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취직할 줄은 몰랐다. 너는 안 할 줄 알았는데"
어느덧 취직한 지 딱 두 달이 되었다. 가까운 친구들의 말처럼 나도 내가 취직할 줄은 몰랐다.
내 브런치 첫 글이자 카카오 브런치를 합격할 때 썼던 단 하나의 글은 재수를 하고 원하던 대학에 갔음에도 대기업을 포기하고 내 사업을 하겠다는 거였다.
브런치도 나의 당돌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합격을 시켜줬지만, 결국 나는 지금 사업에 실패한 패배자이자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다.
주변에서는 나를 보고 모험을 즐기며, 안정을 지양하는 과격한 도전자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실제로는 두렵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대학 시절, 과외로 돈을 쓸어모으는 친구가 있었다.
학교도 괜찮은 곳에 갔고, 구석진 곳에 있다보니 단가는 낮아도 어린 나이에 꽤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딱 한 번, 그것도 중학교 1학년만 과외를 맡고 다시는 하지 않았다.
수능이라는 어린 나이에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되는 시험을 앞둔 친구들의 운명을 내가 망칠까봐였다.
주변에는 "야, 일단 해보는 거지! 도전해봐!"라고 지금도 말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겁이 많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일확천금에 눈독을 들이다.
과외를 포기하다보니 많은 돈을 벌 방법이 없었다.
알바를 안 한 건 아니지만, 방학 때마다 본가에 올라오다 보니 장기간 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쿠팡, 마켓컬리, 공장 등 일용직을 전전했지만 솔직히 너무 힘들어서 쉽게 벌 방법을 찾아나섰다...
마침, 군대를 가게됐고 돈 걱정에서 벗어나 아예 잊고 살았는데 어느날, '부의 추월차선'을 읽게 됐다.
그 책을 읽는 순간, '돈을 이렇게 버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뇌가 돈에 잠식 당하게 된다.
그때부터 돈을 어떻게 하면 쉽게 많이 벌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근데 군대 안에서 어떻게 돈을 벌겠는가?
나는, 결국 주식에 빠지고 군적금과 어머니께 빌린 돈을 다 날리고 만다.
그때, 사고뭉치 아들을 바라보면서 걱정에 눈시울을 붉히던 어머니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군대 간 시기는 2020년 코로나 초기이다. 그 불장에서 어떻게 그 큰 돈을 날렸는지는 다음에 풀어보겠다...)
2021년, 전역을 하고 한 학기를 통으로 쉬었다.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이때부터 스마트 스토어를 배우고, 포토샵 자격증을 따면서 마케팅을 공부했다.
시작만 하면 돈을 쓸어 담을줄 알았다.
그리고 실제로 돈이 벌렸다! '와, 꼭 직장을 안 가도 되는 구나? 아니, 오히려 직장을 안 가야 돈을 버는 구나!'
이 무렵 내가 쓴 글이 브런치 첫 글인 '명문대생 김군은 왜 대기업을 포기했나?'이다.
지금도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의 커리어상 직장에서 CEO까지 오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국엔 퇴사를 하여 자기 사업을 일구는 게 종착지라 생각한다.
CEO가 되고 싶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한 기업의 사장이 수십 명이던가?
냉정히 자신이 깜냥이 안 된다 싶으면 돈이라도 목표로 하는 게 생각한다.(아직도 어린 생각인건가...)
아무튼, 이 당시 최대 월 100만 원까지 벌어봤는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서비스직이 너~~~무 아니었다는 거다.
콜포비아 때문에 평범한 전화대응도 어려웠는데, 간혹 찾아오는 진상을 상대하자면 진짜 울고 싶었다.
내가 아직까지도 얘기하고 있는 그 교사! 진짜 잊지 않겠다...
콜포비아 말고도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돈이 벌리니 상품을 올리는 게 너~무 하기 싫었다.
돈이 벌리기 전까진 재밌어서 계속 하다가 보상이 주어지니 더 큰 보상을 원하는 게 아니라 만족을 하게됐다.
결국 관리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매출은 0원에 가까워졌다.
이후로도 몇 가지 사업을 도전하고 다양한 돈 버는 법을 배워봤지만 끝은 똑같았다.
심지어는 대량 등록을 시도하다 짝퉁을 거르지 못해 스마트 스토어는 정지를 먹었다.
나는 욜로랑 거리가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애초에 알바를 열심히 안 하니 돈이 없어 잘 쓰질 못한다.
근데, 가끔 마음에 장벽이 허무러져 플렉스 요정이 찾아올 때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 사건'이 나를 직장인의 세계로 이끌었다.
작년 초, 나는 대학교 4학년 신분으로 튀르키예 교환학생을 갔다.
당시 통장잔고는 0원으로 학교에서 준 지원비와 부모님의 용돈으로만 생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극한으로 아끼고 살았는데, 문제는 봄방학에 발생했다.
튀르키예는 일주일 정도의 봄방학이 있었고, 당시 발생한 큰 지진으로 대부분의 수업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 친구들은 모두 튀르키예 밖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고, 나 또한 아무도 없는 학교에만 있고 싶진 않았다.
앞에서 내가 고삐가 풀리면 폭주한다 했던 걸 기억하는가?
결국, 나는 봄방학 동유럽 투어 외에도 가장 가보고 싶었던 스페인을 장~기간 여행하다 돌아왔다.
돈은 어디서 났냐고? 주택청약을 담보로 대출 받았다.(...)
이외에도 돌아 오기 전에는 기념품 플렉스를 하면서 마이너스 통장을 잔고를 더 깊은 심해로 끌어내렸다.
당시에는 돈 쓰는 게 너무 즐거웠고, 한국에 돌아와 사업을 다시 시작하면 쉽게 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결국, 통장 잔고에 찍힌 -는 나를 더욱더 옥죄기 시작했다.
나는 사업을 재개할지, 직장인지 될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2023년 9월, 2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취준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여러 사업을 해보면서 진정한 무자본 창업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도전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나는 현재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다.
처음에는 회사원이라는 호칭이 사업에 실패했다는 표식같아 좌절스럽기까지 했다.
전공 과목 성적은 개판에 사업만 주구장창 한 초년생을 받아주는 대기업도 없었다.
지금은, 집 근처에 중견 회사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사업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나는 여러 사업을 해오면서 현금흐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업을 운영할 때 고정적인 수입이 있다면 그만큼 든든한 것도 없다.
다음달 월급이 나오면 내 통장잔고는 정말 오랜만에 0을 찍게된다.
그때가 오면, 다시 작은 파이프라인을 하나씩 만들 구상 중이다.
이제 일확천금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추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