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만리장성이 허물어지던 날

다시 불어온 황사

by 최경열

1992년 8월 24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한중 수교 소식은 내 심장을 거세게 때렸다. 불과 몇 년 전, 링링과의 사랑을 가로막던 그 거대하고 견고했던 '만리장성'이 허무하리만큼 맥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는 격동의 시대, 역사는 나를 비웃듯 가장 잔인한 타이밍에 문을 열어주었다.

그사이 나의 삶은 평온한 호수 같았다. 효주 씨와의 5년 차 결혼 생활은 달콤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딸이 태어났고, 퇴근길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마도로스 시절의 고독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조선 산업은 '골든 타임'을 맞이해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도약하던 눈부신 시기였다.

하지만 평화로운 수면 아래서는 새로운 운명의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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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진 땅, 눈을 돌린 대륙

당시 국내 조선사 현대, 대우, 삼성 'Big 3'는 밀려드는 수주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새로운 독크(Dock)을 지으려 해도 수심 깊은 부지 확보, 환경 민원, 막대한 지가 상승이라는 삼중고에 가로막혔다. 이때 크레인과 특장차 분야의 강자였던 San 중공업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한국에서의 규제를 피해 대륙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의 국가의 목표를 들고 대련, 청도, 상해, 광주 등지에 개발구를 만들어 외자 기업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세금 면제는 물론, 부지와 유틸리티까지 국가가 보장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San 중공업은 상해 인근의 남통(南通) 개발구를 낙점하고, 그곳에 현대적 조선소 건설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운명의 장난, TF팀 특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독한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나는 단순히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San 중공업 조선소 건설 TF팀에 특채되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중국어는 환영받는 언어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을 붉은 장막 뒤의 공산 국가로만 여겼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조차 꺼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친 파도 위에서 승선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도, 나는 머지않아 중국이 거대한 개혁개방의 물결에 올라탈 것이라 직감했다.

좁은 선실 안에서 남들이 잠든 사이 사전을 뒤적이며 중국어 성조를 익혔던 시간들. 그때의 나는 그것이 미래를 향한 가장 확실한 투자가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남들보다 한발 앞서 예측하며 묵묵히 갈고닦았던 그 언어 실력이, 결국 나를 거대한 건설 현장의 주역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 것이다.

준비된 자에게 '운'은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다더니, 나의 중국어 공부는 그렇게 '운 좋은 예측'이 되어 내 인생의 새로운 항로를 열어주었다.

배를 타는 사람(Navigator)에서

배를 만드는 사람(Shipbuilder)으로,

이제는 더나 가 그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소를 건설하는 사람(Constructor)으로.

나의 커리어는 끊임없이 변모했지만, 그 종착지가 다시 '중국'이라는 사실에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링링과 헤어질 때 "중국과 수교만 되었어도..."라며 울먹이던 그 밤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조금만 더 버텼다면,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효주 씨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한 행복으로 가득 찼지만, 한구석에 밀어두었던 링링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남자는 첫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속설은 저주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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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험대에 서다

"경열 씨, 중국 파견이라니... 애들은 어쩌고?"

효주 씨의 걱정 어린 눈빛을 뒤로하고 나는 짐을 꾸렸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기술자로서의 야망, 그리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인 짐 가방이었다.

'링링도 이제는 좋은 사람 만나 잘 살고 있겠지?'

스스로에게 수백 번 되물었지만,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 내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를 향한 운명의 시험인가, 아니면 못다 한 인연의 마지막 부름인가.

1995년 가을, 나는 다시 황사가 불어오는 대륙의 품으로 향했다. 내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슬픔이 묻혀 있는 그곳, 상해와 남통을 향해 나의 세 번째 항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장강(長江)의 붉은 함성, 남통(南通)의 이방인

1995년 가을, 상해 홍차오 공항의 입국장을 나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9월인데도 대륙의 공기는 끈적하고 후덥지근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한중 수교 이후 3년, 한국 기업들의 대륙 진출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던 격동의 시기. 나는 다시 이 낯선 땅에 발을 디뎠다.

남통 개발구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가 지나갔다. 양쯔 강(장강)을 가로지르는 길은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물줄기는 누런 흙탕물을 머금은 채 도도하게 서해로 흘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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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 위에 세운 강철의 성

남통 조선소 부지 앞에 서자, 대륙을 관통해 온 장강의 위용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강폭만 무려 10km. 건너편 도시인 상해 보산(宝山) 지역은 형체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대륙의 미세한 황토 먼지와 강물에서 피어오른 습기가 뒤섞여, 강 건너 세상은 마치 신기루처럼 뿌연 회색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 가끔 안개가 걷힐 때나 저 멀리 고층 건물의 실루엣이 바늘 끝처럼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이 거대한 물줄기는 도도하게 흐르며 끊임없이 토사를 실어 날랐다. 그 때문에 강가는 늘 얕은 수심의 뻘밭이었다. 대형 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해서는 강 중앙의 깊은 수심까지 치고 나가야 했다. 우리는 황톳빛 파도를 뚫고 100m 길이의 잔교(Pier)를 강 심장을 향해 길게 뻗어 놓았다. 그 끝에 서면 발밑으로 소용돌이치는 장강의 거친 물살이 느껴졌고, 눈앞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이 펼쳐졌다.

"세상에, 이 뻘밭에 조선소를 짓다니..."

