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품은 평온한 세계

샹보니에르와 17세기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

by 만텐
화면 캡처 2025-08-06 170147.jpg


음반명 : 프랑스의 클라브생 - 샹보니에르의 클라브생 음악 전곡

연주자 : 카렌 플린트

레이블 : 플렉트라 Plectra




프랑스 바로크 음악에 큰 애정을 가지고 그동안 많은 작품을 들어보았지만 루브르와 베르사이유를 거쳐간 음악가들은 너무 많고 그 면면은 다양하다. 어느날 샹보니에르의 클라브생 곡을 듣게 되었다. <고귀한 여성 La Rare>은 애잔하게 어둡고 마치 편지를 써내려가듯이 흐르는 프레이즈가 한 사람의 독백처럼 인상적인 곡이었다. 쓸쓸한 서정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화려한 기운을 잃지 않고 되려 명상적인, 한 음 한 음이 공기 속에 머물며 울림을 남기고, 장조와 단조 사이에서 빛과 음영을 내보이고, 말 보다 눈빛으로 지시하는 듯한 고상함이 먼저 다가오는 곡이다. 마치 듣는 이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대신해 드러내는 듯한 이 불가사의한 세련된 정신은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정수라 할 만큼 그 고전적 무드와 감성을 충만하게 지닌 곡이다.


쟈크 샹피옹 드 샹보니에르(Jacques Champion de Chambonnières, c.1601–1672)는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으며 궁정 악사로 활동했고, 이후 루이 14세 치세에는 ‘왕실 클라브생의 제1음악가’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17세기 프랑스 건반악기 연주의 전형, 클라브생 음악의 원류를 완성했다. 그의 아버지 또한 루이 13세 시대의 궁정 악사로 활약했으며 이러한 가계의 유산과 예술적 자질은 샹보니에르가 젊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왕실 음악의 중심에 서도록 만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q7H52hyHNY

샹보니에르 <고귀한 여성>, 루이즈 아카보 (클라브생)



17 세기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마랭 메르센(Marin Mersenne, 1588~1648)이 1636년에 출간한 『우주의 조화 Harmonie Universelle』는 음악이론과 음향학, 악기 제작, 연주법 등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방대한 저서로 바로크 시대 음악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샹보니에르 같은 당대 음악가에 대한 기록과 평가도 포함하고 있다. 메르센은 “샹보니에르가 연주하는 클라브생 소리를 들은 후에는 더 이상 다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라고 이 책에서 극찬한다. 그는 어떤 음악을 연주했길래 이런 칭송을 받았을까? 그가 정립한 프랑스 바로크 음악이란 어떤 것인가?


말 하듯이, 노래하듯이 흐르는 클라브생 음악

샹보니에르의 클라브생 음악은 기계적인 건반악기에서 ‘성악적인’ 선율과 숨결을 끌어냈다. 그의 음악이 ‘성악적인’ 선율과 숨결을 가진다고 말하는 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작곡·연주 스타일을 설명할 때 학계와 연주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샹보니에르의 선율선은 기계적으로 박자만 맞추는 구조가 아니라, 마치 사람이 노래하듯 자연스러운 호흡과 억양이 살아 있다. 그래서 프레이즈 사이에 미묘한 루바토와 여백이 있고 음악이 연극의 대사처럼 흐른다. 장식음의 역할도 중요하다. 프랑스 바로크의 장식음은 단순한 꾸밈이 아니라 성악에서의 전환·억양처럼 감정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샹보니에르의 악보는 이런 장식 기호가 풍부해 노래하듯 ‘말하는 건반’을 추구하면서 다이내믹보다는 미묘한 뉘앙스를 중시했다. 클라브생은 피아노처럼 강약 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리듬·장식·화성의 흐름으로 감정의 고저를 표현하는데 그 매끄러운 변화의 움직임이 감정의 음영을 빚어낸다. 프랑스의 클라브생 연주자 루이즈 아카보는 “샹보니에르의 악보는 매우 성악적 특성을 지녀 악기의 기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힘과 연약함을 부드럽게 표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음악에서 이런 무드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동시대의 비올 연주가 생뜨-콜롱브(Monsieur de Sainte-Colombe, c.1640~c.1700)의 음악을 다룬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을 보면 생뜨-콜롱브가 자연과 일상의 소리에서 음악적 영감을 찾는 모습이 나온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내는 신비로운 것이되 그 자연스러운 소리는 일상 속에 이미 있는 것이었다. <인간의 목소리 Les Voix humaines>는 그의 대표적인 곡 중 하나이다. 이 곡은 무반주 비올곡으로 비올이 어떻게 사람의 음성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비올을 ‘인간의 목소리’처럼 다루고자 했던 작곡가의 음악적 이상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비교해서 샹보니에르의 <신들의 대화 L'Entretien des Dieux>는 느릿하게 흘러가는 프레이즈가 기도의 독백을 매우 닮아있는데 때로는 절절하게 때로는 숙연하게 흐르는 선율이 백미이다. 두 작곡가 모두 ‘기계적 악기’가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 같은 자연스럽고 감성적인 표현을 음악에서 추구했다. 프랑스 음악의 서정성과 절제는 강렬한 감정보다는 내면적 서정을 중시하며 17세기 특유의 고전주의적 미학을 대표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zOd7XMIa50&t=3s

