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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Feb 17. 2018

크레셴도 크레셴도 : 안목 높이는 법 11

<1828년 12월 1일>

 올드벅은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더니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인사말을 남긴 채 돌아갔다. 지나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그가 기대있던 소파에 몸을 맡기더니 “우리, 알게 된 지 얼마나 됐죠?”라고 천천히 물었다. 밥은 무얼 먹었느냐는 식의 일상적인 말투였다. “글쎄, 5년쯤 되지 않았을까.” 내가 말했다.


 "솔직히 나는, 당신이 돈 버는 데는 재주가 없다는 걸 단박에 알았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웃었다.


 "새삼스러운 말은 아닌데."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가방을 챙긴 채 인사를 했다. "그러면, 안녕." 나는 그녀가 꾸벅일 때 그 가방 안에서 두툼한 노트 몇 권을 봤다.




 -1828년 12월 1일 


 나는 당분간 폭풍전야 같은 날이 이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원래 벌레들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 대이동을 한다. 정글 속 동물들은 태풍이 몰아치기 전 거주지를 떠나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들에게서는 본능처럼 경고가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경우 오래전에 야생성을 잃었다고 하나, 경고를 직감할 수 있는 신경은 미미하게 남아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그 느낌이 바로 불안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이다.


 화상은 잔잔하다. 나는 진한 블랙커피를 끓여 마시면서 책을 읽고, 가만히 의자에 몸을 기대 여러 생각을 했다.


 그 애라면 지금 상황에서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줬을까…. 갑자기 여동생이 떠올랐다. 짧은 시간 베이커 씨로 인해 생긴 소동들을 그녀는 흥미로워했을 것이다. 귀찮은 일이 생겼다며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애초 예측이 불가능한 아이였다. 그간 몇 번이나 자살소동을 벌였는지 셀 수조차 없다. 나란히 세상을 떠난 부모님은 하나같이 내 손을 꽉 쥐면서 여동생을 잘 보살피라고 당부했다. 언젠가 내가 하늘로 가게 되면 그분들을 뵐 면목이 없을 것이다.


 워낙 어릴 때부터 특이했던 경우였다. 동년배 남자들만 우글대던 미술 수업을 바득바득 들으면서 이를 갈며 그림을 그려온 아이였다. 무언가에 꽂혀 종이에 그걸 옮길 때면 식사도 몇 끼씩 거르면서, 눈물 자국도 채 마르지 않은 기상천외한 그림을 들고서는 화가들의 거들먹대던 흉내를 내며 까르르 웃던 아이였다.


 15여 년 전 그때의 그 그림들, 그 점과 선, 모양, 분위기….


 '아.'


 육중한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양 정신이 트였다.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떴다. 목적은 알 수 없으나, 베이커 씨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접근한 배경이 무엇인지는 이해가 갔다.


 누구를 만나야 할지 떠올랐다. 지금 당장 노라 할멈을 만나야만 했다.


 이때 내가 나서기도 전에 화상 문이 먼저 열렸다.


 테일러 씨였다. 각진 진청색 중절모에 그와 같은 색으로 깔 맞춤한 정장,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흰색과 담황색이 사선 지그재그로 박혀있는 넥타이 차림새다. 끝이 뭉툭한 검은 가죽구두는 오기 직전에 닦아둔 양 어색하게 반짝였다. '임프들'은 보이지 않았다.


 "잘 지냈소?"


 그가 느릿느릿 말하며 미소를 띄웠다. 나는 늙은 두꺼비를 떠올렸다.


 "테일러 씨.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제가…." 나는 일부러 보란 듯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재킷을 걸쳤다.


 "당신이 베이커 씨와 친하다고 들었소." 그가 창으로 쑥 찌르듯 말했다. 내가 내빼려는 걸 눈치채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는 어떤 말을 해도 먼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둘 중 하나 이상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나는 내가 하는 말에 한숨을 섞었다.


 "늘 그렇듯 독특한 화상이야."


 "늘 그렇듯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없을 겁니다."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구먼." 그가 쿡쿡대며 웃었다. "다름이 아니고, 지금 시간이 된다면 당신이 나를 베이커 씨 집으로 데려다줬으면 하네." 늘 취재할 때 쓰는 '매뉴얼'이 이 문장인 양 무미건조했다.


 "왜 혼자 찾아가지 않으시고?"


 "그 작자의 명성을 알고 왔네. 빚쟁이에 쫓기는 양 들어오는 사람을 그리 가린다고 하더군."


 "그냥 방해받기 싫어서일 겁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가 최소한 빚쟁이에 쫓기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의외네요. 테일러 씨가 먼저 독대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다니요. 바로 지금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차라리 지금 시점에서 두 사람이 만나 무슨 내용이든 이야기를 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요." 노라 할멈은 내일 만나도 된다. "따라오세요." 나는 테일러 씨를 이끌었다.




 훤한 대낮이란 게 무색할 만큼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치커리와 로메인이 뒤섞인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마당에 진동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 탓도 있겠지만, 정원은 오랜 시간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듯 생기를 크게 잃은 상태였다.


