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46

갈라선 길

by 강순흠


완도의 겨울 바람은 매섭고도 비릿했다.
한때 같은 꿈을 꾸던 두 사람이 마침내 마주섰다.

"너는 왜 아직도 꿈을 꾸냐, 두석아."
영재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의 눈빛은 낯설 만큼 날카로웠다.
두석은 그 낡은 공회당 마당 위에서 오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소안도의 들길에서 함께 글을 외우던 그 아이.
같은 밤을 하얗게 새우며 같은 책을 읽던 이.

영재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야학 교실 안은 적막했다.
두석은 칠판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스민 주름과 피로, 그리고 오래된 동지에 대한 반가움이 스쳤다.
“영재야… 서울 다녀왔다지? 그쪽은 많이 변했나?”
“변했지. 사람들 얼굴이 변했고, 말이 총으로 바뀌었더군.”
영재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차가웠다.
“너도 들었겠지. 신탁통치, 결정됐다고.”
“그래. 나도 들었어.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란 것도 안다.”
영재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두석아, 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냐? 소련 애들이 북에다 뭐 세운 줄 아냐? 인민위원회? 김일성이? 그게 나라냐?”
두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미군정 밑에 다시 친일 경찰들을 앉혀 놓고, 그걸 나라라고 부를 순 없잖아.”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우리, 그때 함께 했잖아. 너랑 나. 야학 열고, 문맹 없애자고 돌아다니고, 일본놈들 몰아내자고 밤새며 소리치던 거 기억 안 나?”
영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굳어졌다.
“기억하지. 그래서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네가 지금 이끄는 봉강회… 이거 좌익 조직아냐.

두석아, 미안하지만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두석의 눈도 달라졌다.
“이제 ‘친구’이라 부르지도 마라. 그렇게 믿었던 네가, 내 야학을 ‘빨갱이 소굴’이라 말하는 순간… 우린 끝이다.”

“…신탁통치가 우리 민족의 자주를 지켜줄 거라 믿는 거냐?”
영재가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다.
두석은 고개를 들었다.
“자주는 하루아침에 오는 게 아니야.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 35년인데, 그걸 하루아침에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착각이지.”
“그래서 소련 놈들 밑에 들어가서 5년 동안 통치 받자는 거냐? 그게 진짜 조선의 자주냐?”
“통치가 아니라 준비다.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해 과도정부를 만들고, 양 진영이 협력하여 새 나라를 세우는 것. 그것이 국제적 합의이자 현실적인 방안이야. 우리는 지금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영재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쳤다.
“준비? 그 사이 공산당이 다 장악하고, 토지 몰수하고, 교회 불태우고… 그게 네가 말하는 ‘준비’냐?”
“그러면 미군정은 어땠지? 친일 경찰 그대로 앉혀두고, 태극기 들고 나오면 빨갱이라 잡아가. 그런 게 진정한 자유냐?”
두 사람의 호흡이 빨라졌다.
“공산당은 민족을 위한다며 내부총질부터 시작했어.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의 힘으로 쟁취해야지, 왜 소련을 등에 업고 들어와?”
“그 말, 미군정 지지하는 네 입에서 할 말이냐? 미국이 조선인을 위해 총 한 방 쏜 적 있냐? 해방은 연합군 덕이라지만, 조선의 자리는 어디 있었나?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았어.”
영재는 순간 말을 잃었다. 두석은 목소리를 낮췄다.
“난, 다시 총칼의 시대가 오는 걸 막고 싶어. 분열이 아니라 협력으로 가야 해. 공동정부를 통해 민의가 반영된 조선… 그걸 만들고 싶다.”
“그건 꿈이야.” 영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현실을 봐. 북은 이미 소련식 체제야. 남은 남대로 가야 해. 통일? 이상적이지. 하지만 그 통일을 위해 남쪽부터 망가뜨릴 순 없어.”
“…그럼 너는 분단을 선택하겠다는 거냐?”
“그래. 반탁이 곧 반공이고, 그것이 지금 조선을 살리는 길이야.”


그날 밤, 회관 뒤편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청년들이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지고,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누군가 쓰러졌고, 피가 흘렀다.
두석은 피투성이가 된 아이 하나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우리가 배운 게 이거였냐, 영재야! 우리가 만들려던 조선이, 이런 피를 필요로 했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영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네 조선은 끝났어. 이젠, 각자 갈 길을 가자.”
두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눈을 들었을 때, 영재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도 더럽고 피곤하다, 두석아.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이기지 않으면, 이상도 무너진다.
나는 태극기를 들었고, 너는 아직 책을 들고 있더군.”
그 말은, 비수였다.
두석은 돌아서는 친구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게 해방이란 말인가...”
창밖, 바람에 실려온 개나리꽃잎이 서럽게 흩날렸다.
그해 봄, 누군가는 깃발을 들었고, 누군가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친구는 친구를 겨누게 되었다.


#작가의 말
두석과 영재는 같은 이상을 품고 자라난 인물입니다.
해방 직후의 조선은 더 이상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우리는 좌우로 찢어졌고, 민족은 갈라졌다.
찬탁과 반탁, 그 대립은 단순한 이념 싸움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사이를 벌어지게 한, 현실 그 자체였다.
두석과 영재의 대립은 단지 주인공의 고뇌가 아니다.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어떤 신념을 택할 것인가?"
"분열과 대립의 시대에, 나는 어떤 깃발 아래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