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손끝의 매듭
월요일. 알람 소리가 단잠에 잠긴 방 안의 고요를 날카롭게 갈랐다. 동트기 전의 깊은 푸르름 속, 세상은 아직 미명의 뒤척임 속에 있었지만, 나의 의식은 잠의 심연에서부터 느릿하게 현실의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채 가시지 않은 잠기운에 잠시 몸을 맡긴 채, 창밖을 응시했다. 뿌옇게 서리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실루엣은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선 침묵에 잠겨 있었다. 방 안을 감도는 새벽 공기는 서늘하게 살갗에 와 닿으며, 남아있는 잠의 흔적들을 조금씩 밀어냈다.
습관처럼 손을 뻗어 침대 옆 협탁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차갑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걸렸다. 어젯밤 잠들기 전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이어폰 줄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것이 얼마나 성가시게 얽혀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거의 매일 밤 반복되는 의식과도 같은 일이었다. 조심스레 줄을 풀어보려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엉킨 매듭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조여드는 감각만을 손끝으로 전해왔다. 그 순간, 오래된 메모처럼 머릿속 한구석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다시 고쳐 묶는 하루의 끈'.
그래, 어쩌면 지금 내 삶의 양상, 내 마음의 상태가 이 새벽의 엉킨 이어폰 줄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서부터 잘못 꼬이기 시작했는지, 그 시작점을 찾기 어렵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명확한 길을 알지 못하는 막막함. 엉킨 줄을 풀지 않고서는 음악을 들을 수 없듯, 뒤엉켜버린 삶의 매듭들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다시 설 수 없을 터였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의 이른 새벽이, 풀어야 할 숙제를 조용히 상기시키는 듯했다. 어쩌면 오늘의 채비는, 이 엉킨 줄을 푸는 작은 행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관성의 중력, 멈출 수 없었던 질주
그날 아침, 손에 감긴 이어폰 줄은 불편함을 넘어 흐트러진 마음의 결을 조용히 드러내는 표정 같았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 나를 짓누르고 잠식해왔던 보이지 않는 무게감, 삶의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무감한 관성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던 내 위태로운 마음 상태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돌아보면, 나는 참 오랫동안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오직 앞만 보고 내달렸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성공의 기준들, 타인이 그려놓은 이상적인 삶의 궤적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려 애썼다. 그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지거나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더 나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숨 가빴고, 몸에 쌓인 피로가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지만, 멈춰 선다는 선택은 좀처럼 손이 닿지 않는 결심이었다.
정지의 순간이 곧 모든 것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멈추는 순간,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마치 고장 난 자전거의 페달을 멈추지 않아야만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내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애쓰는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와 방향성마저 흐릿해져 버렸다. 처음 가졌던 의욕과 열정이라 믿었던 감정들은 시간의 풍파 속에서 마모되었고, 그 빈자리는 그저 익숙해진 일상의 관성만이 차지하고 있었다. 매주 세웠던 수많은 목표들은 달성되지 못한 채 다음 주로 이월되거나, 빛바랜 일정표 위 희미한 활자로만 남기 일쑤였다. 삶의 동력이 꺼져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궤도를 수정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마음에도 가뭄이 드나요?
내면의 활력은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사그라들었다. 에너지 저장고의 수위가 서서히 낮아지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더는 설렘이나 기대로 다가오지 않았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보다는 익숙한 무게감이 먼저 어깨를 눌렀고,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몸을 일으켰다.
기대보다는 의무가 앞서는 시작, 그것이 언제부턴가 나의 아침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이어가는 일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을 소모하는 노동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레 혼자 있는 시간을 갈망하게 되었고, 불가피한 만남 외에는 의식적으로 피하게 되었다.
한때 나를 순수하게 즐겁게 하고 몰입하게 했던 취미나 관심사들조차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예전에는 책 한 권을 읽거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듯한 희열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다채로운 색들이 모두 빛을 잃고, 마치 오래된 흑백 필름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웃음은 눈에 띄게 줄었고, 가슴 뛰는 설렘이나 기대감은 까마득한 옛 기억처럼 아득했다.
마음은 늘 짙은 안개가 낀 듯 뿌옇고, 명료한 사고를 하기가 어려웠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상념들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불필요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졌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이 치밀었다. 이것이 미디어나 책에서 접했던 무기력 혹은 번아웃, 축적된 피로의 증상일까 생각했다. 혹은 그저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내 마음의 변명일지도 모른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내 안의 무언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고장 났다는 사실이었다. 삶이라는 끈이 탄성을 잃고 고무줄처럼 축 늘어져 버린 상태. 어딘가는 끊어져 연결이 필요했고, 어딘가는 과도한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숨통을 조이는 듯한 답답함이 계속되었다.
비상벨이 울리다, 멈춤이라는 용기
그렇게 위태로운 줄타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일상에 작은 균열이 찾아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직장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이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쌓여가는 메일 알림, 연이어 잡힌 회의 준비와 산더미 같은 보고서 더미 속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찰나, 갑자기 극심한 현기증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책상에 엎드려 숨을 골랐지만, 식은땀이 흘렀고 심장은 제멋대로 요동쳤다. 다행히 증상은 이내 가라앉았지만, 그 순간의 경험은 나에게 강력한 경고로 다가왔다. 몸이 보내는 명백한 위험 신호였다.
