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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Apr 04. 2023

너는 내 세상이다

20. 알아차리면 선택할 수 있다.

  미처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표정도 어두웠다. 얼굴을 오른편으로 조금 기울인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입을 열었다. 

  “저는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겨우 일 년 전에요.”

  “두 사람의 관계가 일 년을 넘었다는 말이네요.”

  그녀의 말을 반복해 주고 보충해 주었다.

  “네, 제가 알기로는 한 삼 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아, 제법 오래되었네요.”

  말이 오가면서 긴장이 조금 풀리자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연구에 바빴어요. 그도 바쁜 것 같았어요. 그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연구에 바빠서 그런 줄 알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적었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억울한 건, 내가 먼저 교수가 되었고, 그 뒤로는 그를 교수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를 했다는 거예요. 내가 없었다면 오늘날 그는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어요.”

  정말 억울할 것 같았다. 

  “배신감에 힘드셨겠네요.”

  “견딜 수 없이 화가 났어요. 아, 사람이 어쩌면 그럴 수 있지. 모든 것을 다 파탄 내 버리고 싶었지요.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버리고 싶었어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요.”

  그녀는 분개하였다.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자녀들의 장래가 걱정되었어요. 대학에 다니는 딸과 직장 생활하는 아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요? 엄마로서 자식들에게 불편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어요. 자녀들이 결혼할 때 부모가 이혼했다고 하면 상대편이 좋아하겠어요? 그를 한 번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지요.”

  자녀의 장래를 염려하는 엄마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쉽지 않은 결심을 하셨네요. 남편은 어떤 태도를 보였나요?”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그가 도리어 제게 이혼을 해달라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듯 호흡이 거칠어졌다.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혼을 해달라니! 단단히 미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렇게 나올 수 있겠어요? 나야 그런다 치더라도, 자식의 장래도 전혀 생각해 주지 않는 그 인간, 그 이기적인 인간,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요.”

  미운 남편이 이혼을 원하면 이혼을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하셨나요?”

  그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혼을 거부했어요. 복수를 하고 싶었어요.”

  어느 영화감독 부인이 연상되었다. 복수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혼을 하자고 하면 안 해주고, 이혼을 하지 말자고 하면 해주는 것이다. 상대의 뜻을 꺾는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지요.”

  도대체 어떻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이혼을 거부한 뒤로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집을 나가버렸어요. 방을 얻어서 아주 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것이죠. ‘그 여자와 그냥 살터이니 알아서 하라.’는 배짱이었지요.”

  이혼을 해 주면 남편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니 복수가 아닌 것이고, 이혼을 안 해 주면 자기 멋대로 살아버리니 그것 역시 복수가 안 되었다. 아내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남편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부인에게는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화가 많이 나셨겠네요.”

  “그 뒤로 저는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둘이서 여전히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으면,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힘드시겠네요. 화도 많이 나고요.”

  그녀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떤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남편을 다시 돌아오게 할 묘책을 얻거나, 큰 위안이 될 만한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녀의 기대와 다르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화가 많이 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당연히 화가 나지요.”

  잠시 말을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화를 내실 건가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허리를 폈다.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화를 낼 거냐고 묻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을 것 같았다. 내가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남편과 그 여자는 둘이서 재미있게 사는데, 당신은 언제까지 고통스럽게 살 건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초점을 잃었다.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혼돈에 빠진 것 같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돌보는데, 당신은 누가 돌보지요?”   

  

  우리는 종종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누군가를 깊게 신뢰하고 크게 기대를 한 만큼, 신뢰와 기대가 무너졌을 때 상처도 크다. 상처가 크면 좌절과 분노 역시 크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이 없다고. 실망하기 싫으면 애초에 기대하지 말라고. 그러나 이 말은 비현실적인 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헌신할 때, 아무런 기대도 없이 헌신할 수 있을까?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고 건전하게 생활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고 유능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교육자는 교육자가 아니다. 상대방의 진정한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연인은 연인이 아니다. 부모로서의 기대가 누군가를 부모로 만들고, 교육자로서의 기대가 어떤 사람을 교육자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누군가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의 충족으로 이루어진다. 버스기사에게 거는 기대는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것이라는 기대이다. 고기를 파는 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썩은 고기를 팔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신호등을 건널 때는 모든 자동차가 신호를 지킬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래야 안심하고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그런 기대가 없다면 어떻게 자동차가 붐비는 도로를 건널 수 있겠는가? 

  문제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다. 그때 생기는 분노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 잘못된 행위는 있어도 잘못된 기분은 없다. 실연(失戀) 뒤에 쓰라린 아픔이 없을 수 없다.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고통스럽지 않다면 비정상이다. 울고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슬픔과 분노를 단숨에 넘어설 수 없다. 끓는 물이 식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정서가 안정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슬퍼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고통받고 있는 그 지점을 정확히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지점을 떠나야 한다. 기대를 온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체념(諦念)을 배워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괴로운 사건을 마음에서 지우려 하면 할수록, 그 일에 더 매이게 된다. 나쁜 경험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 기억에 더 시달리게 된다. 지나간 사건과 씨름하기를 멈춰야 한다. 

  고통의 늪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새로운 목표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새롭게 여는 것이다. 희망은 우리를 고통의 수렁에서 건져준다.    

  

**********     

사람은 욕망한다.

때로는 어떤 욕망에서 벗어나고 싶다.    

 

욕망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욕망의 노예로 산다.     


노예상태에서 탈출하고 싶다. 

    

욕망은 욕망으로 다스려야 한다.

선을 지향하면 불선의 충동은 사그라진다. 

    

나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그 욕망을 따를 것인지 다른 욕망을 지향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을 때에 욕망에 매이지 않게 된다. 

    

알아차리면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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