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결여된 것은
한 동안 우울과 무기력감으로 힘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대화방에 누군가 올린 영상을 무심코 재생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신림역 살인사건 영상이었던 것이다. 그 잔혹한 장면, 나와 비슷한 또래 청년의 생명이 꺼져가는 장면을 본 후로, 무기력과 우울이 며칠이나 나를 괴롭혔다. 나라고 저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저 아이는 저렇게 저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도 안 해봤을 텐데라는 등,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언론과 미디어는 떠들썩했다. 고리타분한 사형제도 존폐여부 논의와, 가석방 없는 종신형 논의가 또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강력사건이 날 때마다 똑같은 과정이다. 살인을 저지르는 자가 설마 미래를 꿈꾸면서 살인을 할까. 그 어떤 강력한 처벌이 있다 하더라도, 살인까지 마음먹은 사람이 살인을 멈추는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결국은 왜 살인이 일어나는지, 뭐가 문제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하지만, 분노에 찬 시민사회를 달래기 위해 입에 물려주는 사탕 같은 이야기는 결국 강력한 처벌에 대한 논의뿐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자산가격의 급등이라는 자본주의적 열병을 앓았다. 자산가격의 급등은, 모두가 어제보다 조금은 잘 살게 된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플랫폼 노동자들이 단기 특수로 인해 많은 급여를 받는 것이, 마치 저임금 일자리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줬고, 평범한 월급쟁이가 산 코스피 대형 주식의 가격이 오르니, 모두가 마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산가격 인플레이션의 레버리지 효과는, 기초자산 보유 규모에 따라 수십 배는 다른 효과를 내기 마련이다. 가난한 사람이 두 배 부자가 될 때, 부자는 열 배, 백배는 더 부자가 된다. 그리고 파티가 끝나면, 정신 차려보니 열 배, 백배는 더 멀어진 부의 격차가 눈에 보이게 된다. 바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다.
자본주의적 열병이 할퀸 상처는, 비단 부의 격차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유튜버들은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고, 자본소득을 칭송했다. 회사 일을 열심히 하면 바보라고, 투자만이 살 길이라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실성을 비하했다. 운 좋게 일확천금하게 된 몇몇 사례들은 잘 다듬어진 신화가 되어서, 평범하게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선사했고, 사회는 전반적인 동력을 잃었다. 젊은 세대가 평범한 삶을 살아갈 동력을 잃은 것을 두고 MZ세대 갈등이라고 치부하면서 개선하려들지 않는 기득권의 세태는, 이 상처가 수많은 문제를 양산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발자국 앞을 내다볼 수 있고, 언젠가는 목적한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세상에서는, 나의 지금 상황이 아무리 비참하고 힘들다 하더라도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내가 한 발자국 나아갈 때, 목적지는 두 걸음, 세 걸음 멀어지는 세상에서는, 나아갈 동력을 잃는다.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성실함과 목적을 잃은 사람에게 남는 것은,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뿐이다.
범죄가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을 가장 혐오한다. 모두가 힘들다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묵묵히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다만, 잠재적으로 범죄를 일으킬지 말지 경계에 있던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범죄의 실행 여부는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범죄율과 형태는, 그 사회의 계층분포와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양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에서, 한쪽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금융사기와 횡령, 배임문제가 터지고, 한쪽은 이러나저러나 미래가 없는 사람들의 강력 범죄로 물든다. 자본주의적 열병이 도덕과 윤리를 헌신짝 취급하고, 재력을 유일한 인간의 판단기준으로 만들어낸 결과다.
고위층, 기득권층의 금융범죄도, 큰 틀에서 보면 살인사건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취한 금융수익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들이다. 누군가의 미래를 앗아가고, 꿈을 짓밟은 범죄다. 칼만 안 들었을 뿐, 사람의 영혼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경제사범은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칼부림 사건에는 사형을 운운하며 여론달래기를 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이 사회에 정말 결여된 것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다. 마스크를 벗었다고 일상으로 복귀한 것이 아니다. 마스크를 벗으니, 벗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일그러짐이 드러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분노하고 있고, 그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고 있다. 그 분노의 에너지를 다시 평범한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데 쓸 수 있게 전환해 주는 것이, 지금의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현장 노동자가 생업의 수단으로써 자신의 직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사무직 노동자가 구직 어플이나 주식 어플을 쳐다보지 않아도 되게끔 해야 한다.
위정자도 사람이니, 개인적인 사상적 선호가 있다는 것을 백번 양보해서 이해한다. 하지만 패션에도 TPO가 있듯, 정치도 상황을 봐가면서 사상을 펼쳐야 한다. 지금은 자유 어쩌고 하는 것들을 논할 때가 아니다. 이권카르텔 같은 소리를 하면서 노동자를 때려잡을 시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게,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가 필요하다. 물론 정치가 개인의 선택에서 오는 모든 칼부림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경계에서 실행 여부를 재고 있을 사람들의 판단을 무마시킬 수 있음은 분명하다.
위선이라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선을 이야기하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정치를 원한다. 도덕과 윤리가 지킬만한 가치가 있고, 성실하게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게 세금모아 의전 받는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나아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다. 꿈같은 이야기라는 소리를 들을게 뻔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꿈같은 소리가 아닌, 가능성의 영역에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