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깃의 유령
그림자의 숲.
햇살조차 길을 잃는 곳.
거대한 나무들의 잎사귀가 겹겹이 하늘을 가려,
한낮에도 이곳은 깊은 밤처럼 어두웠습니다.
드물게 새어 들어온 빛줄기는,
푸른 이끼와 축축한 어둠 속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렸지요.
그렇게 숲의 낮은,
한 번도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채
기나긴 꿈의 포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기나긴 꿈을 지키는 파수꾼은 다름 아닌,
이 숲의 나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거친 껍질은 대지의 주름살처럼 깊고,
그 골마다 아득한 세월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땅 위로 뱀처럼 꿈틀거리며 뻗어 나간 뿌리들은
마치 대지 아래에서 자고 있는 거인의 손아귀처럼
세상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지요.
길을 잃은 이가 있다면,
그 뿌리들은 기꺼이 그의 발목을 붙잡아
이 숲의 일부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비단 땅 위의 생명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숲에서는 자유로워야 할 바람마저
자신의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 소리에는
구슬픈 가락이 섞여 있어,
잊힌 자의 한숨처럼 차가웠지요.
발밑을 뒤덮은 낙엽과 이끼는 소리를
먹고 자라는 카펫이 되어,
모든 발자국 소리를 기억 속으로 삼켜버렸습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흙이 낮은 신음처럼
눅눅한 소리를 낼 뿐이었지요.
때문에 숲을 걷는 이에게 들리는 소리는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뿐이었습니다.
그 고독한 소리는 때때로 영혼을 잠식해 들어와,
내가 정말로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숲을 떠도는 오래된 영혼 중
하나가 된 것인지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공기 중에는 축축한 흙의 냉기와 이끼의 비릿함,
이름 모를 꽃들의 서늘한 감미로움이
섞여 맴돌았습니다.
그 향기는 가슴 깊숙이 스며들어,
숨을 쉴 때마다 의식의 경계를 흐리는
몽롱한 현기증을 몰고 왔지요.
아마 그 현기증 때문이었을까요.
이곳의 시간은 짙은 안개처럼,
흐르는 법을 잊은 채 고여 있었습니다.
해와 달이라는 안내자를 잃어버린 시간은
끝내 길을 잃고 주저앉고 말았지요.
그렇게 멈춰버린 순간들은
그저 연못 바닥의 퇴적물처럼
겹겹이 쌓여갈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이 거대한 숲이 꾸는 길고 깊은 꿈일지도 모릅니다.
숲이 태초의 기억을 향해 숨을 들이쉴 때면
세상은 한 점으로 오그라들었고,
다시 아득한 미래를 향해 숨을 내쉴 때면
모든 것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흐려졌으니까요.
그 아득한 꿈 속에도,
살아가는 이들은 있었습니다.
거대한 나무들의 그림자를 자양분 삼아 뿌리내린,
작은 마을들이었지요.
숲의 일부를 떼어다 만든 집의 지붕에는,
나무와 같은 빛깔의 이끼가 융단처럼 깔려
하늘을 나는 새조차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마을로 향하는 길 또한
무수한 발걸음이 남긴 희미한 흔적일 뿐이라,
외부인은 쉽사리 그 문턱을 넘보지 못했지요.
이따금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유일한 생명의 증거였지만,
그마저도 이내 숲의 안갯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숲의 어둠을 잘라 만든
그림자 인형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크게 소리 내어 말하는 법이 없었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고요한 심연 그 자체였지요.
숲의 것을 취하고 숲의 비밀을 지키는 그들에게
이방인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때로 그들의 침묵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낯선 방문객의 마음을 꿰뚫는 듯했으니까요.
그들의 침묵이
그토록 날카로운 경계심을 품은 이유는,
어쩌면 외부인들만이 듣는
숲의 속삭임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숲에 발을 들인 이방인은
누구나 기묘한 착각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속했던 존재처럼,
낯선 곳에 온 것이 아니라
마침내 '돌아와 버렸다'는
희한한 생각에 빠지는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림자의 숲은 그저
해가 들지 않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살아 숨 쉬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비밀이었고,
그 문턱을 넘는 순간 누구든
비밀의 일부가 되어야만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빛을 잃는다는 것은
익숙한 세상을 잃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세계의 눈을 뜨게 된다는 의미였으니까요.
