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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Feb 18. 2018

크레셴도 크레셴도 : 안목 높이는 법 12

<1828년 12월 2일>

-1828년 12월 2일 


 예상대로 다음 날 『아트 파이낸스』 1면은 편집장이면서 유명 미술평론가인 테일러 씨가 한 무명의 조현병이 있는 화가에게 폭행당했다는 내용이 장식했다. 


 '…이 작자는 본지가 주최한 지난 전시회에서도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는 천박한 그림을 내놓은 바 있다. 다수의 전문가는 이런 행동들이 억눌러온 열등감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폭발시킨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실력으로 인정을 못 받으니 점차 이상행동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국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미쳐버렸다는 것이다. 콜론 시립병원 원장이자 현재 콜론 시민 미술협회 회장을 맡는 톰 아치(55) 씨는 “더는 예술이란 이름 아래 이상증세를 일으키는 몇몇 미치광이들의 행동을 묵인할 수 없는 시기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기사에는 테일러 씨가 용기를 내 먼저 베이커 씨의 집을 찾았으며 서로의 예술관을 공유하던 중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 야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내용뿐, 폭행당한 이의 막무가내 행동들은 쏙 들어간 기사였다. 당연히 내 이야기도 단 한 줄 언급되지 않았다. 


 “이건 다 거짓말이에요.” 


 "원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라네."      


  내가 『아트 파이낸스』를 양손으로 구기면서 토로하자 노라 할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의 탈을 썼으니 가능한 걸세."      


 "날조된 이야기란 걸 알고 계시잖아요. 화도 나지 않는 거예요?" 


 "나만큼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도 없을 거야." 


 노라 할멈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제지하려는 양 내 얼굴을 향해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팔을 뻗더니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늙은 여자 한 명이 살기 딱 적당한 크기인 아담한 벽돌집에서는 곳곳에서 고양이 털이 휘날렸다. 마르지 않은 비 냄새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이날 나는 노라 할멈을 만나고자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화상은 지나에게 맡겨뒀다. 최근 화상을 자주 비우는 데 죄책감이 들 때였다.      


“알겠어요. 다녀와요.” 그녀는 이유도 묻지 않고 승낙했다. 눈빛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당시 나는 아트 파이낸스의 기사를 보고 화가 치밀어 그녀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이커 씨의 배경, 알고 있었던 거죠?” 


 내가 말했다. “뭘 알고 있었다는 건가?” 노라 할멈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 얼굴에 오랜 시간 그리워한 친구가 갑자기 생각난 양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는 걸 나는 눈치챘다. 


 “그 사람. 어릴 적에 우리 마을에서 살던 그 소년 맞죠?” 


 노라 할멈이 눈을 감고 몸을 양옆으로 천천히 흔들더니 탁자 위로 양손을 얹어 깍지를 꼈다. 나는 주름살이 깊게 팬 양 볼에서 홍조를 본 듯했다. 


 “그랬지.”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 여동생과 같은 수업을 들었었죠?" 


 "내가 두 아이를 가르쳤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 셈이었다. 베이커 씨는 이방인(異邦人)이 아니었다. 그는 이 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어린 시절 누구보다도 내 여동생과 단짝 친구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그려지는 그때 소년과 지금 베이커 씨의 모습은 영 이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남루했고, 말을 할 줄은 아는지 입을 거의 떼지 않았으며 그런 만큼 눈에 띄는 성격도 아니었다. 둘 다 어린 건 마찬가지였지만, 엄밀히 보면 소년의 나이가 훨씬 많은 편이었다. 정반대의 외관, 성격이 어찌 그리 친해졌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둘 다 재능이 있었어. 소년은 두 손에, 소녀는 두 눈에 재능이 한가득 넘쳤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 애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운 생각이 들 정도였네." 


 노라 할멈이 말했다. 그녀는 이제 제동장치 없이 15년이 지난 추억 길을 걷는 중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야. 소년은 덩치만 컸지 사회성은 빵점이었어. 세상 혼자 사는 아이였어. 자네도 알다시피 부모가 다른 집에서 주워 온 아이처럼 키우지 않았나.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받은 자네와 자네 여동생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게 흔한 시기였네. 교육 적령기가 훌쩍 지났는데도 그대로 방치해버리곤 하지. 사내가 힘만 쓰면 된다는 생각으로 말이야. 특히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군인 집안에서는 더더욱. 내가 하는 미술 수업들을 매번 창문으로 빼꼼히 훔쳐볼 때 어느 날 모르는 척 다가가서 말을 거니 죄송하다며, 무언가를 너무 배우고 싶은데 집에서 보내주지 않아 그랬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이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아. 어땠겠나. 부유한 집안에서 과시할 수 있는 취미 생활로 취급되는 시대, 강의실에 첫발을 디딘 꾀죄죄한 소년을 본 다른 아이들의 표정이. 누구보다 천사 같은 아이들은 누구보다 악마가 되기도 한다네.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한들 그 꼬마 악마들을 어떤 수로 당하겠나. 그때 그 소년을 챙겨준 게 자네 여동생이었어."      


