고 살면서 매번 가는 곳의 주소를 현지어로 못 외울 정도면 머리가 나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성의가 없다고 해야 하나.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 아이에게 말했다.

 “다음 시간에 선생님 뵈면 네가 알려드려. ΟΟ동 ΟΟΟ아파트 가주세요. 택시 타면 그렇게 말씀하시라고.”

 “왜요? 택시기사가 알아서 영어로 말해 준대요.”

 아, 그 원어민 선생님은 이 년 가까이 한국에 살면서 답답한 게 없었구나. 친절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아서 영어로 응해줬구나. 우리나라 국민성과 외국어 실력이 이 정도라고 우쭐해야 하는 건지…. 

 

 몇 달 후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한 외국인이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 눈빛이 호의적이었는지 그는 내게 다가왔다.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그가 말했다.

 “Excuse me, how can I get to this apartment? Is there a bus stop nearby?"

 근처에 버스 정류소가 있냐는 그의 질문에 전에 아이가 말했던 원어민 선생님이 떠올랐다. 이 사람도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말을 안 써도 딱히 불편할 것 없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본때를 보여줘야지.

 “버스 타고 가기엔 너무 복잡할 것 같은데, 택시 타는 편이 좋겠어요.”

 나는 굳이 한국말로 대답했다.

 

 그 외국인은 난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영어로 답할 줄 알았나. 어떻게든 영어로 대답해주려고 끙끙대는 모습을 기대했다면 오산이지. 한국에서 한국말을 못 하면 많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껴야지. 나는 통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외국인의 눈이 슬퍼지는 것을 보았다. 날은 어스름해지는데 길은 모르겠고 말은 안 통하고…. 그 상황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몇 해 전 프라하의 한 거리에서 나도 길도 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오니 깜깜한 밤이었다. 밤눈이 밝지도 않은 터에 트램 정거장을 찾을 자신이 없어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 스탠드를 찾아봤지만 어둡고 낯선 거리에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한 사람이 내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평상복인지 작업복인지 가늠할 수 없는 점퍼에 스카프를 머리까지 둘러 쓴 중년의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물었다.

 “Excuse me, ma'am. Where can I take a taxi?"

 그녀는 흠칫 놀라며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순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한 번 더 물었다. 택시를 어디서 타면 좋겠냐고….

 

 그녀는 체코 토박이임이 분명해 보였다. 자국어 외에는 배운 적도 배울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내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내 간절한 표정을 읽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체코에 오면서 체코 말을 배워오지 않았을까. 왜 영어로 소통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을까. 


 내 표정을 읽은 그녀는 적어도 내가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바로 떠나지 않고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내 쪽을 보고 서있는 그녀가 신경 쓰였다. 한참 후 드디어 택시가 내 앞에 섰다. 택시에 올라타면서 그녀 쪽을 보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낯선 이방인을 거리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그녀도 나와 함께 택시를 기다려준 것이었다.


 마트 앞에서 만난 외국인도 낯선 나라에서 현지인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적어도 밤길에 거리를 헤매는 처지는 면하게 해 줘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마트 앞 택시 승차장으로 그를 안내했다. 여행 중이냐고 묻자 그는 외국어 강사라고 했다. 그가 택시에 탔을 때 나는 기사님께 ΟΟ 아파트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땡큐를 연발하는 외국인에게 나도 프라하에서의 여인처럼 잘 가라고 손짓을 해주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속 좁게 굴어서 미안해요. 근데 여기 살려면 한국말은 좀 배우는 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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