샹보니에르 <신들의 대화>, 로버트 힐(클라브생)


비극적 평정(tragic calm)과 니콜라 푸생

그의 <F장조의 사라방드>는 평화로운 빛과 은은한 품격이 감도는 곡으로, 단순한 선율 구조 안에 명상적 정서와 고요한 감정의 깊이를 담고 있다. 두 박자 사이의 정제된 쉼표는 마치 숨을 고르는 듯한 간결한 침묵으로 작용하며, 이는 프랑스식 바로크 음악에서 감정을 말보다 음악적 호흡으로 전달하는 정서적 깊이를 드러낸다. 이는 이탈리아의 즉흥성과 화려함을 중시한 바로크 건반음악과 명확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이탈리아 음악인들이 토카타(toccata), 리체르카레(ricercare) 같은 기교 중심의 형식에서 감정의 파고를 일으켰다면, 프랑스는 한 음, 한 쉼표, 한 장식 안에 명상적 깊이를 숨기곤 한다. 샹보니에르의 음악은 바로 이 전형을 확립했고 이는 음악사에서 프랑스 바로크를 구별하는 특징이 되었다. 비극적 감정 조차도 프랑스 바로크 음악 속에는 편지를 써내려가듯 미묘한 뉘앙스로 가득차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유학시절에 읽었던 니콜라 푸생에 대한 T. J. 클라크의 책이 떠올랐다.


화면 캡처 2025-08-07 142215.jpg 니콜라 푸생, <뱀에 물려죽은 남자가 있는 풍경>, 1648


클라크는 그의 저서 『죽음의 목격 The Sight of Death』에서 니콜라 푸생의 그림 2점을 통해 인간의 운명과 자연에 대해 성찰하는데, 그 결과과 샹보니에르가 확립한 프랑스 바로크 음악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클라크는 푸생의 회화에서 발견되는 질서와 비극을 프랑스 절대주의 미감(고전주의)과 운명론과 연결한다. <뱀에 물려죽은 남자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a Man Killed by a Snake>(1648)과 <평온한 풍경 Landscape with a Calm>(1650-1651)에서 자연은 인간의 감정을 대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비극적 운명은 이성적이고 질서정연한 자연 속에 고립된 듯이 배치된다. 클라크는 뱀에 물려 죽은 남자의 그림 속 비명 없는 죽음을 주목하는데 화면 속 인물들은 시체를 바라보면서도 절제된 몸짓만을 취하며, 거대한 자연은 무관심한 평정으로 이를 감싼다. 클라크는 이를 그림 속 드라마에서 정념이 거세된 장면으로 해석했다.


반면 <평온한 풍경>은 그 자체로 전율 없는 평온의 총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아무 일 없음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깊은 무게를 드러낸다. 클라크는 이 작품을 푸생의 '비극적 평정(tragic calm)'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고전적 질서와 감정의 억제, 시간의 정지와 인간 운명의 사색이 서로를 반사하며 이 장엄한 침묵은 마치 클라브생 음악의 느릿한 프레이즈처럼 들려온다. 뉘앙스로 가득찬 고요한 세계를 추구한 샹보니에르의 음악처럼 푸생의 회화는 바로크적 정념을 거세하고 고전적 균형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간극을 조용히 응시한다. 자연은 인간의 죽음에 무관심하다. 클라브생의 독백이 인간의 목소리로 기도하듯이, 푸생은 우리에게 무엇을 느끼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고요히 생각하게 한다.


Nicolas_Poussin_(French_-_Landscape_with_a_Calm_-_Google_Art_Project.jpg 니콜라 푸생, <<평온한 풍경, 1650-1651


'비극적 평정'이야 말로 푸생의 회화와 샹보니에르의 클라브생 음악, 즉 17세기 프랑스 바로크를 특징짓는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푸생의 두 풍경화는 표면적으로는 대조적이다. 전자는 예기치 못한 비극적 사건을, 후자는 완벽한 평정 상태를 그린다. 그러나 클라크가 지적했듯이 이 두 그림은 결국 하나의 주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세속적 질서와 비극이 공존하는 생에 대한 통찰, 나아가 질서와 균형 속에 내재된 죽음의 불가피성이다. 죽음조차 질서의 일부로 삼아버리는 이 침착한 화가의 시선은 샹보니에르의 클라브생 음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음악이 내면적 선율을 통해 감정의 심연을 암시하듯, 고전적인 구도의 평온한 그림 속에 죽음의 비극이 벌어진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무기력 아닐까? 17세기 프랑스인들의 사고 속에서 고요함은 무기력이 아니라 무자비한 자연질서에 대한 성찰인걸까? 그 안에서 예술은 인간이 감당해야 할 숙명과 대면한다. 클라크는 푸생의 그림이 단순한 고전주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가 비극과 마주할 때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제안이라고 말한다. 샹보니에르의 클라브생 작품 역시 절제된 슬픔과 형식미 속에 감정을 봉합한 채 내면의 떨림을 넌지시 전달한다. 위에서 언급한 곡 <신과의 대화>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푸생과 샹보니에르를 나란히 놓고 보면 이 시대 프랑스 예술의 정수가 질서 속의 비극, 혹은 침묵 속의 울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gV6hPr23ulA

작가의 이전글돈 조반니와 싸드적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