 "그 아이는 왜 그랬던 걸까요." 


 “그땐 나도 몰랐다네. 하지만 기억을 곱씹어보면 '주파수'가 맞았던 게 아닐까 생각해. 숨길 수 없는 두 재능이 서로를 알아본 게 아닌가 생각한다네. 나는 베이커의 첫 정물화를 보고 전율을 느꼈어. 모든 아이가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만큼 드로잉은 형편없었지만, 기교와 강박관념 없는 정말 자기가 그리고 싶어 그린 그림이었다네. 숨은 진주였어. 그 기괴한 분위기는 그때부터 풍겨 나왔다네. 평생 꿈에서나 보던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사리손을 통해 봤던 거야. 당시 나는 환멸을 느끼던 중이었네. 미술은 왜 늘 계몽의 보조적인 수단이 되어야만 하나. 미술이 미술 그 자체로 감동을 안겨줄 수는 없는 걸까. 나와 뜻을 함께하던 유일한 사람이 자네 여동생이야. 어느 날 찾아와서 묻더군. 베이커의 그림은 어떤 그림이냐고.” 


 나는 내 여동생이 종종걸음으로 활짝 핀 젊음을 만끽하고 있던 노라 할멈에게 찾아가 당돌한 표정을 지으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자기는 그 그림을 보고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고 했어. 나를 두고 그림을 제대로 본 게 맞느냐고 하더군. 그것 또한 맞는 말이라고. 모든 그림에서 기쁨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말하니 그런데도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면서 활짝 웃었어. 아름다움은 환희의 동의어가 아닐세. 그게 절망 속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거야. 여태 수백 수천 개의 그림을 본 후에야 깨달은 나보다도 훨씬 더 빠른 셈이었네. 남자아이들을 싹 다 휘어잡던 애가 베이커와 딱 붙어 다니기 시작하자 분위기도 달라졌어. 소년은 몇 달간 그림을 그렸고, 소녀는 그림을 봐줬어.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어.” 


 '이 그림을 봐요.' 


 여동생은 그때쯤 고사리와 같은 손으로 독이든 양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사과를 그렸다. 금방 하루살이가 꼬일 만큼 상해 보이는 누런 바나나를 그렸다. 부모님은 그때마다 아연실색하면서도, 어린아이가 으레 시선을 끌기 위해 무리수를 던지듯 장난으로 치부했다. 


 그 후 소년과 소녀는 늘 함께였다. 덩치가 큰 것 빼곤 눈에 들어오는 점 하나 없는 소년, 눈부신 미소에 제멋대로 성격으로 애를 태운 소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계였다. 네 동생이 어떻게 된 게 아니냐는 말이 자주 들려오던 시기였다. 두 아이는 함께 마을 구석구석을 누볐다. 


 소년은 수업에 들어온 지 딱 6개월 만에 그 가족과 마을을 떠났다. 당시 노스캐롤라인 전투의 불똥이 이 마을까지 튀었다. 우리 군의 3개 중대가 하루 아침 사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시기였다. 소년 아버지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아무도 그들이 사라지는 데 의문을 품지 않았다. 소년과 가장 친했다는 내 여동생은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별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 아이는 그런 점에 있어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나이 몇 살을 더 먹고는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됐다고 하더군.” 노라 할멈이 말했다. “일반 병사에서 그 나이에 대위까지 단 걸 보면 꽤 열정적이었던 모양이야. 먹고 살기 위해서였겠지만 원래 그런 성격은 하나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무섭게 돌진한다네. 전쟁터에서 청춘을 그렇게 보낸 셈이야. 마지막 전투에서 사람 8명을 죽였다고 하더군. 저격수도 아닌 중대장 위치에서 말이야. 그때 그는 평생 명예로운 삶이 보장되는 훈장을 받는 대신 제대를 택한 걸세. 그리고 이 마을로 다시 돌아온 거야.” 


 나는 그의 폐쇄적인 성격과 나이보다도 훨씬 더 들어 보이는 외양,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모두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보다시피 그 모양 그 꼴일세. 그 내막은 자네 여동생만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죽어버렸으니.” 


 노라 할멈은 굳이 말을 돌려 표현하지 않았다. 되레 그런 화법이 나에게는 일종의 배려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운명이었을지도 모르네. 신은 가끔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 범인(凡人)은 감당하지 못할 일을 과제로 내리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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