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누구를 포기하실 건가요?
의사와 간호사가 내게 각서를 내밀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아내가 병원에 입원을 하는데, 무슨 각서를 쓰라고요?”
의사가 설명을 해 주었다. 아내는 심각한 임신중독증 상태에 있다고. 아이와 산모 둘 다 구하기 어려우면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누구를 포기하실 건가요?”
누군가를 포기하라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서둘러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대답을 빨리 해 주어야 했다.
“아이요.”
포기 각서에 내 이름을 썼다. 어떤 경우에도 보살피고 지켜주겠다던 ‘태아와의 약속’을 스스로 깼다. 죄책감을 느꼈다.
3월 개학 무렵부터 아내의 발이 붓기 시작했다. 산모들이 흔히 겪는 현상이라고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내는 개학 후 힘들고 바쁜 시간을 보냈다. 과로를 피할 수 없었다. 4월이 되자 가느다랗던 종아리가 통통해졌다. 나중에는 얼굴도 붓기 시작했다. 살을 누르면 눌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부가 탄력을 잃었다. 아내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일이 밀려 병원에 갈 시간을 내지 못했다. 아내는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고 말했다.
정기적인 건강 체크 과정에서 단백뇨가 검출되었다. 담당자가 곧바로 대학병원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중간고사 문제를 출제해야 한다고 아내가 고집을 부렸다. 억지로 끌고 병원에 갔다. 우리의 답답하고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의사가 화를 냈다.
“임신중독증이 산모와 태아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세요?”
임신중독증 확진과 동시에 입원을 결정하였다.
산모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출산을 서둘러야 했지만, 태아가 너무 작았다. 산모의 건강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태아가 자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산모도 아이도 한 달 동안 고통을 견뎌냈다. 아내의 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았다. 몸에 바늘 끝 같은 작은 틈만 있어도 진물이 줄줄 흘렀다.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마그네슘 주사를 수시로 맞았다. 주사액이 들어간 자리의 근육은 돌덩이처럼 단단해졌다. 나중에는 주사를 놓을 적당한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굳은 근육 속으로 주삿바늘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살이 찢어졌다.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하니 뱃속의 아이 역시 정상적인 속도로 자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의사는 출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했다. 유도분만을 하기로 했다.
진통 끝에 딸을 낳았다. 다행히 딸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1.8kg의 미숙아였지만 용감하게 세상으로 나왔다. 아이의 첫 세상 여행은 쉽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간호사의 안내로 인큐베이터실을 방문했다. 딸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작았다. 말로만 듣던 팔삭둥이였다. 아이가 몸을 꿈틀대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마음이 놓였다.
아이는 엄마 젖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살려는 의욕이 강했던 것일까? 엄마 젓 대신에 주는 우유를 열심히 먹었다. 우유를 잘 먹고 잘 자서 열흘 뒤에 집으로 데려왔다.
나중에 딸에게 말했다.
“딸, 너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포기 각서’를 썼는데, 늘 마음에 걸린다. 용서해 줄래?”
“아빠, 무슨 말을. 너무 당연한 것 아냐? 나라도 그랬을걸.”
딸은 나의 선택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느냐고 되물었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면서 하하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태아여서 부모가 자신을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을 전혀 몰랐을까?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의 잘못을 딸이 너그럽게 용서해 준 것이다.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딸은 지금 세상 구경을 못했을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 자식은 딸 한 명이다. 임신중독증 후유증을 염려하여 우리는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았다. 만약 딸이 없었다면 나와 아내의 삶의 색깔도 달라졌을 것이다. 딸이 우리 세상을 찾아옴으로써 나는 아빠가 되었다. 아내는 엄마가 되었다. 우리는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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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이전에 우리가 있다.
네가 없으면 나가 없고
네가 있기에 나도 있다.
‘짠맛’ 세상이 열리지 않으면
‘소금’도 없고 ‘소금을 아는 혀’도 없다.
‘봄’의 세계가 열리지 않으면
‘무지개’도 없고 ‘무지개를 보는 눈’도 없다.
내 세상에는 늘 나와 함께
‘너’도 있고 ‘저것’도 있다.
너는 내 세상이다.
쓰고 달고 시고 맵다.
나는 늘 너와 함께
어떤 세상 속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