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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석 Oct 17. 2021

나, 자기, 자신, 자아

자아는 버리거나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나(我)’, ‘자기(自己)’, ‘자신(自身)’, ‘자아(自我)’는 내가 나 자신을 인식하여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이다. ‘나’라는 존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내가 남과 구별되고 다르다는 점이다.


내가 남과 다르지 않다면

나는 나로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내가 남과 같다면

남이 나를 대신해서 살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서 살아야 할 이유는

나의 나됨이 남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름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다르고

정신(영)이 독특하다.  

나에게 남과 같이 돼라 하면 날 보고 없어지라는 말이다.


        자기와 자아는 사람의 근본적인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사유(思惟)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낱말이다. 그런데, ‘자기’와 ‘자아’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와 혼돈은 아주 심하다. 중요한 용어에 대한 오해와 혼돈은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1992년,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턴 루지 대학촌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본에서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서 온 한 학생이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할로윈 파티에 참석하려다가 잘못해서 다른 집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아내가 급하게 남편에게 알렸다. 남편은 급하게 총을 챙겨 들고 그 학생을 겨누고서 ‘freeze(꼼 작마)’라고 소리쳤다. 이 경고를 알아듣지 못한 학생은 웃으면서 계속 다가갔다. 총알이 발사되었고 그 학생은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이 일본 학생은 ‘freeze’를 ‘please’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다.


자기(自己)

          ‘자기(自己)’는 ‘나’라는 존재 그 자체인 ‘혼(魂)’를 가리키지만, ‘혼(魂)’이라 이름하지 않고 쓰는 일반적인 말이다. ‘자기’는 어떤 사상이나 종교적인 교리에 한정되지 않고 ‘혼’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말이다. 이와 함께,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부간에 서로 ‘자기’라는 호칭을 쓰기도 한다.   

          ‘자신(自身)’은 자기의 몸(身)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줄인 말이기도 하다. ‘자기’는 영어의 ’self’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래서, ‘self control’을 ‘자기 통제’로 번역한다. 그런데, ‘Myself’를 ‘내 자기’로 해야 하는데, ‘나 자신’으로 쓰고 있다. 여기에서, ‘자신’은 ‘자기 자신’을 줄인 형태로서 ‘자기’와 같아 보인다. 언어의 혼돈을 피하려면, ‘자기’는 ‘self’에 상당하는 개념으로, ‘self’는 일관성 있게 ‘자기’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자기는 ‘우리’를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이며, 가장 가까운 두 자기가 모여서 부부가 되고, 다른 우리를 이루는 단위가 된다. 자기는 또 다른 다양한 기능과 가치를 가진 우리에 속하게 된다. 하나인 자기가 다양한 우리에 속하여 겪는 갈등이 있다.


자기들이 모여서 우리가 된다.

피로된 우리

약속으로 된 우리

사랑으로 된 우리도 있다.

우리의 기본 단위는 자기이다.

최소한의 우리는 두세 자기들이다.

우리는 토지, 피, 목적, 가치와 같은 무엇을 공유한다.  

피로된 우리는 나의 선택이 아니다.  

나는 한 개인으로, 한 가족 안에 있다.

그리고 수많은 우리에 속하기도 이별하기도 한다.

내가 우리에 속할 때, 우리의 가치와 목적을 공유한다.  

나는 한 개인의 역할과 우리의 역할이 있다.  

이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     


          자기는 마음속에 여러 가지 욕구 때문에 갈등을 겪기도 한다. 시인과 촌장으로 알려진 하덕규 시인은 ‘가시나무’를 통해 자기 속에 느끼는 자기들 간의 갈등을 표현하였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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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나는 한 정체감을 가진 한 자기이어야 한다. 만약, 자기가 여럿이 되면, 내면의 갈등은 말할 것 없고,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을 불러올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가사에 공감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자기를 주체와 객체로 인식하고 지칭할 수 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자기의 주체가 된다. 주로,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자기를 지칭하는 경우이다. 반면에, “나 좀 봐, 내가 왜 이러지!” 할 때, 내가 자신을 한 객체로 가리키는 경우이다. 그래서, ‘관찰하는 자기’, ‘진아(眞我)’ ‘가아(假我)’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골프장에서 공을 잘못 치고선, 자기에게 ‘이 바보’라고 욕하는 경우도 있다. 욕하는 자기와 욕 듣은 자기가 다른가? 같은 자기이다. 남들이 자기에게 ‘이 바보’라고 말했다면 큰 싸움이 났을 것이다.  


가족 간에는 가족애(familyhood),

이웃 간에는 이웃애(neighborhood),

친구 간에는 우정(friendhood),

자기 인성 간에는 자기애(selfhood)가 있다.

자기 혹은 남들이 자기가 타고난 인성, 신체조건을 욕하면,

싸움이 일어난다.   

내가 자기를 가장 잘 안다.

자기애는 자기를 옹호한다.  

자기애가 아니다 할 때까지는 그렇다.


          ‘영과 혼’이란 글에서 논의했지만,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살아있는 혼’이다. 살아있는 혼으로서의 자기(自己)는 몸과 함께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영을 포함한다. 영을 가진 자기들이 사회를 이루고, 사회를 이룬 자기들은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싶어 한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어 한다.


우리 안에 자기들은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싶어 한다.   

자기의 방향, 원리, 가치가 우리의 그것들과 다르면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다.  

분열된 우리 속에서

자기를 밝히면

미움, 시기, 무관심이 따른다.   

조화로운 우리 속에서

자기를 밝히면

칭찬, 인정, 동정이 따른다.