그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엄습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동안 애써 무시해왔던 내면의 목소리,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몸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였다. 그것은 더 빨리 달리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거나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춰 서는 용기였다. 익숙한 궤도에서 잠시 벗어나, 엉망이 된 내 안의 끈들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풀어낼 시간. 그것이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심은 순간이었지만, 실행은 쉽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삶의 속도를 늦추고, 하던 일들을 잠시 멈추자 예상치 못한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죄책감,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초조함이 마음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까?', '세상은 계속 흘러가는데 나만 멈춰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엉킨 끈을 풀기 위해서는, 그 엉킨 상태 자체를 외면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두려웠지만, 피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이 나 자신을 위한 재정비의 첫걸음이었다.
나에게로 떠나는 아주 작은 여행
멈춤의 시간을 받아들이기로 한 후, 나는 의식적으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려 애썼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짧게나마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했다.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자니, 온갖 잡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 오늘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까지. 도무지 마음을 한곳에 붙잡아 두기 어려웠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매일 아침 꾸준히 이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쏟아지던 잡념의 양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 생각들에 휘둘리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는 연습이 가능해졌다. 마치 강물처럼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들을 알아차리고, '아, 지금 불안하구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구나' 하고 조용히 이름 붙여주었다. 들끓던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자, 그 아래 깊숙이 숨겨져 있던 진짜 감정들이 희미하게나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외면했던 외로움, 깊은 곳에 자리한 열등감, 사랑받고 싶었던 간절한 욕구까지.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나의 민낯을 마주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억눌려 있던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주말에는 일부러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대신 낡은 카메라 하나만 들고 집을 나섰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늘 무심히 지나치던 동네 골목길을 낯선 여행자처럼 탐색하기도 하고, 나무가 우거진 한적한 공원 벤치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기도 했다. 때로는 대중교통을 타고 조금 멀리 떨어진 낯선 동네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다. 걸으면서 나는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의 섬세한 빛깔, 담벼락 구석에서 꿋꿋하게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 파란 하늘 위를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의 모양, 그리고 저마다의 속도와 표정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거대한 세상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온전히 독립된 나 자신임을 느꼈다. 치열한 경쟁과 끊임없는 비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니,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박한 아름다움과 소중함이 곳곳에 숨 쉬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잊고 살았던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내면으로의 산책은 메말랐던 감성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주었고, 잃어버렸던 삶의 감각들을 조금씩 되찾게 해주었다.
서랍 속 낡은 스케치북, 잊었던 나를 만나다
그러던 어느 주말 오후, 방 안을 정리하다 책장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열어보니, 그 안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스케치북 몇 권과 색연필, 물감 등이 빛바랜 채 잠들어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학창 시절의 흔적이었다. 한때 그림에 잠시 마음을 빼앗겨 밤 가는 줄 모르고 몰두했던 시절이 있었다. 스케치북을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종이는 세월의 흔적으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그 위에 남겨진 서툰 그림들은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소환했다.
미숙하고 어설픈 솜씨였지만, 그 안에는 세상을 향한 나의 꾸밈없고 솔직한 시선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풍경화, 정물화, 상상화,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그린 캐리커처까지. 그림 하나하나에 당시의 설렘과 고민, 즐거움과 좌절의 파편들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세상은 온통 흥미롭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놀이터였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몰입의 순수한 기쁨을 만끽했다.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며 느꼈던 작은 성취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상이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과제도, 타인의 평가를 의식한 행위도 아니었다. 그저 내 안의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의 발현이었고, 세상과 소통하는 나만의 언어였다.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나는 잊고 있었던 내 안의 작은 불씨를 다시 발견했다. 치열한 경쟁 사회와 성과주의 문화 속에서, 더 중요하고 급해 보이는 일들에 밀려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깊숙이 묻어두었던 진짜 나의 모습. 세상을 분석하고 평가하며 재단하기 이전에, 그저 온전히 느끼고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어 했던 어린 날의 나.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더 효율적인 시간 관리 기술이나 더 높은 성취 목표가 아니라, 바로 이 스케치북 속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한번 나만의 색깔로 세상을 그려보는 시간.
