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밤, 예술의 길

로베르토 볼라뇨의 《 칠레의 밤》을 읽고

by 다미

"칠레에서는 문학을 이렇게 하지"를 살짝 바꿔보면, "우리들은 문학을 이렇게 하지."가 된다. 애꿎은 몇 마디를 덧붙이면, "우리들은 문학을 이렇게 하지. 칠레의 대저택에 지하실과 감금된 사내가 있듯, 지금 이 자리의 우리들도 저마다 칠흑 같은 어둠을 숨긴 채 문학을 하고 있다네. 밀실이 세상에 드러날 때, 어느 하나는 단죄의 대상이, 다른 하나는 영광의 대상이 된다네. 자네가 부디......."


나는 이바카체와 사뭇 닮았다. 늘 앞으로 향해 내딛으며 살아왔다. 이바카체에게도 문학에 대한 그런 일념이 존재했다. 그렇게 문학의 황무지, 칠레의 땅에서 그는 하나둘씩 일구어낸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신부의 마지막 순간에 그를 위해 실컷 울어주는 사람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페어웰의 농장에서 네루다를 만난 그날 경험했던 경이로운 숨 멎음처럼 고통 없이 충만한 마지막이기를 빌어주면서 애도하는 것이다.


또 한편, 이런 생각을 한다. 이바카체 신부가 칠레가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또는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문학은 권력으로부터 순수할 수 있었을까. 애석하게도 다른 형태의 권력과 부패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의 회고 속 부패한 예술은 개인의 문제도 아니고, 칠레의 문제도 아니며, 보편적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현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너무 빤히 바라본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조금만 현실에서 시선을 떼고, 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장군들을 대상으로 한 이바카체의 공산주의 강의나, 카날레스의 저택에서 일어난 일은 예술과 권력의 결탁이라기보다, 영원한 예술과 덧없는 권력의 일순간이 한 장면에 교차했던 것일 뿐이라는 사유에 다다르게 된다.


예술은 시간을 타지 않는다. 영속에 머무르며, 권력의 응집과 소멸을 관망한다. 게다가 예술을 두고 흔히들 말하는 순수하다는 표현은 예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발현된 것이지, 본디 예술이라는 것에는 일종의 순수성이라는 이상마저도 없다. 창조와 영원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예술 속에는 그 어떤 권력도 침범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방이 존재한다. 그 방은 예술을 지키는 힘이고, 그곳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항시 타오른다.


그러므로 권력과 예술의 결탁에 대한 회의는 근원적으로 그들의 결탁이 결탁이 될 수 없고, 그 두 가지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도 아닐뿐더러, 그 이유는 예술이 더욱 높은 경지에 있기 때문이라, 쉽게 말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