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복수는 우아했다

[영원한 복수자-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by 이원율

"거짓말이 아니야!"


1612년 로마의 한 법정.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소리쳤다. "차라리 나를 죽여!" 비명도 내질렀다. 아르테미시아의 엄지손가락을 짓누르고 있는 고문기계가 더 조여졌다. "자네, 손가락은 곧 부러질거야." 재판관이 경고했다. "그런데도 말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럴 생각 없어요." 아르테미시아는 바로 대답했다. "저를 범한 그놈을 진작 때려잡지 못한 게 아쉬울 뿐입니다." 퉤, 아르테미시아는 피 섞인 침을 내뱉었다.


①젠틸레스키家 vs 타시 : 사건 배경

20230128000002_0_20230128074501400.jpg?type=w647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The Lute Player

아르테미시아가 말한 그놈은 그녀의 미술 교사 아고스티노 타시였다.


9개월 전, 타시는 열일곱 살 소녀 아르테미시아를 가르치던 중 악마의 민낯을 내보였다. 아르테미시아에게 점점 더 가깝게 붙었다. 슬금슬금 스킨십을 했다. 끝내 미쳐서는 그녀를 끌고 가 순결을 짓밟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타시는 아르테미시아를 상대로 셀 수 없이 많은 성폭행을 저질렀다. '내 명예를 지키려면 이 사람과 결혼할 수밖에 없겠다….' 그런 시대였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렇게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타시는 훨씬 더 악랄했다. "결혼? 내가 너처럼 걸걸한 애랑? 미쳤구나." 아르테미시아는 더는 타시를 봐줄 수 없었다. 당장 달려들어 목을 쥐고 싶은 욕망을 겨우 억눌렀다.


상황을 전해들은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 오라치오가 타시를 고발했다.


아르테미시아가 직접 고소할 수는 없었다. 당시 여성은 법적으로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이었다. 그랬기에 아버지가 대신 고소한 셈이었다.

20230128000003_0_20230128074501406.jpg?type=w647 영화 '아르테미시아(artemisia·1997·아그네스 메렛作)' 스틸컷

사실 아르테미시아에게 이 파렴치한을 소개한 이가 오라치오였다.


오라치오는 꽤 유명한 화가였다. 아내는 아르테미시아가 열두 살 쯤일 때 잃었다. 그때부터 자식의 교육을 홀로 책임져야 할 처지에 놓였다. 오라치오는 투박했다. 술을 좋아하고, 말과 행동도 거칠었다. 좋게 말하면 시원시원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다소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오라치오는 편견만은 없는 남자였다. 오라치오는 어린 딸이 붓을 쥐자마자 자신에게 이어받은 재능을 봤다. 고민할 것 없이 미술을 가르쳤다. 바로크 거장 카라바조를 따른 오라치오는 아르테미시아에게 그 기법을 전수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내 딸이랑 견줄 수 있는 화가? 지금 당장 찾아봐도 많지 않을 걸!" 오라치오는 거나하게 취하면 늘 딸 자랑을 하며 킬킬댔다.

20230128000004_0_20230128074501411.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수산나와 두 장로
20230128000005_0_20230128074501418.jpg?type=w647 틴토레토, 수산나의 목욕(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보다 74년 일찍 태어난 틴토레토는 수산나를 청순한 여인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오라치오의 말이 맞았다.


이미 아르테미시아의 재능은 오라치오의 노련함을 능가하려고 했다. 소녀 시절 아르테미시아는 '수산나와 두 장로'를 그렸다. 그림은 성경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두 장로수산나를 묘사하고 있다. 두 노인은 정원에서 목욕하고 있는 수산나를 범하려고 한다. 수산나는 저항한다. 역겨움을 표출한다. 하지만 수산나는 외려 술수에 휘말려 누명을 쓴다. 사형선고를 받는다. 때마침 예언자 다니엘이 등장해 그녀를 구하고, 두 장로가 처벌 받는다는 내용이다. 옛 화가 대부분은 수산나의 아름다운 얼굴, 풍만한 몸매를 강조했다. 대놓고 누드화로 만드는 이도 적지 않았다. 고작 10대였던 아르테미시아는 다르게 그렸다. 수산나를 인간 그 자체로 표현했다. 야시시한 성적 대상으로 만들기를 거부했다. 이 그림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오라치오가 몰래 그려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20230128000006_0_20230128074501425.jpg?type=w647 아고스티노 타시, Landscape with a Scene of Witchcraft

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본 오라치오는 타시 정도라면 미술 교사로 삼기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라치오의 편법이었다. 당시 여성은 미술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과외라는 샛길을 찾은 것이었다. 오라치오는 아르테미시아의 실력을 묻어두는 건 범죄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타시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성질이 더럽다는 말은 많았지만, 실력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시 오라치오는 몰랐다. 딸 아르테미시아가 '수산나와 장로들'을 그린 직후, 타시에 의해 실제 '수산나의 처지'에 놓이게 될 줄은.


