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은하수
대학교 1학년이던 78년 9월 어느 일요일.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추월산에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힘겹게 오르다가 시야가 열리는 곳에 이르면 쉬면서 노래를 불렀다.
“한줄기 바람이 부는 아침 동그란 얼굴이 가슴에 닿는다. 싱그런 미소 별 같은 눈빛 ...... ”
가을 공기는 투명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산행을 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산에 오를 때는 맑고 높은 가을하늘이었는데, 산꼭대기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산에 오르면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갑작스러운 비에 얇은 옷이 금방 젖었다.
우리는 서둘러 가까이에 있던 암자로 뛰어갔다. 보리암이었다. 마루에 발을 걸치고 앉아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해가 났다. 축축한 신발을 벗자 비에 젖은 채 구멍이 난 양말이 드러났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그녀는 웃으면 눈이 거의 감겼다. 잠시 뒤에 그녀가 공양주 보살로부터 실과 바늘을 빌려왔다. 나는 양말을 벗어주었다. 그녀는 비에 젖고 냄새가 나는 양말구멍을 꿰매 주었다.
비가 그치자 암자 우측에 있는 암벽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비에 젖은 암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래로는 담양호가 둥글고 작은 산 사이로 굽이굽이 곡선 띠를 만들었다. 하얀 안개구름이 계곡을 타고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함께 올라오는 솔바람 소리가 상쾌하였다. 하얀 구름마저 희미해지자 멀리 담양호 위로 무지개가 떴다.
오후 5시경에 산을 내려왔다. 지방도로여서 버스가 일찍 끊겼다. 걷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담양읍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포장되지 않은 삼십 리 길이었다. 초가을임에도 산속이어서 해가 일찍 떨어졌다. 빠른 속도로 땅거미가 밀려들었다. 산계곡과 도로 그 아래 호수까지 그늘이 짙어지다가 곧바로 어두워졌다.
걸음을 재촉했지만 어둠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여름 샌달을 신고 있었다. 빨리 걷기 힘들었다. 오르막길에서는 힘이 들어 걷는 속도가 더 느려졌다. 사람이 사는 집도 마을도 없는 지역을 빠져 나오기도 전에 주변이 캄캄해졌다. 걸음을 서둘렀다.
오르막길을 다 올랐을 때 터널이 나타났다. 입구가 칠흑이어서 들어서는 것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완전한 어둠에 빠졌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갖다 대보았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 한 점의 빛도 없었다.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짧은 순간, 서늘한 공포감이 지나갔다. 혼자였다면 더 무서웠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았다. 벽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더듬더듬 걸었다. 우리들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참을 걸어 출구를 나서자 비로소 새까만 출구가 보였다.
산과 나무 때문이었을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은 어두웠다. 내리막길로 들어섰지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어둠이 짙어 길의 형태도 어렴풋하였다. 한참을 걸은 뒤에야 먼 마을의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비포장 길을 견디지 못한 샌달 굽 한쪽이 떨어진 것이다. 억지로 붙여 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불편은 더해졌고 걸음은 느려졌다. 미루나무 가로수 한 칸을 지나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 몰랐다.
내리막길이 끝나고 비교적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 곳곳에는 낮에 내린 빗물이 작은 웅덩이들을 만들어 놓았다. 하늘은 맑은데 웅덩이 물에는 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이상해서 하늘을 보고 다시 웅덩이를 쳐다보았다. 물에 비친 것은 구름이 아니었다. 하늘의 별들이었다. 은하수였다.
바람도 없는데 나무에서 살랑대는 소리가 났다. 은하수에서 내려오는 소리일까? 밤이 깊어가자 마을의 먼 불빛도 하나둘 꺼져갔다. 별은 점점 더 많아져 넓은 하늘이 별들로 빼곡해졌다. 별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자갈에 부딪치는 우리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우리는 그 먼 밤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기억에 없다. 하늘 끝까지 하얗게 덮은 무수한 별들만 가슴에 가득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별빛으로 더 밝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터덕거리며 걷던 길도, 밤의 어둠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내 마음의 짙은 그림자도 오래 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었다. 그녀는 한 잔 술과 나를 남겨두고 자기 친구와 둘이서 명동의 사람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나는 가끔 그녀의 그림자를 보았지만, 결코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커피와 에이스 크래커, 중앙도서관에서의 시위, 긴 손가락, 오동도의 밤바다, 소나기와 무지개, 구멍 뚫린 양말, 은하수, 들국화와 억새꽃,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5.18의 함성과 총소리, 이 모든 것들이 환영처럼 오고 갔다. 그럴 때마다 상처가 덧났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깊은 흉터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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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떠나고 절망이 왔을 때
슬픔과 고통의 심연으로 미끄러진다.
무의미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파괴적인 충동에 사로잡힌다.
‘차라리 이 세상이 끝난다면.......’
사랑이 아닌 미움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폭력으로 구원될 수 있을까?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힘에 대한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