그날 이후, 나는 망설임 끝에 다시 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근육이 굳어버린 듯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 예전의 감각을 영영 되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임을 되새겼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선을 긋고,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칠했다. 눈앞의 풍경, 주변의 사물, 때로는 떠오르는 감정들을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툴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연필이 종이에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 색연필의 색이 하얀 도화지 위에 번져나가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모습, 그 모든 과정에 온전히 집중하며 나는 조금씩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막혔던 숨통이 시원하게 트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잊고 있었던 창조적인 에너지가 다시 샘솟고, 내면의 감각들이 하나둘씩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피로와 무기력에 잠식되어 무채색으로만 보였던 세상이 서서히 다채로운 빛깔을 되찾기 시작했다. 작은 스케치북 하나가 나에게 예상치 못한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나면 되니까
물론, 엉킨 끈을 푸는 과정이 언제나 순탄하고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 고통스러운 자기 직면을 요구했고, 변화를 향한 여정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때로는 너무 복잡하고 단단하게 꼬여버린 문제 앞에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풀었다고 생각했던 매듭이 어느새 다시 엉켜버리는 실망스러운 경험을 반복하며 제자리를 맴도는 듯한 기분에 좌절하기도 했다. 익숙하고 편안했던 과거의 패턴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도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역시 안 되는 걸까',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예전과 분명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런 나약하고 흔들리는 나 자신조차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다독여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돼',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중요한 것은 매듭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완벽하게 풀렸는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매듭과 씨름하며 인내심을 배우고, 작은 실마리를 발견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패와 좌절의 경험조차도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 앞에서도 낙담하기보다,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기며 다음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볼 용기를 내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장이 아닐까. 매듭을 푸는 시간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자, 나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사적인 여정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감각을 조금씩 익혀갔다.
나만의 색실로 삶을 수놓다
시간이 흐르자, 내 삶의 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며 ‘다시 고쳐 묶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갔다. 풀린 매듭을 하나씩 살피고,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새롭게 엮어가는 감각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이것은 과거의 잘못되고 낡은 매듭 방식을 버리고, 현재의 나에게 더 잘 맞고 건강한 새로운 방식으로 삶의 요소들을 엮어가는 창조적인 과정이었다. 예전에는 오직 사회적인 성공과 물질적인 성취라는 단단하고 굵은 매듭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에만 매달렸다면, 이제는 그 외의 다양한 가치들을 함께 고려하기 시작했다.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기쁨과 감사,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깊이 있는 관계에서 오는 정서적 안정감,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는 부드럽고 유연한 매듭들도 내 삶의 중요한 일부로 함께 엮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매듭은 의도적으로 조금 느슨하게 묶어 숨 쉴 공간과 여유를 마련했고, 어떤 매듭은 서로 다른 색깔과 재질의 끈들을 연결하여 예상치 못한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마치 직물을 짜듯, 다양한 요소들을 균형 있게 배치하며 나만의 고유한 삶의 무늬를 조금씩 수놓아가는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모양이나 성공 모델을 맹목적으로 따라 할 필요가 없었다. 각자에게 맞는 삶의 속도와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고유한 리듬을 존중하며, 나의 이야기가 담긴 독창적인 패턴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다시 고쳐 묶기'였고, 가장 나다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새롭게 재정비된 삶의 패턴 속에서 나는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깊은 안정감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다른 월요일, 조금 다른 나
이제 나는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뜰 때, 예전과 같은 극심한 부담감이나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물론 여전히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나 버거운 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처리해야 할 업무는 여전히 쌓여있고,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긴장해야 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헝클어진 끈 앞에서 당황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차분히 그것을 풀어내고 다시 고쳐 묶을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지혜가 아주 조금이나마 생겨났다.
아침에 마주하는 복잡하게 엉킨 이어폰 줄 앞에서 더 이상 쉽게 짜증 내지 않는다. 대신 잠시 숨을 고르고,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차분히 살핀 뒤, 인내심을 가지고 실마리를 찾아 천천히 풀어간다. 때로는 그 과정 자체가 짧은 명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말끔하게 정리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할 때, 나는 작은 성취감과 함께 새로운 시간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오늘의 계획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마음속으로 조용한 다짐들을 되새긴다.
'다시 고쳐 묶는 하루의 끈'은 삶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는 마법 주문이나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작지만 더없이 중요한 태도이자 과정이다. 잠시 분주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독이고 정돈하며,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들을 되새기면서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로잡아가는 꾸준한 노력. 그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키우고,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지혜로운 나로 성장해 간다.
삶은 언제나, 다시 고쳐 묶는 과정
오늘 아침, 창문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진다. 잘 정리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선율처럼, 이제 내 삶의 끈들도 조금은 제자리를 찾아 조화롭게 흘러가는 듯하다. 물론 이 평온함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살아가다 보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듯, 또다시 예기치 못한 상황들로 인해 삶의 끈이 엉키고 풀어야 할 새로운 매듭들이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직장 생활의 무게나 관계의 어려움, 혹은 내면의 소진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나는 안다. 엉킨 끈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풀어내면 되고, 혹여 끊어진 끈이 있다면 지혜롭게 다시 이으면 된다는 것을. 삶이란 어쩌면 완벽하게 매듭지어진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엉키고 풀고 다시 묶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무늬를 완성해가는 기나긴 여정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앞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정성껏 매만지고 다시 엮어가려는 의지, 바로 그 '다시 고쳐 묶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그렇게 한 걸음씩, 하루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시간들은 더욱 단단하고 의미 있는 경험의 매듭들로 풍성하게 채워져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헝클어진 끈 앞에서 씨름하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을 묵묵히 풀어내려 애쓰는 모든 용기 있는 영혼들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고요한 응원을 보낸다. 우리의 매듭짓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빛나는 삶의 증거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