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걍보리 Apr 04. 2023

너는 내 세상이다

17. 너는 네 인생을 산다.

  한밤중에 배가 몹시 아파 잠을 깼다. 병원에 다니면서 보름이 넘게 약을 먹고 있었지만 쉽게 낫지 않았다. 등도 많이 아파 바르게 누울 수도 없었다. 

  문득 어떤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선생님의 아버지는 등이 아프다고 하면서 늘 등을 주무르거나 두들겨 달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고통이 너무 심하여 병원에 갔다. 위암이었다. 치료가 너무 늦어 그 선생님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이별을 하였다.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가 떠오르자 이런저런 의심과 불안이 뒤따랐다.

  ‘나도 위암이 아닐까? 의사 선생님이 미처 암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옆에서는 아내가 곤히 자고 있었다. 유치원 병아리반인 네 살 먹은 딸은 옆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고 있었다. 어떤 자세로 누워도 통증을 막을 수 없었다. 식은땀을 흘렸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 앉았다. 마치 등을 둔탁한 나무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앉은 자세가 불편하여 다시 누웠다. 통증과 함께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암으로 죽은 친척들도 생각났다.

  ‘만약 암으로 확정된다면?’

  ‘운이 나빠 내가 일찍 죽는다면?’

  딸과 아내의 그늘진 얼굴과 처진 어깨가 상상되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눈시울을 타고 내린 눈물이 베개로 흘렀다. 나도 아내도 고단한 어린 시절을 지냈는데, 딸도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내가 일찍 죽는다면,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주겠다던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셈이었다. 눈물이 더 나왔다. 어둠 속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통증이 아닌 슬픔의 눈물이었다. 

  ‘나 없다고 설마 나락으로 갈까?’

  ‘어린아이들도 어른들의 상상 이상으로 잘 적응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온갖 생각이 오고 갔다.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려운 상황이 온다면 힘들겠지. 하지만 남은 가족들과 함께 잘 살아가지 않을까?’ 

  딸은 내가 곁에 있으면 ‘아빠가 있는 자신의 삶을’, 내가 곁에 없으면 ‘아빠가 없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경우이건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지고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그래, 아빠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자!’

  눈물을 멈추었다. 나의 삶과 딸의 삶을 과도하게 동일시한 것을 반성했다. 내 인생과 딸의 인생을 지나치게 엮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 순간 심하게 경직되었던 어깨 근육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너는 네 인생을 사는구나!’ 

    

  석가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았지만 정작 석가의 아버지 정반왕은 깨닫지 못했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석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를 부처가 아닌 아들로 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3인칭으로 불렀다. 얼마나 무례한 말인가? 예수는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혈연관계의 틀에서 보지 않았다. 어머니를 어머니 이전의 고유한 인격체로 본 것이다.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인격과 인격의 만남 형식으로 본 것이다. 

  성 빅토르의 휴(Hugh of Saint Victor)는 모든 나라를 타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완성된 사람이라고 말했다. 혈연(血緣)과 지연(地緣)을 자신과 분리할 때 비로소 미숙한 자기 중심성(自己中心性)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격은 자기 긍정(自己肯定)과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통하여 성장한다. 자기 긍정으로 자신을 정립한 뒤에는, 자기부정으로 기존의 자신을 떠나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마지막에는 재(再) 긍정을 통하여 성장을 완성해야 한다. 

  우리 가족이라는 혈연관계를 떠나야 가족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 낡은 굴레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성숙한 가족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기존의 산(山)이 산이 아님을 자각할 때, 그런 다음 그 산을 다시 산으로 받아들일 때, 산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열매는 뿌리에 의지해서 나고 자라지만 뿌리가 아니다. 대체로 혈연 학연 지연 등 다양한 연줄은 정체성의 토대가 되지만, 때가 되어도 거기를 떠나지 못하면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자유인이 안 되면 집착할 뿐, 참된 사랑을 할 수 없다. 

  자기가 소속된 가족이나 국가의 틀을 벗어날 때 인류애를 가질 수 있다. 인류애를 가진 사람은 인종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인류마저 초월한 사람은 편견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신이 소속된 종교의 틀에서 자유로울 때, 진정한 종교인이 될 수 있다.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종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혈연 지연 학연을 비롯한 온갖 연(緣)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영역에서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인격이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혈연 학연 지연은 물론이고 성(性)이나 능력을 비롯한 온갖 차이를 차별이나 배척의 근거로 삼지 않을 때 자유롭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  

   

‘우리’  안에 나도 있고 너도 있지만

나와 너는 분리되어야 한다.


친숙한 것을 떠나지 못하면 

미숙(未熟)한 채로 산다. 

    

어미 품에서만 살면

어린아이로 나이 든다.  

   

태어날 때는 힘들다.

정신적인 독립도 어렵다. 

부모와 자녀의 상호 조화는 더 어렵다. 

    

부모는 부모의 삶을 살고 

자녀는 자녀의 삶을 살 때

사랑 속에서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너는 내 세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