모든 소리가 침묵으로,
모든 움직임이 정적으로,
그리고 마침내 숨결마저 그림자로 변하는 곳.
그곳은 바로, 그림자의 숲이었습니다.
이 살아 있는 깊은 숲 속으로,
알루스와 루칸은 말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곧 알아차렸습니다.
이 숲이 단순히 어둡고 깊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열병이 마치 안개처럼
숲 전체를 잠식하고 있었지요.
바람은 썩은 이끼의 냄새와 함께
불길한 속삭임을 실어 나르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조차도
마치 숲이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렸습니다.
창문 틈새마다 지켜보는 눈동자들.
그 시선에는 적의보다 더 서늘한 것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감추려는 차가운 계산.
눈빛 하나가 오래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듯한 섬뜩함.
길모퉁이에 세워진 허수아비조차
누군가를 감시하는 듯했고,
닫힌 문틈마다 조용히 그림자가 지나갔습니다.
저 집 창가에 드리운 그림자는 누구일까.
방금 등 뒤에서 바스락거린 것은 낙엽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발소리인가.
모든 소리, 모든 그림자,
모든 냄새가 날카롭게 느껴졌습니다.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의 등뿐이었지만,
이 지독한 열병은 그 마지막 신뢰마저
갉아먹으려 들고 있었습니다.
숲 전체가 거대한 의심의 폐를 가지고
숨 쉬는 듯했지요—
낮게, 천천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는 호흡으로.
"모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루칸이 낮게 읊조렸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이내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마치 숲이 스스로 중얼거린 말처럼 들렸습니다.
지켜보는 시선들.
그것은 마을의 그림자 그 자체였고,
나뭇가지 사이를 떠도는 끈적한 안개였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들이 엮어낸
거미줄이었습니다.
알루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빛이 닿지 않는 골목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 같은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알루스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지 않는 그물에
발이 걸리는 듯한 기묘한 저항감마저 느꼈습니다.
숲은 그들의 등 뒤에서 조용히 문을 닫았습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나무들의 뿌리는
발목을 노리는 덫이었고,
머리 위에서 뒤엉킨 나뭇가지들은
하늘을 가두는 감옥의 창살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지나온 길은
어느새인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이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나무와 집, 안개와 그림자가 한데 뒤엉켜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함정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숲은 둘의 발자국을 지우며,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그들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들을 기다려왔다는 듯—
고요하고, 섬뜩하게 다정한 품으로.
이 의심의 숲에도 루칸에게는
단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보원 '서리'.
그들은 서리를 만나기 위해 숲 가장 깊은 곳,
낡은 풍차의 지하로 향했지요.
그곳은 서리의 존재를 닮아 있었습니다.
축축한 돌벽이 세상의 모든 시선을 막아주었고,
낮은 신음 같은 바람 소리가 모든 대화를 삼켜주었으니까요.
단 하나의 촛불 아래,
수많은 그림자들이 비밀처럼 벽을 기어 다니는 방.
그 모든 비밀의 주인인 양,
서리가 흔들림 없는 그림자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것은 재회의 어색함이 아닌,
서로가 숲의 질병에
얼마나 잠식되었는지를 가늠하는
날카로운 탐색의 시간이었습니다.
서리의 눈은 루칸의 지친 기색과,
그의 어깨에 떨어진 낙엽과,
그의 곁에 선 낯선 동행자를 남김없이 훑었습니다.
루칸은 서리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이 숲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몸을 돌려,
낡은 주전자에서 투박한 잔 두 개에 차를 따랐습니다.
김이 오르는 찻잔에서는
씁쓸한 약초 냄새가 났습니다.
그녀는 잔 하나를 루칸에게,
나머지 하나는 그의 동행자에게
무심히 밀어주었습니다.
'살아있었군.' '당신도.'라는 말이 오간 것이나
다름없는 그들만의 의식이었지요.
탐색이 끝나자 서리가 턱짓으로 탁자를 가리켰습니다.
루칸은 말없이 낡은 지도를 펼쳐,
촛불의 희미한 빛이 닿는 곳에 내려놓았습니다.
