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섬, 불꽃이 되다
1948년 5월 10일,
한반도의 절반에서만 선거가 치러졌다.
제주는 투표함 앞에 서지 않았다.
제주도민의 90%가 반대했고,
남로당은 선거 방해 투쟁을 이끌었다.
“우리는 통일 없는 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투표소 대신
오름과 숲으로 몸을 숨겼다.
두석은 그 소식을 듣고 중얼거렸다.
“섬이 아니라, 거대한 분노의 산맥이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그날 밤, 수십 명이 죽었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빨갱이 소탕이다!”
이후 미군정은 ‘무장대 토벌 작전’을 명령했고,
제주 전역에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돌아온 난민도, 피난민도 가리지 않았다.
불을 지르고, 마을을 포위하고,
아이까지 끌어내어 총을 겨누었다.
평양과 함흥에서 내려온 그들은
고향을 잃은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공산주의자에게 가족을 잃었고,
신념 대신 증오를 품은 자들이었다.
“이 섬엔 죄 없는 빨갱이가 없습니다.”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어른도, 아이도
모두 ‘의심스러운 자’였다.
삼양동, 대정읍, 조천, 한림…
마을마다
초가가 불탔고,
죽창이 들어섰고,
삽으로 판 구덩이에
사람이 묻혔다.
두석은 목포에서 소식을 전해 들었다.
희미한 흑백사진 속,
한 여인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게… 독립의 대가란 말인가.”
1948년 가을까지
섬의 70% 이상이
‘해방구’ 또는 ‘통제구역’으로 분류되었고,
국가는 제주를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양민과 무장대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기도하는 자도, 공부하는 자도
‘불순분자’로 지목되면 사라졌다.
#작가의 말
제주는 한반도의 축소판이었다.
분단은 단지 국경을 그은 것이 아니라,
의심과 죽음을 제도화한 시작이었다.
불참으로 저항한 섬은
총과 불로 응징당했다.
저항은 ‘폭동’이 되었고,
국가는 ‘정의로운 진압’을 외쳤다.
그러나
그 숯검정 마을과
울음소리 가득한 산자락에
누가 옳았고, 누가 죽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