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톡방의 온도
졸업 이후, 단톡방은 점점 조용해졌다.
처음엔 과제와 일정, 근황이 오갔지만
이젠 ‘읽음’만 남고 대화는 사라졌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며
그 방의 온도는 서서히 식어갔다.
그 침묵엔 단순한 바쁨이 아니라,
관계의 피로가 묻어 있었다.
임원진은 아무 방향도 제시하지 않았다.
동기 모임의 목적도, 향후 운영 방침도 없이
그 방은 ‘연결’이 아닌 ‘방치’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도현이 메시지를 남겼다.
“졸업 후 처음 갖는 송년 모임,
조금 다르게 준비해 보면 어떨까요?
저명한 분을 모셔 인사이트를 나누고
그 후에 편하게 식사하는 시간으로요.”
그의 의도는 순수했다.
마치 홍익의 정신처럼,
배움을 나누고, MBA 졸업자답게 품격 있는 모임을 갖고 싶었다.
게다가 최근 한 포럼에서 만난 인사가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그는 그저, 좋은 소식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MBA라는 세계는 단순한 학위가 아니었다.
그곳엔 야망이 있었고, 경쟁이 있었으며,
누군가는 그 속에서 사람을 분석하고,
누군가는 사람을 이용했다.
책상 위에서는 협업을 외치지만,
현실에선 누구보다 빠르게 계산했다.
그 안엔 품격과 비열함이 공존했다.
민도현도 그 세계를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순수하게 만들고 싶었다.
지식의 사유 공간이 아닌,
진심이 오가는 연결의 자리를.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달랐다.
“원래 송년회는 편하게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자리 아닌가요?
그러니 관심 있는 분들은 따로 초빙해서 진행하시죠.”
그 말은 짧았지만,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의 댓글 아래에는 ‘좋아요’가 하나 달렸다.
그 하나는 평소 이해관계가 얽힌 동조 세력이었다.
다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 공감 그룹 — “그래, 송년회는 원래 편하게 즐겨야지.”
2. 이해 그룹 — “도현 말도 일리 있지. 그게 MBA 동문다운 모습 아닌가.”
3. 침묵 그룹 — “괜히 휘말리지 말자.”
민도현은 그 반응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건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야.
사람마다 관계를 해석하는 언어가 다르구나.’
그의 눈엔 ‘좋아요’ 하나도
사회적 신호, 즉 관계의 표식으로 보였다.
공감이 아니라, 세력의 맥박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민도현과 한기석은 형·동생처럼 지냈다.
밤새 과제를 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존중했다.
하지만 작은 의견 충돌이 반복되며
그 신뢰는 조금씩 금이 갔다.
결국 둘은 연락을 끊었고,
지금은 단톡방에서만 이름이 남아 있었다.
한기석은 자신이 현실적이라 믿었다.
“모임은 편해야지.
너무 거창하게 만들면 사람들 멀어진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러나 그 현실감 뒤에는
‘내가 주도하지 않은 변화는 불편하다’는
보이지 않는 권력감이 숨어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이번 송년회는 편하게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 제안은 단지 좋은 마음이었습니다.
모두 즐겁고 따뜻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의 문장은 품격 있었지만,
그 속엔 깊은 선 긋기가 있었다.
말로는 예의를 지켰지만,
말 너머엔 단단한 결별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단톡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고요는 평화가 아니라,
각자의 심리를 계산하는 냉정한 정적이었다.
누군가는 이모티콘을 남겼고,
누군가는 그조차 피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읽음 29’에서 멈췄다.
민도현은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MBA는 전략을 가르쳤지만,
관계의 전략은 알려주지 않는구나.”
그는 잠시 화면을 꺼두었다.
빛이 사라진 뒤에도,
그 방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가면은 관계를 지키기 위한 도구지만,
때로는 그 가면이 관계를 무너뜨린다.”
MBA는 인간의 이성을 증명하는 과정이지만,
결국 남는 건 감정의 결함이었다.
민도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공부가 아니라, 인간학의 실험실이었다.
이 작품은 실제 인물이나 단체와 무관한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이름, 상황, 대사는 창작에 기반하고 있으며,
어떠한 실존 인물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MBA 이후의 인간학’을 탐구하기 위한
사회 심리적 관찰 기록입니다.
#MBA #인간심리 #가면의법칙 #리더십 #관계의온도 #심리소설 #Camino #브런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