오래된 시계 톱니가 삐걱이는 소리만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손가락이 지도 위의 한 점을 가리켰습니다.
“카르의 스파이는 이 셋 중 하나야.
펜델이라는 주민의 잃어버렸던 조카로 위장하면,
정체를 밝혀낼 수..”
서리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루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깃털 하나가,
루칸이 추적을 기록한 종이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모든 계획을 뒤엎을 변수,
네 추적을 전부 쓰레기로 만들 이름이 나타났어.
바로 ‘붉은 깃의 유령’이.”
지하의 공기는 서리의 말 한마디에 얼어붙은 듯,
낡은 톱니가 삐걱이는 소리마저 순간 멎는 듯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이 유령, 편 가르는 짓 따윈 안 해.
카르 놈들이든 우릴 도와주던 주민이든,
그냥 닥치는 대로 지워버려.
흔적도, 비명도 없이.”
“네가 쫓는 그 스파이는 그냥 ‘증상’ 일 뿐이야.
겉으로 드러난 종기 같은 거지.
이 유령이야말로 숲 전체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질병’ 그 자체라고.
썩은 가지 몇 개 잘라낸다고 나무가 살아?
어림도 없지. 병의 뿌리를 뽑아내야 해.”
“저놈은 지금 카르와 우리의 계획을
전부 비웃으면서,
이 숲 전체를 자기 놀이터로 만들고 있어.
이 혼돈부터 먼저 잡지 않으면,
우리 모두 저 유령의 장단에 맞춰 춤추다
사라지는 다음 꼭두각시가 될 뿐이야.”
지하실의 어둠 속에서 루칸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서리는 그의 눈을 정확히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하나야.
놈의 뒤를 밟고, 놈의 수를 읽고,
기어코 그놈을 잡는 것.
다른 모든 건 집어치워.
‘붉은 깃의 유령’이 최우선이야.”
그녀는 깃털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루칸. 이건 숲의 좀도둑을 잡는 차원을 넘어섰어.
이 유령이 움직이는 이유,
그게 바로 이 숲의 진짜 비밀이야.
어쩌면 우리가 그걸 알아냈을 때,
이 지긋지긋한 숲의 판 자체를
새로 짜게 될지도 모르지.”
그날밤,
둘은 서리가 알려준 단서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령이 목격된 곳,
‘까마귀 둥지 아래 버려진 우물’을 향해.
바람이 늑대의 이빨처럼 울부짖었고,
나무들은 무언의 군중처럼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밑의 낙엽이 밟힐 때마다,
마치 누군가 등 뒤에서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굶주린듯한 어둠뿐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루칸이 나뭇가지에 사이로 몸을 숨기며 말했습니다.
“우린 분명 유령을 쫓고 있는데,
어쩐지 유령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기분입니다.”
“유령은 언제나 그림자 쪽에 서 있으니.”
알루스가 어둠을 응시하며 대답했습니다.
“빛이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는 방향을 바꾸는 법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짧고 건조한 소리.
둘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홱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숲은 다시 뚜껑이 닫힌 무덤 속 같은
정적에 잠겼습니다.
바람 소리마저 잠든 듯
나뭇잎 스치는 소리 하나 없었고,
흙과 나무를 오가는 어둠의 차가운 맥박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방금 전의 소리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혹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해야 하는
환청처럼 느껴졌습니다.
루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미세한 달빛에,
그들의 그림자가 바위 위에 비쳤습니다.
그런데—
둘은 동시에 숨을 멈췄습니다.
그들은 분명 가만히 서있었지만,
세 번째 그림자만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 지금 저거...”
루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눈을 깜빡이며 다시 봐도,
바위 위에는
그들의 그림자 두 개뿐이었습니다.
“... 봤습니까?”
“봤소.”
둘은 미친 듯이 주위를 살폈지만,
그들을 둘러싼 것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둠이 웃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웃음은 오래된 나무 사이를 타고 번져,
바람과 함께 숲 전체로 흘러갔습니다.
한참 후, 루칸이 낮게 말했습니다.
“유령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있군요.”
그 순간, 그들의 뒤편 어딘가에서
어둠이 숨을 내쉬었습니다.
바람이 아닌,
살아 있는 무언가의 호흡처럼.
(다음 편 '바람이 멈추는 곳'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