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풍이다.
작년과는 다르게 내인생은 장미빛이다.
체신행정 국가직에 합격하였고, 면접시험도 치렀다.
잠깐이지만, 취직도 했다.
퓨리나 사료 대리점이었는데, 발영날 때까지만 있기로 했다.
그곳에 근무하던 고등학교 동창생이 부산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있었지만, 시시콜콜 묻지 않았다.
친구는 성격이 좋아, 사장님과도 잘 지내왔던 것 같았다.
"사장님이 오빠 같다."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잘할 수 있을까.' 상고를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야.
사장님이 부천에 있는 본사로 경리교육도 보내주었다.
교육은 좋았지만, 장부기장은 생소했다.
차변, 대변 이라는 용어도 처음 들었다.
그리고 "김양"이 되었다.
그때는 결혼안하면 성에다 "양"을 붙이긴 했다.
퓨리나 사료는 젖소 농가주 분들이 많이 주문했다.
사장님은 주문 물량을 직접 배송하셨다.
가끔은 포대를 파는 경우도 있었는데, 어르신이 사는 경우에는 버스 터미널까지 들어주기도 했다.
우리 사무실은 터미널 근처였고, 1개의 사무실 2명의 사업주가 있었다.
넓지는 않았다. 사무용 책상과 의자, 소파, 인공수정 관련 용기, 캐비넷이 있었다.
인공수정을 위해 사장님이 출장나가면 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 전화를 받는 것은 어려웠다.
"언제부터 그랬나요."
"소리도 지르나요."
나의 통화는 한계가 있었는지, 사장님은 다시 확인하곤 했다.
가끔 아침이면, 농가주분들이 오셔서 다방커피를 사 주었다.
주로 "차차차 다방"으로 주문을 했다.
괜히 공짜로 먹는 커피는 불편했지만, 서먹한 분위기는 없어져서 좋았다.
김양은 눈치가 없었다.
사장님이 시키는 일만 했던 것 같다. 많이 답답했을 것 같다.
잠깐이 5개월이 넘었다.
언제 발영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 답답했고, 일도 잘 못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더이상 있을수가 없다.
11월이 되었다.
셋째 언니가 시집을 갔다.
김양도 대리점을 그만두었다.
사장님은 발영날때까지 있으라고 했지만, 몸둘바를 몰랐다.
얼마 후 "김양" 대신 "손양"이 왔다고 했다.
잠깐 들렀는데, "손양"은 커피를 직접 타주었다.
장부 기장도 꼼꼼히 잘하고 있었다.
다시 백조가 되었다.
그것도 잔잔한 호수 위에 우아한 백조다.
김양을 부르면 "누가" 대답을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