②법정 입장 직전

"마음 단단히 먹어라. 타시, 저 자식 혐의를 입증하는 게 쉽지 않을 게다."


오라치오는 법정 앞에 선 아르테미시아에게 당부했다. "주정뱅이 예술가인 아버지 곁에서 17년을 견뎠어요. 이보다 더 버티기 힘든 일이 있겠어요?" 아르테미시아가 웃었다. "내가 그 정도는 아니었지." 오라치오가 딸의 귀를 꼬집었다. "…기억하죠? 여자한테 왜 과외 선생까지 붙여가며 난리를 쳤느냐는 옆집 아저씨의 말에, 아버지가 주먹으로 턱을 날려버린 일요. 그땐 제대로 말 못했는데, 감사했어요. 솔직히 제 속이 다 시원했어요." "까불고 있어." 오라치오가 말했다. 흐뭇해하는 목소리였다.


③아르테미시아 : 의문 제기

20230128000007_0_20230128074501431.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다비드와 밧세바

"아르테미시아. 당신은 타시와 만나기 전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묻지. 아르테미시아. 당신은 정말로…." "없어요. 진짜 없다고요! 그런데요, 재판관님. 이번 고발 건과 방금 그 질문은 무슨 상관이지요?" 아르테미시아의 목소리는 곤두섰다. "자네에게 이미 그런 경험이 있다면, 타시가 그런 다음 당신을 건드린 것이라면…. 그의 죄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어." "대체 어떤 논리지요?" "당신이 타시 앞에서 먼저 헤프게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르테미시아가 책상을 쾅 쳤다.


"타시가 갑자기 돌아버려서는 저를 침대 모퉁이로 집어던졌어요. 저는 어떻게 할 수 없었…" "재판관님!"


이번에는 타시의 변호인이 외쳤다. "아르테미시아는 거짓으로 법정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타시의 변호인은 태연했다. "그녀의 거짓말을 깰 증인이 있습니다." 변호인 옆에 앉은 타시가 실실 웃었다. "말도 안 돼!" 화를 참지 못한 아르테미시아가 벌떡 일어섰다. 법정이 술렁였다. "조용!" 재판관이 소리쳤다.


④타시의 증인 : 코시모 쿠오리

20230128000008_0_20230128074501437.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롯과 딸들

"증인, 이름이?"


"코시모 쿠오리입니다." 증인석에 온 왜소한 남자가 대답했다. "하는 일은?" "가끔 두 사람의 작업실을 지나쳤습니다. 여자친구가 그 위층에 살고 있어서요." "증언해보시오." 코시모는 타시를 슬쩍 봤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입죠. 제가 두 사람이 붙어있는 걸 몇 번 봤는데요. 글쎄, 저 여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어찌나 헤프게 보이던지…." 코시모가 아르테미시아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 여자가 타시를 향해 연애 편지를 쓰고 있는 것도 봤습죠.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요."


코시모, 저 비열한 인간….


아르테미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아르테미시아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 당연히 편지도 쓸 수 없었다. "재판관님. 저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릅니다." "마지막 경고야. 조용히 하게." 저 생쥐같은 녀석은 타시와 거래를 한 게 분명하다…. 아르테미시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⑤타시의 증인 : 투치아

아르테미시아의 수모는 끝이 아니었다.


코시모의 여자친구 투치아가 법정에 입장했다. 증언대에 섰다. "투치아." 아르테미시아가 허공에 말하듯 부탁했다. "제발. 우린 친구였잖아…." 투치아는 아르테미시아를 슥 보고는 재판관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아르테미시아 집의 세입자입니다. 그녀를 1년간 지켜봤어요. 아르테미시아의 남자 관계는 복잡해도 너무 복잡해요. 매번 다른 남자를 집에 데려왔었지요." 외운 듯한 문구였다.


"타시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거야?"


법정이 소란스러웠다. "아니야! 아니라고!" 오라치오가 이들 틈에서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참고 참던 울분을 폭발시킨 오라치오는 난동을 부렸다. 그는 법정 소란으로 쫓겨났다. 타시와 타시의 변호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는 모두 자기네들 편이었다. 곧 끝날 판이었다.


⑥아르테미시아의 결단 : 고문

20230128000009_0_20230128074501444.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명예의 알레고리

"재판관님."


이번에는 아르테미시아가 입을 뗐다. "사기꾼!" 야유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아르테미시아, 이번 고발이 무효라는 점을 인정할 참인가." 재판관이 서류를 휙휙 넘겼다. "저는 이곳에 편견만 있을 뿐, 정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의 표정은 결연했다. "진실을 말한 사람은 저뿐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르테미시아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어떤 절차도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고문을 자처해서 받겠다고? 적당히 하게!"


재판관이 성을 냈다. "고문을 받는데도 말을 안 바꾸면 호소력은 얻겠지만, 끝까지 버틴 이가 손에 꼽을 수준이야. 불구가 되든, 재수가 없으면 정말 죽어. 나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네." 재판관이 경고했다. "그럼 죽지요, 뭐." 아르테미시아의 답이었다.