 "어서 오시게."


 베이커 씨는 나와 테일러 씨가 함께 있는 걸 보고도 크게 놀랍지 않다는 투였다.


 "무슨 일이신가?"


 그는 내가 아닌 테일러 씨를 보면서 물었다.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어떤 연유이든 당신도 이제 이 바닥에서 꽤 이름 있는 양반일세. 기자로서 안부를 묻고자 온 것이라고 둘러대고 싶군."


 “그러면서 이번에는 어떤 쓰레기를 내놓을지 살펴보기도 하고?” 베이커 씨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아트 파이낸스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더 좋고.” 테일러 씨도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베이커 씨는 나와 테일러 씨를 방으로 안내했다. 노라 할멈이 없다는 걸 빼면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베개와 얇은 이불은 삐거덕거리는 침대 위 어지럽게 뒤엉켜있었고 한가운데 걸린 전등은 희미하게 빛을 냈다. 낡은 옷장은 여전히 비스듬히 열린 상태였다. 벽면에는 묘한 곰팡이 자국이 묻어있다.


 “생각보다 평범하구먼.”


 “내가 악마의 재단이라도 운영하는 줄 알았나 보군.” 테일러 씨의 말에 베이커 씨가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스멀스멀 말했다. 테일러 씨는 귀를 쫑긋하다 이내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래. 작업은 잘 돼 가는가?”


 “불청객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구먼."


 나는 두 사람의 미묘한 신경전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이 지금이 아니고도 언젠가는 마주칠 관계라고 확신했다.


 "차라도 마실 겁니까?" 베이커 씨가 가만히 앉아있다가 마지못해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테일러 씨는 그 말을 듣고 눈을 작업실 문으로 돌렸다. "차보다도, 다른 걸 구경하고 싶네만." 베이커 씨를 힐끗 보더니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딱히 보여주고 싶지 않소." 그 대답을 예상한 듯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나는 오늘 꼭 보고 싶군." 테일러 씨가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움직임에서도 탐욕스러움이 느껴졌다.


 테일러 씨는 이미 방을 나가 작업실의 문을 연 상태였다. 오랜 시간 견제받지 않는 유력 예술잡지의 편집장으로서 이런 행동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베이커 씨는 짧은 순간 입술을 삐죽이더니 나와 함께 그를 따라 작업실로 향했다.


 테일러 씨는 손수건으로 코를 문지르며 작업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오래된 물감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정면의 벽에는 물감으로 범벅이 된 종이 수십장이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만한 물감을 어디서 마련했는지 궁금해지는 강렬한 붓질이다.


 그림들은 각각 무얼 표현한 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저 저 벽면에 그림들을 가득 붙이려면 아직도 종이가 훨씬 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자네, 그때 있던 다른 그림들은 다 어디에 뒀나?"


 "버렸네."


 베이커 씨가 대답했다.


 “원래는 다른 것들도 있었던 모양이군.” 내가 버린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테일러 씨가 그 순간을 가로챘다. “무슨 짓을 하는 건가?”


 베이커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테일러 씨는 그림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벽면으로 다가가 가장자리에 있는 종이 한 장을 떼어냈다. 무언가 쓰인 두루마리 종이를 읽듯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양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전부니 돌아가 주면 좋겠소.”


 이내 베이커 씨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전혀 생각 못 한 전개였다. 테일러 씨가 양손으로 펼쳐 보고 있던 그림을 반으로 찢어버린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테일러 씨는 반으로 찢어진, 원래 하나였던 두 종이를 다시 포개더니 다시 반으로 쭉 뜯어버렸다.


 “여전히 쓰레기를 만드는 데 시간 낭비를 하고 있군.”


 테일러 씨의 굵은 목소리에서 비웃음이 뚝뚝 묻어났다. 그는 네 조각이 된 그림을 코 푼 휴지처럼 바닥에 휙 던졌다.


 평소 많은 화가에게 해온 행동처럼 자연스러웠다.


 베이커 씨는 그 광경을 보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는 테일러 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모습은 뚝뚝 끊긴 채로 묘사되는 연작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는 냄비 뚜껑 같은 오른 손바닥을 펼쳐 테일러 씨의 뺨을 힘껏 갈겼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뺨을 맞은 당사자는 그 힘을 지탱하지 못해 바닥에 엉덩이를 쿵 하고 찧었다. 사백안이 된 베이커 씨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당장 꺼져!”


 나는 그 또한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듯 가만히 있더니 이내 상황을 파악한 양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팔과 두 다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자네, 나한테 이러고도….”


 “두 번 말하지 않겠네.” 베이커 씨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테일러 씨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그 말을 듣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테일러 씨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내 문을 쿵 닫고 사라졌다.


 “자네도 오늘은 이만 가주었으면 하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방점을 찍는 것처럼 보였다. 베이커 씨는 당장 뛰어가 테일러 씨를 힘껏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이날이 내가 콜론에서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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