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깃발 아래
1946년 초. 완도.
새해가 밝았지만, 마을엔 설렘 대신 침묵이 내려앉았다.
건준은 이미 와해되었고, 미군정은 ‘좌익 활동자 색출’이라는 명목 아래 무차별 검거에 나섰다.
좌익 계열은 지하로 잠수했고, 우익은 경찰서와 읍사무소를 장악했다.
‘봉강회’ 역시 그들의 감시망에 들고 있었다.
“두석 형, 곧 들이닥칠지도 모릅니다.”
기홍이 급히 들어섰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순형이… 그자가 정보를 흘렸어요. 야학 자료를 수거하라 명령 내려졌습니다.”
두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의 서류뭉치를 쓸어 담았다.
아이들이 썼던 글자 연습장, 역사 강습의 판서록, 민족 용어표…
모두 불온문서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순간, 밤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석의 손에 들린 책들을 보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또… 누가 끌려가는 거예요?”
“아직은 아무도.”
“당신이 그러잖았어요. 이제는 싸우는 시대가 아니라고. 아이들 곁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밤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왜 자꾸 이별 준비 같은 짓을 해요…? 전 애들이랑 이렇게,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기다리면서 또 살고 싶지 않아요.”
두석은 말없이 밤례의 손을 잡았다.
“지킬 거요. 이번엔 꼭 지켜낼 겁니다.”
밤례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그 말, 믿을게요. 그 대신...
어디로든 떠나지 말아요. 당신답지 않으니까.”
며칠 뒤.
봉강회의 핵심 동지 중 둘이 체포되었다.
그들에겐 ‘반미·반국가 선동 혐의’가 붙었다.
한 명은 취조 중 실신했고, 다른 한 명은 혐의를 인정하는 자백서를 썼다.
두석은 광주에서 돌아오며 그 소식을 접했다.
뺨에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이제는… 시간 문제군.’
그날 밤, 두석은 오래 묵혀둔 ‘관해당(觀海堂) 일기’를 펼쳤다.
부친 의회가 생전에 쓴 노트였다.
그 속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진실은 바람 속에 쓰러지지 않으나, 진실을 증언한 자는 먼저 쓰러진다.
하지만 그 쓰러짐조차, 시대의 증언이다.”
두석은 연필을 들어 한 줄을 더 적었다.
“우리는 바람 속의 등불이다. 꺼지지 않기 위해, 불꽃은 서로를 찾아야 한다.”
동이 틀 무렵.
두석은 학교 마당에 홀로 섰다.
해는 떠오르고 있었지만, 마음속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어느 때보다 짙고 무거운, 붉은 서녘 같은 어둠.
그리고 그날, 그는 결심했다.
봉강회의 문을 다시 잠그기로.
모든 서류는 태워버리고, 조직원은 해산시키며, 아이들과의 글공부만 남기기로.
‘저항은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하여 후일 다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말
해방이 주었던 감격은 길지 않았습니다.
1946년, 좌우 대립이 본격화되며 미군정은 좌익 계열의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했고, 친일파 출신 관리들은 그 틈을 타 권력을 되찾았습니다.
그 속에서 강두석은 저항을 택합니다.
검은 깃발 아래, 진짜 적은 때로는 이념보다 권력 그 자체였음을 깨달으며.
이제 그는, 무너진 시대 속에서 희망이 운명이 되는 선택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