          힘든 노동을 한 후, 잠자리에 들었는데, 신음을 내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신음을 내는 자기나 그것을 의식하는 자기나 같은 자기이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어느 날, 내가 마음속으로 “오늘 무리를 해서라도 이 일을 마쳐야겠다.”라고 다짐한다. 얼마 후, “이러다 병나겠다. 그만두자.”라고 말한다. 일을 빨리 마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몸을 돌보려는 마음 간의 갈등이다. 이를 두고, ‘관찰하는 자기(observing self)’ 또는 ‘진정한 자기(true self)’ 등의 개념을 도입하는데, 자기 이해에 혼돈만 불려 일으킨다.

          자기 속의 여러 가지 욕구 때문에 생기는 욕구 갈등이 있을 수 있고, 자기가 맡은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생기는 역할 갈등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자기가 우리에 속하므로 생기는 자기와 우리 간의 갈등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기는 하나 이여야 하고, 하나로 인식되고, 하나로 표현되어야 한다.


자아(自我)

          ‘자아(自我)’는 자기(自己)와 동의어이지만 좀 더 학문적인 용어이다. 철학, 심리학, 발달 심리 그리고 정신 분석과 같은 학문 영역에서 이 용어를 다양한 해석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자아에 대한 철학적인 몇 가지 주요한 관점들은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아(自我)란 지(知), 정(精), 의(意)와 같은 인성으로 이루어진 한 인격(personality)의 주체이며, 자신의 인식과 행동의 주체이다. 또한, 자아는 자기 자신을 한 객체로 관찰하며 성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발달 심리학에서, ‘자아’는 사회적인 교류와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자기에 대한 이해’로 정의한다. 자아란 전 생애를 통해서 계속해서 발달하고 형성된다.   

          정신 분석학에서, 자아란 프로이트(Freud)가 주장한 심리의 세 가지 요소(Id, Ego, Superego) 중 한 요소, ‘Ego’에 상당하는 용어이다. 이드(Id)는 성 욕구와 같은 본능적인 욕구이며, ‘자아(Ego)’는 이드(Id)의 무분별한 욕구와 초자아(Superego)로 부터의 욕구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심리 요소로 주장된다. 정신 분석학에서 쓰이는 ‘자아(Ego)’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자아(自我)’라는 말 보다 상당히 제한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egocentric’을 ‘자기중심적’ 또는 ‘이기적’으로 번역한다. 이를 ‘자아 중심적’이나 ‘자아적’이라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ego”는 ‘이기적’이라는 뜻을 내포하지만, ‘자아(自我)’는 그런 뜻으로 만 사용되지 않는다.  

          성장기에는 역할 모델도 필요하고 누구처럼 되고자 하는 동기도 필요하다. 하지만, 정체성이 상당히 형성된 성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어떤 사람같이 되려고 하는 일은 어렵거나 위험하다. 자아 개념(self-concept)과 정체성(identity)은 전 생애에 걸쳐 형성되지만, 청소년기 (12~18세)는 자아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형성되는 자아개념과 정체성은 나머지 생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아는 정체성으로 인식되고 드러난다.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들은 성별, 선호도, 취미, 학력, 직업, 국가, 신앙, 가치관 등이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다양한 문화적인 요소와 명칭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잘 인식하고 바르게 드러내면서 우리라는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 남이 나를 다르게 이해하면, 오해가 발생하고, 내가 나를 다르게 드러내면 기만과 위선이 된다. 가장 심한 거짓은 자기가 자신을 오해하고 속이는 경우이다. ‘정체성(identity)’이란 말은 ‘같다’라는 의미가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어떤 명칭이나 분류와 같음(sameness)을 의미한다. ‘나는 가수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가수’의 일을 해야 하고, ‘가수’라는 명칭에 걸맞은 재능을 드러내어야 한다. 자신의 직업, 호칭, 재능, 주위의 인정, 자아 정체성이 같을 때, 그 사람은 자아 정체성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둑이나 간첩, 배신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는 온갖 종류의 배신자들이 차가운 호수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다. 단테가 수많은 머리들 사이로 지나면서 어느 한 영혼의 얼굴을 발로 차게 되었다. 그 영혼은 “왜 나를 짓밟아?”라고 소리쳤다. 단테는 그 영혼의 머리채를 잡고 이름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는 “내 머리털을 모두 뽑아낸다 해도, 내 머리를 천 번이나 걷어찬다 해도, 내가 누구인지 너에게 밝히지 않겠다”라고 대답한다. 우리 가운데서 자아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배신자, 도둑, 간첩 같은 사람이다.

          유전이나, 생화학적, 또는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하는 이상심리가 있다. 정신 분열과 치매의 공통된 특성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 정신 분열은 한 인격체의 주체인 정신(영)과 혼이 분열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정신 분열 상태에서 자신의 신체, 정신, 감정을 자기가 통제하지 못한다. 치매는 다른 요인으로 인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자아’는 이기적이므로 “자아를 버려야 한다.” 또는 “자아를 죽여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자아를 버리면, 얼빠진 사람이 된다. 자아를 미워하고 죽이는 행동은 자살과 같은 시도이다. 심하면, 정신 분열이나 치매처럼, 자기가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자아는 한 인격의 주체이다. 그리고, 한 인격의 주체는 그 사람의 영과 혼을 시사한다. 자아는 바르게 세우거나 새롭게 해야 할 대상이지, 버리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

          우리 없는 자기도 생각할 수 없지만 자기 없는 우리도 상상할 수 없다. 자기는 우리의 기본 단위이며 다양한 자기들이 모여 우리를 만든다. 미숙한 자기는 항시 이기적이지만, 성숙한 자기는 우리 안에서 자기를 완성한다. 나의 선(善)이 우리의 선(善)이 되고, 우리의 선이 나의 선이 될 때, 온전한 자아실현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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