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초대
깊은 밤의 파편들이 부스러지는 듯한 짧은 소리. 곧이어,
루칸과 알루스, 그들의 등 뒤에서
숲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미세한 흔적마저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짝 따라붙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목덜미의 솜털을 적시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은,
얼음장 같은 '침묵'.
마치 이 거대한 숲의 허기진 입이
그들의 목에 얼어붙은 얼굴을 바짝 대고,
사무치도록 선명한 어둠의 날숨을
훅- 하고 불어넣은 것만 같았지요.
알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새하얗게 움켜쥐었습니다.
루칸 또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듯한
자욱한 어둠 속을 뚫어지게 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숲은
다시 무덤의 뚜껑을 닫은 듯
기나긴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지요.
방금 전의 그 섬뜩한 기척은
마치 숲이 꾸던 짧은 악몽이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텅 빈 고요 속에 남은 것은 단 하나,
주인을 잃고 제멋대로 날뛰는 둘의 심장 소리뿐.
비에 젖은 흙처럼 무겁게 깔린
루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습니다.
늪에 빠진 듯 질척하고
무거운 한 걸음, 또 한 걸음.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그들의 몸을 옭아매어,
깊은 심연 속으로
조용히 끌어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지요.
기이하게도 길은 오직 그들의
앞쪽으로만 열려 있었습니다.
휘어지고 뒤틀린 나뭇가지들은
그들의 뺨을 스치며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는 척하다가,
어느새 등 뒤에 걸어온 흔적을 지워버리는
감옥의 창살로 돌변해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려 도착한
길의 끝.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까마귀 둥지 아래 우물'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서리의 경고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축축하고 불길한 기운이 고여 있는 장소였습니다.
하늘을 향해 망가진 손가락을
흉하게 비틀며 뻗어 올린 거대한 고목 하나.
그 검게 뒤엉킨 가지들이 쏟아내는 짙은 그림자,
바로 그 아래...
그들이 찾던 '버려진 우물'이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둘은 눅눅한 이끼로
뒤덮인 우물의 테두리에 섰습니다.
바닥 깊은 곳에서 날아오르는
축축한 흙내와 비릿한 이끼 냄새,
그리고 뼈를 찌르는 듯한 냉기가 뒤섞여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몰고 왔습니다.
마른 침을 삼키며 들여다본 우물 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침묵의 호수 그 자체였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밤을 녹여 붓기라도 한 듯,
진한 잉크처럼 끈적하고 짙은 칠흑의 어둠.
그들은 저 검은 호수 속으로 육신은 물론
영혼마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미끄러운 돌 테두리를
부서져라 움켜쥐어야만 했습니다.
머리 위를 덮고 있던
'까마귀 둥지'의 뒤엉킨 가지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치워지듯
스르르 갈라지더니,
그 틈으로 창백한 달빛 한 줄기가 비수처럼
우물 바닥으로 꽂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먹물처럼 일렁이던 수면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지며,
매끈하게 닦아놓은 거울로 변해버렸지요.
그 차가운 거울 위로,
둘의 창백하고 지친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또렷하던지,
자신들의 흔들리는 눈동자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공포의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습니다.
순간, 루칸의 심장이 발밑으로
툭 떨어져 내렸습니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수면 위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천천히 번져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면 위 그들의 선명한 두 그림자 사이로,
길게 드리워진 '세 번째 그림자'가.
그것은 지금.. 그들의 등 뒤에,
둘의 어깨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고,
함께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칸의 몸이 차가운 경련을 일으키며 굳어버렸습니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공포에 짓눌려 얼어붙고 말았지요.
수면 위, 그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습니다.
마치 오랜 벗을 어루만지려는 듯,
기묘하게 길고 앙상한 그림자의 손가락이
물결을 가르며 루칸을 향해 스르르 다가왔습니다.
그림자의 손끝이 물에 비친
루칸의 얼굴에 닿으려는 찰나,
입 없는 그림자가 속삭였습니다.
루칸의 비명이 목구멍을 뚫고 나오려는 순간,
알루스가 다급하게 뒤를 획 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급박한 움직임이
도리어 달빛을 가로막고 말았습니다.
찰나의 순간, 우물을 비추던 무대의 조명이 꺼지듯
검은 거울은 다시 빛을 잃고
깊은 심연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주한 등 뒤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굶주린 입을 쩍 벌린
숲의 시커먼 어둠만이,
둘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
아주 짧고, 소름 끼치도록 건조한 소리.
둘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가 난 곳으로 홱 돌아갔습니다.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방금 전까지
그들이 등을 대고 서 있던 우물의 테두리.
그 축축하고 시커먼 이끼 위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방금 맺힌 아침 이슬처럼
붉은, 선명한 핏빛 깃털 하나.
깃털 끝에는 '바싹 말라비틀어진 나무뿌리' 조각이
기괴한 장신구처럼 매달려 달그락거리고 있었지요.
순간, 둘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붉은 깃의 유령'.
그자는 방금, 목덜미에 차가운 숨결이 닿을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다가와,
이 섬뜩한 '초대장'만 남기고
안개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온 낡은 풍차의 지하는,
비밀을 삼킨 무덤처럼 차갑고 고요했습니다.
서리는 그들이 가져온
'뒤틀린 뿌리' 조각을 들어 올려,
흔들리는 촛불 빛에 비춰보았습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는 촛불의 빛마저 빨아들이는
그윽함을 담고 있었지요.
"숲의 가장 오래된 뿌리들이,
마치 대지의 미로처럼 흉측하게 뒤엉킨 곳이지.
땅이 태양을 잊어버린 지 오래된 곳.
그곳에 흐르는 건 썩은 물과 진흙,
그리고 죽은 시간뿐이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번뜩이는 눈동자가
루칸과 알루스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 내렸습니다.
그 시선은 마치 영혼의 무게를 재는
저울처럼 날카로웠습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미로에선...
단순히 길만 잃는 게 아니거든."
그녀는 식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촛불이 꺼질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그 썩은 미로 속을 헤매다 보면...
함께 간 '동료'를 영영 잃게 되는 경우도 있지.
혹은... 내가 믿었던 그 동료가,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누구'인지 알게 되거나."
바로 그때,
서리의 눈빛이 갑자기 번뜩였습니다.
그녀는 짧고 날카로운 경고음을 내뱉는 동시에,
재빨리 찻잔을 내려놓고 촛불을
입으로 불어 꺼트렸습니다.
순식간에 지하실은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겼고,
문밖에서는 희미한 '발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편 '산이 내쉰 거대한 숨 끝에서'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