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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정 Sep 13. 2024

[7] 좁은 집에서 생각만 커진다

작은 집으로 이사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아침 6시, 눈을 떴다. 주변은 고요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니, 뭔가 이상했다. 이미 이사 온 지 한참 됐으니 낯설 일도 없을 텐데, 집이 더 작아진 것 같았다. 벽이 점점 다가오는 기분. 마치 벽들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와선 "어디 가긴 가나?"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갑고, 커피는 여전히 썼다. 딸은 아직 자고 있었고, 아내는 출근 준비로 바빴다. 나는 그저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그동안 머릿속을 짓누르던 생각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가스 요금, 전기세, 학원비. 굳이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알았다. 이번 달도 마이너스일 게 뻔했다. 인생이란 어차피 그런 거지, 내가 알기 전부터.


이 작은 집은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모든 게 곤두박질쳤다. 이제 좁은 공간 속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문제는, 좁은 집에서 해결책을 찾는 게 생각보다 더 답답하다는 거다. 딸이 숙제를 하는 동안 나는 구석에 처박혀 책을 읽으려 했지만, 머릿속엔 오로지 가계부만 떠올랐다. 빈칸은 계속 늘어갔고,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아내는 그 와중에도 자기 일을 묵묵히 해냈다. 내가 보기엔 나보다 훨씬 더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이 답답함을 모를 리 없겠지. 집 안에 있으면 벽들이 시공간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우리 삶이 오렌지라면, 이 집은 우리를 착즙기에 넣고 짜고 있는 게 틀림없다.


며칠 후, 더 이상 집에 갇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산책을 나갔다. 좁은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동네는 조용했고, 시간은 멈춘 듯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우리는 말없이 스쳐 지나갔다. 뭔가 말이라도 걸면, 우리 모두의 팍팍한 현실이 폭발할 것 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무언가의 끝자락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길가에 놓인 낡은 벤치에 앉아보니,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고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순간, 나를 덮친 건 끝없는 무력감이었다. 이 좁은 집, 쥐어 짜내는 듯한 삶,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 작은 공간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고, 그 현실은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다. 극적인 반전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뭘 놓쳤을까? 어디서 잘못됐을까? 아내는 나름대로 잘하고 있었고, 딸도 소리 없이 자기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점점 숨 막히는 기분이었다. 좁은 방, 쌓여가는 청구서,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벽들. 모든 게 나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래, 이 좁은 방은 내 선택의 결과와 실패를 그저 시각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그래, 이게 나의 현실이지." 솔직히 말해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이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그런데 왜 받아들이는 게 이토록 자존심 상하는 걸까? 기대치를 낮추는 건 결국 자존심을 낮추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존심을 낮추는 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어났다.


며칠 후, 아내와 마주 앉았다. 저녁을 먹고 난 후였다. 아내는 피곤해 보였지만, 그 눈빛에는 무언가 묘하게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물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밖에 없지." 그 대답이 너무 단순해서, 나는 더 이상 질문할 힘이 없었다.

아내는 이미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속에서 자기 나름의 답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뭔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 방법이 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불완전함 속에서 어떻게든 체념을 배우고 있었다. 완벽한 해결책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다. 더 나은 미래? 그런 건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좁은 방에 앉아 있다. 방은 작고, 빛은 희미하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더 이상 큰 기대는 없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내와 딸은 여전히 나와 함께 있고, 우리는 이 작은 집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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