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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Sep 21. 2022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삼십 대 후반을 진입하면서부터, 내가 느끼기에 정말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벌써 곧 10월이 다되어 가고, 아마 조금 더 지나면 "메리 크리스마스~!" 라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만 같다. 

 

 내가 다니는 회사도, 이제 곧 성과평가를 할 것이고, 각자의 역량과 성과에 따라 한 해 농사의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될 것이다. 올해는 농사 잘 지었냐고? 잘 모르겠다.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 "내가 가장 많은 일을 한 사원"이지 않을까...?


 회사에서는, 평가 철 즈음이 다가오면 보통 인력이 모자란 타 부서들의 Needs를 받아 사내 이직(?)을 할 수 있는 장터가 열린다. 우리 쪽에서는 '오픈'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회사들은 전배라든가 하는 용어도 있고,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인력이 부족한 부서로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제도가 있기 마련이다. 

 저번 주, 사업부 내 오픈 공고는 정말 곰곰이 따져봤던 것 같다. 향후 옮길만한 부서가 있는지 여부를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지금 즉시 옮길만한 곳도 있는지를 깊게 가늠해봤던 시간이었다. 결론은 제목과 같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이지만, 요 며칠은 꽤 진지하게 생각을 했던 시간들이었다.


 사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부서에 딱히 불만은 없다.

적당한 업무강도,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동료들과의 거리,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재택근무권 까지, 다른 직장인들이 들으면 부러워할 내 근무환경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은 주부로 있는 와이프가 많이 부러워한다. 속된 말로 '공무원'보다 낫다며 말이다..


 처음 이 회사에 입사한 후, 나는 언제나 '굴러온 돌'이었다. 많이도 옮겼다.

첫 프로젝트부터, 지금 몸담고 있는 프로젝트까지 내 이력서를 정리하다 보니 7번을 옮겼다. 11년 동안 내가 일한 기간을 따져보면 꽤 많은 전직이 있었던 것이었다. 주로 선배 동료분들께서 다른 곳으로 가셔서 나를 스카우트해 오거나, 내가 부서 내 다른 업무를 경험하기를 희망하며 옮기거나 두 가지가 주 요인이었다.

 

 내가 브런치에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가, "내가 선택하며 나의 진로를 결정하겠다."였다.

저 말을 쫓아, 내 행동들이 오롯이 저 말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을 계속해 나가고 있음을 느끼며, 언어와 생각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리 하여 행해진 잦은 프로젝트 이동은, 내겐 강한 조직 적응력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그 반대인 사람, 그리고 24시간 365일 계속 업무용 메신저를 바라봐야 하는 일, 납기가 짧아서 한방에 정확하게 개발을 해 내야 하는 일들, 이렇게 사람과 업무에 대한 많은 경험이 켜켜이 쌓여가며, 건강한 조직과 괜찮은 업무의 정의라는 것을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적어도 '걸러야 할 조직'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향후 기고할 수 있으면 꼭 하도록 하겠다.

 

 지금 몸담고 있는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존중해주고, 업무도 괜찮다고 여기고는 있지만, 

'내가 지금 이대로 머물러 있어도 되는가?'에 대한 생각이 드는 시기가 지금이다. 스스로 안주하고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그래서 다른 부서들이 하는 업무와, 그곳으로 옮겼을 때의 나의 개발자로서의 커리어를 함께 상상해 보며 며칠이나마 기분이 좋았던 것이었다.


"대용량의 트래픽을 처리해 보며, 시스템 및 애플리케이션 아키텍트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 못해도 좋습니다.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당신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개발자로서 이런 '성장'과 관련된 말들에 혹하였으나, 결국 나는 어제까지 마감인 오픈에 지원하지 않았다.


 가장 주된 이유로는,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잘하고 있는가? 의 대한 답을 스스로 하지 못하였다.

아직도 프런트 앤드 쪽을 개발한다고 하.. 기엔 너무나도 부끄럽다. List Looping부터, 화면 컴포넌트 개발까지, '손'에 익어서 자동으로 타이핑할 수 있는 건 없다. 이제 2년이 다되어가는데, 이런 것도 못하기에, '프런트 앤드'를 해봤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다. 결국, 코어 개발업무는 협력업체에게 맡기고, 나는 '관리'라는 명목 하에 뒷짐 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맡은 업무를, '개발자'로서 잘한 게 아니라, '관리자'로서 일정/이슈/기획 등을 챙기기 바빴을 뿐, 스스로 부딪치며 무너져본 적이 많이 없다. 이것이 오픈 지원 버튼을 누르지 않은 가장 결정적인 일이었다. 


 '그래, 현재 있는 곳에서, 개발까지 잘해야, 옮겨도 괜찮겠어'

이런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관리도 나의 주된 메인 롤이므로, 충실히 수행하며, 틈틈이 맡은 요건도 해내고, 토이 프로젝트로 갤러리 앱도 만들어보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이렇게 지나가지만, 다음 분기가 되어 또 오픈이 열리면, 그때 또다시 주저하겠지. 

그래도, 그때는 '나 그래도 쫌 이제 하는데, 옮겨도 괜찮지 않나?' 라며 이곳에서 이룰 수 있는 거 모두 이루고, 자신 있게 오픈 지원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해볼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그렇지만 '선택받는 삶'은 계속 살아보고 싶다.


가운데 이파리만 '선택'해서 파먹은 이유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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