한국 조선 사상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해외 투자 프로젝트였다. 이미 토목공사는 90% 이상 진척되어 거대한 크레인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건축공사가 한창이었다. 신조선(새 배 건조)을 하기엔 아직 인력과 설계 기술의 숙련도가 필요했기에, 회사는 전략적으로 수리 조선부터 시작했다. 파나막스급(DWT70,000) 선박을 들어 올릴 수 있는 플로팅 독(Floating Dock) 2기가 장강의 물결 위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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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은 그야말로 '배들의 고속도로'였다. 수천, 수만 톤의 화물선들이 개미 떼처럼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지나가는 배들에게 손짓만 해도 일감이 굴러들어 올 것 같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지였다. 강을 따라 남경까지 이어진 조선소들이 즐비했지만, 아직 한국의 정밀한 기술력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 조선의 자부심을 심는 개척자였다.

어느 안개 자욱한 오후, 잔교 끝에서 장강을 가로지르는 낡은 벌크선 한 대를 멍하니 바라보던 중이었다. 육중한 엔진 소리가 고막을 울리자, 불현듯 10여 년 전 선박 기관사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장강의 이 뿌연 안개는 그날, 싱가포르 앞바다 말라카 해협의 그 눅눅한 공기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당시 나는 거대한 엔진룸의 열기와 사투를 벌이던 젊은 기관사였다. 해적들이 출몰하기로 악명 높은 그 좁은 수로를 통과할 때면, 우리 승조원들은 소방 호스를 손에 쥐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어둠 속에서 갈고리를 던져 배 위로 기어오르던 해적들의 살벌한 눈빛과 엔진 소음 속에서도 들리던 심장 박동 소리.

그 사선을 넘나드는 긴장감 속에서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곳이 바로 싱가포르였다.


장강의 물결 소리 사이로 링링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말라카 해협을 무사히 통과해 싱가포르 항구에 닻을 내리면, 그녀는 늘 그곳에 있었다. 중국계 싱가포르인 특유의 맑은 눈망울을 가진 링링.

우리는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사랑을 키웠다. 내가 기관사로서 배의 심장을 돌보는 동안, 그녀는 내 마음의 심장을 돌봐주었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거대한 벽이었다. "중국과 수교만 된다면"라며 기약 없는 약속만 남긴 채 헤어져야 했던 그 아픈 이별.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는, 그때 그토록 원망했던 그 '중국'의 심장부인 장강 한복판에 서 있다.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여행도 자유롭고 수교도 되었지만 정작 내 옆에는 링링이 아닌 다른 운명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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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장난, 혹은 항로의 변경

장강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들은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지만, 사람의 인생항로는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암초와 변수로 가득하다.

'링링, 너도 이 강물이 흘러가는 바다 너머 싱가포르 어디선가 나처럼 배들을 보고 있겠지?'

기관사 시절,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그녀와 나눴던 순수했던 꿈들이 장강의 황토색 물결 위로 파편처럼 흩어졌다. 이제 나는 배를 타는 사람이 아니라 조선소를 짓는 기술자로 이곳에 서 있지만, 내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말라카 해협의 그 뜨거웠던 열기와 링링의 향기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작업모를 눌러썼다. 그리움은 사치였다. 당장 눈앞에는 수리해야 할 거대한 파나막스급 선박이 도크 입고를 기다리며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나는 링링과의 추억을 장강의 깊은 바닥으로 잠시 밀어 넣고, 다시 강철의 현장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두 배'의 전쟁, 현지인 되기 프로젝트

숙소는 남통 시내의 오피스텔로 정해졌지만, 이름만 호텔일 뿐 한국의 낡은 모텔보다도 열악했다. 개발구 현장까지는 차로 40분. 회사 차가 없을 때는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 했는데, 여기서부터 중국 생활의 매운맛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 법에는 외국인에게 택시비를 메타 요금의 두 배를 받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라오와이(외국인)'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 지갑이 털리는 구조였다. 나는 악착같이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세련된 옷은 가방 깊숙이 처박아두고, 중국시장에서 산 허름한 인민복 스타일의 옷을 걸쳤다.

어느 날, 단호한 표정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완벽한 성조로 외쳤다. "카이파취, 开发区!(개발구로 가자!)"

딱 세 글자였다. 속으로 '이번엔 완벽했다'라고 쾌재를 부르는 찰나, 백미러로 나를 쓱 훑어본 기사가 씽긋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말했다. "니스 한궈런!(한국사람이지?)" 헛튼 수작 말고 택시요금 두배로 지불하라는 뜻이다. 아무리 발음을 굴려도 이방인의 냄새는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창밖의 중국 개발구의 낯선 풍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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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香菜) 향에 녹아든 대륙의 밤

음식은 또 다른 장벽이었다. 처음 마주한 샹차이(고수)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비누를 씹은 듯, 혹은 화장품을 들이켠 듯한 역겨움에 젓가락을 던질 뻔했다. 동료들은 "중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샹차이부터 이겨내야 한다"며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며칠 밤낮을 기름진 중국 요리와 사투를 벌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 오묘한 향신료의 맛이 고기 노린내를 잡아주고 뒷맛을 깔끔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고수가 빠진 중국 음식은 앙꼬 없는 찐빵처럼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장강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현장을 누비고, 퇴근 후 독한 바이주 한 잔에 고수가 듬뿍 들어간 민물고기 요리를 곁들이는 삶. 나는 그렇게 조금씩 남통의 붉은 흙먼지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 호텔 창밖으로 장강의 항해등을 바라볼 때면, 불현듯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이 강물을 따라가면 닿을 수 있을까. 15년 전의 인연 효주, 그리고 이 땅 어딘가에서 나처럼 장강의 밤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링링. 나의 대륙 항해는 이제 겨우 닻을 올렸을 뿐이었다.

스크린샷 2026-03-26 095105.png 샹차이와 바이쥬 중국직원들과 함께 회식자리 , 손을 번쩍 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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