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모른다. 그 소중한 것이 너무 흔해서이기도 하지만, 소중함은 원래 소중해서 그 소중함을 모르는 법이다. 소중함의 역설이다. 공기가 그렇고 가족이 그렇고 자유가 그렇다. 없어서는 안 되지만 정말 소중해서, 매우 가까이 있으니까 소중함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주위의 소중함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저 돈만 많이 벌고 술이나 한잔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우리(국민)가 어떤 억압을 받고 있는지, 사회가 어떻게 우리를 폭력적으로 지배하는지,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력이 제대로 행사되고 있는지 전혀 관심 없다. 나 혼자만의 안위만,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다.
영화는 이처럼 너무나도 속세적인 한 고졸 판사 출신 변호사가 인권변호사로 변하는 모습에 포커스를 맞춰 보여주고 있다. 송우석(송강호)은 고졸출신이라 약간 콤플렉스가 있다. 그래서인지 일찌감치 판사를 그만 두고 돈 버는 데만 온 정신을 다 쏟는다. 집도 사고 변호사 사무실도 날로 번창한다. … 그는 고시 공부할 때 신세졌던 단골 국밥집을 이용하는데, 어느 날 그 집 아들이 공안사건(실제 부림사건으로 용공조작 사건임)으로 잡혀간다. 온갖 고문과 폭력이 난무한다. 처음엔 그의 변호를 거절하다 국밥집 아주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결국 그는 국밥집 아들의 변호를 맡는다. 그러면서 사회에 눈을 뜬다. 이 사회가 얼마나 폭압적이고 반민주적인지… 곧 이전 자신의 모습을 반성한다. 최소한 자신의 자식들에게 이런 사회를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권의 소중함을 알고 자유의 귀중함을 배워간다. 그는 그렇게 성장하며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인간 노무현의 모습이다.
영화는 오프닝 화면에서 이 영화는 실화를 모티프로 삼았을 뿐 허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 말이 더욱 영화를 실화에 무게중심 싣게 만들었다. 감독이 이것을 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 인간 노무현의 정신적(또는 정치적) 성장(또는 변화)을 큰 기둥으로 삼고 있지만, 영화는 정작 노무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다. 실은 지금은 너무 흔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자유와 인권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절대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이 영화를 판단해서는, 또는 노무현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따라 이 영화를 판단해서는 안 되리라 본다.
영화의 흥행과 작품성엔 많은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감독, 배우, 연기, 주제, 심지어 상영시기, 상영시기의 사회적 분위기 등. 그런데 같은 주제도 어떤 프레임으로 보여주는지, 즉 어떤 구도로서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주제를 보여줄 것인지가 영화 내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 가령, 이 영화의 주제인 인권의 소중함, 권력(정권)의 부당성, 재판과정의 폭압적 면, 사회의 폭력적인 면 등을 다룬다고 할 때 직설적으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의 어두운 면을 보여줄지, 아니면 그런 권력에 처절하게 당하는 힘없는 국민 한 개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줄지에 따라 영화의 성패가 갈려지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 <변호인>은 이런 방식을 비틀었다. 무자비했던 군사독재정권에 인권과 자유를 무참히 짓밟혔던 한 소시민을 변호한 변호인의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이때 자칫 잘못하면 영화는 지루해지고 삼천포로 빠질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강약을 유지하며 시종일관 긴장되게 영화를 끌어가고 있다). 결국 이것이 적중한 것으로 판단된다. 감독의 재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돈벌이에만 치중한 굉장히 속물이었던 한 변호사가 인권의 소중함과 자유의 귀중함, 권력의 부당성에 대해 당당히 말할 용기를 가지게 되는 그 정신적 성장을 통해 역으로 지금의 우리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들 하신지…’라고.
송강호는 영화 초반에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으며 말한다. 공부하기 싫으니까 데모나 한다며. 그러자 국밥집 아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자 다시 송강호는 “대학생들이 데모한다고 이 세상이 변할 것 같냐!”고 말한다. 이 세상이 그렇게 말랑말랑한 게 아니라며 데모하는 대학생을 힐난한다. 전형적인 우리시대 아버지들의 멘트다. 그러나 송강호도 변했고 사회도 변했다. 그 데모는 우리사회를 제대로 된 민주주의 나라로 만들었고 지금은 우리가 그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만끽하는 사이 우리는 지난날 우리(우리선배들)가 피 흘리며 싸워 쟁취했던 그 자유와 민주와 인권의 소중함을 다 잊었다. 다시 정부기관과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고 국민을 사찰하고 있다. 정부는 데모하는 사람들을 폭력적 방법으로 진압하고 있다. 그러면 또 수구세력들은 말한다. 이 정도가지고 뭘… 이 정도는 정당하다고.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반복적인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제대로’라는 단어다. 제대로 된 변호사, 제대로 된 사회와 국가, 제대로 된 재판과정,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국민!’이다. 이 ‘제대로’ 되기 위해 우리는 모든 부당하고 폭력적인 것에 대항해야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스스로 포기해선 안 된다. 계란은 산 것이고 바위는 죽은 것이다. 결국 산 것이 죽은 것을 이겨야 한다. 그래서 언젠간 이 바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사회요 역사라고 영화는 강조한다. 우리(살아 있는 것)는 계속 살아야 하니까.
송강호의 연기는 다른 어떤 영화보다 이 영화에서 더욱 빛난다. 배우의 연기와 시나리오의 탄탄함, 그리고 감독의 연출력이 조화롭게 맞아 떨어진 영화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영화다.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이 아주 훌륭하다. 진심이 느껴지는 영화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국가는 국민’임(대통령과 정권과 재벌에 있지 않음)을 새삼(?) 일깨워주는 영화다. 여기에 무슨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현재 우리사회를 되돌아봐야 할 때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