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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정 Sep 11. 2024

[6] 이사했지만, 그림자는 따라왔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쓴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요즘엔 원두보다 인생이 더 쓰다. 조용한 방 안에서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거실에 쌓인 짐들을 바라봤다. 이 집이 남긴 유산들. 마치 그들은 비어 있는 공간을 조롱하듯 거대한 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버리고, 정리하고, 다시 쌓이고.


이사를 해야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오래 고민했지만 결론은 뻔했다. 형편이 어려워진 건 한두 달의 일이 아니었다. 딸이 잠든 후, 우리는 밤마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다. 결국,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기로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이제 우리에게 과분했다. 월세와 생활비는 무거운 짐이었다. 짐을 줄여야 했다.


짐 정리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이사 준비는 마치, 쓸모없는 물건들과의 이별 연습 같았다. 오래된 책들, 딸의 옷, 주방 도구들. 쌓이고 쌓였던 것들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많았나?


아내는 주방에서 접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종교적인 의식처럼 보였다. 나 역시 구석에서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이란 이상하다. 나를 형성했던 과거의 조각들이지만, 이제는 그 안에 내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때 그 속에서 찾았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물건들이 빠져나간 공간은 나를 홀가분하게 해줄 줄 알았는데, 그 자리는 오히려 더 무겁고 커다란 빈 공간을 남겼다. 마치 물건들보다 기억이 더 집요하게 남아 있는 것처럼.

아내는 묵묵히 계속해서 짐을 정리했다. 딸도 자신의 장난감 몇 개를 골라 상자에 넣었다. 그 모습이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딸은 이미 놓아야 할 것과 가져가야 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삿날 아침, 햇살이 침대 위로 쏟아지며 짐들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짐을 들고 문을 나섰다. 그 순간, 무언가가 가볍게 나를 스쳐갔다. 오래된 추억? 아니면 물건들과 함께 버린 책임감? 그게 뭐였든, 나는 더 이상 그것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물건들을 줄여가면서, 나는 내 자신을 덜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사라는 건 그저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새로운 집은 작았다. 짐을 다 풀고 나니, 그 작은 공간이 금방 채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어딘가 부족했다. 물리적으로는 다 채웠지만, 그 안에 어떤 공허함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더 채우지 못한 건지, 아니면 내 마음의 잉여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사를 마치고 작은 방에 혼자 아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거창한 말은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웠다. 그냥 솔직히 말해보자. 앞으로 다시 큰 집으로 이사 갈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진짜로 큰돈을 벌 수 있을까?

한숨을 쉬며 생각해봤다. 왜 나는 그때 출판사를 그만두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그때의 나는 세상을 바꿀 것 같은 결심을 한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작은 방에 앉아 있는 꼴이라니. 그래,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뭐. 언젠간 다시 일어설지도 모르지." 스스로에게 던진 위로는 어느새 설득력이 희미해졌다.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질문 하나, "이 나이에 진짜 가능할까?"

벽면 구석에서 그림자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새 집까지 잘 따라왔구나.

그래, 나도 알아. 쉽지 않다는 거. 

어쩌겠어. 일단은 살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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