⑦젠틸레스키家 vs 타시 : 상황 역전

20230128000010_0_20230128074501449.jpg?type=w647 영화 '아르테미시아(artemisia·1997·아그네스 메렛作)' 스틸컷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찼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고문을 견뎌야 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다시 열린 재판에서 아르테미시아는 특수 장치가 달린 의자 앞에 섰다. "엄지 손가락을 여기 대쇼." 아르테미시아는 기술자의 말을 따랐다. 장치가 손가락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르테미시아. 여태 한 말 중에 거짓말이 있지?" "없어요." "더 조여." 아르테미시아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숨을 헐떡였다. 시간이 흘렀다. 똑같은 질문과 답변이 계속됐다. 타시는 이 장면을 여유롭게 지켜봤다.


"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한 마디만 하면 돼."


"내 말이 진실이야!" 아르테미시아는 재차 침을 내뱉었다. 이제 틀림없이 뼈가 부러지겠다고 생각한 때… 한 직원이 다급하게 법정으로 들어왔다. 그는 재판관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줬다. "아르테미시아에 대한 부인과(婦人科) 검사 내용인데, 그간 증언과는 다른 결과가…." 그제야 타시가 얼굴을 씰룩였다. 표정에서 불안감이 스쳐갔다.


⑧젠틸레스키家 vs 타시 : 결과

20230128000011_0_20230128074501455.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자화상

처음부터 아르테미시아가 이길 수밖에 없는 재판이었다.


그럼에도 타시의 모략, 법정과 재판관의 편견 탓에 7개월을 끈 것이었다. 최종 승자는 아르테미시아였다. 부인과 검사에서 '헤픈 여자'라는 게 증명되지 않은 점이 근거였다. 무엇보다 아르테미시아의 태도가 결정적이었다. 뼈를 가는 고통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타시는 징역형을 받았다.


코시모와 투치아 등 가짜 증인을 끌어들여 짜고친 일도 들통났다. 심지어 오라치오와 아르테미시아 일가의 재산을 노린 점도 드러났다. 타시는 당시 법을 고려해도 5년 이상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겨우 1년형을 받았다. 이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풀려났다.


그렇게 재판은 끝났다.


잘못은 타시가 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타시의 편이었다. 아르테미시아의 평판은 처참했다. 유명 화가의 딸이 휘말린 스캔들은 전역으로 퍼졌다. 재판 결과가 어떻든, 아르테미시아는 헤프고 난잡한 여성으로 낙인 찍혔다. 사람들은 아르테미시아를 불결하게 취급했다. 그녀의 작업실에 오물을 발랐다. 쓰레기를 내던졌다.


오라치오가 먼저 아르테미시아에게 떠나기를 권유했다.


딸이 겪는 수모를 견딜 수 없었다. 오라치오는 아르테미시아에게 예술의 땅 피렌체 공국을 제안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짐을 쌌다. 도망치듯 떠났다.


이겼지만 진 그녀, 피렌체로 가다

20230128000012_0_20230128074501474.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류트를 연주하는 체칠리아

"알고 있지? 네가 진 거야."


울고 있는 아르테미시아에게 타시가 다가왔다. 비열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나는 너를 끝까지 괴롭힐거야. 영원히 따라다닐거야." 타시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죽일거야!"


아르테미시아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다. 땀에 푹 젖었다. "여보, 또 그 꿈이야?" 남편 피에란토니오 스티아테시가 웅얼댔다. 아르테미시아는 몸을 덜덜 떨었다. 한참을 뒤척였다. 남편을 두고 작업실로 내려왔다. 붓을 쥐었다. 힘을 너무 준 탓인지 똑하고 부러졌다. 또 다른 붓을 꺼내들었다. 그림을 그렸다. 붉은색 물감을 거침없이 찍어발랐다. 달이 지고 해가 떴다. "깜짝이야. 여보, 또 그 장면을 그려?" 잠에서 깬 피에란토니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려왔다. "영원한 복수를 위해서." 아르테미시아는 혼잣말을 하는 듯했다.


앞서 야반도주하듯 피렌체로 온 아르테미시아는 오라치오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났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가 소개해준 그저그런 화가 피에란토니오와 곧장 결혼했다. 아르테미시아는 당시 여성으로는 흔치 않게 남편과 따로 여행도 많이 다녔다. 바람(!)도 피웠다. 남편과의 사이에선 4남 1녀를 뒀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의 비열한 표정을 잊으려고 애썼다. 빠르게 가정을 꾸리고, 삶의 안정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타시를 잊지 못했다.


우아하게, 잔혹하게…타시에 ‘영원한 복수’를 날리다

20230128000013_0_20230128074501488.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삼손과 데릴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세를 치른 아르테미시아는 피렌체에서 화가의 날개를 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통치했다. 예술가 후원에 진심이었던 메디치 가문은 그림만 잘 그리면 남자든 여자든, 귀족이든 거지든 상관하지 않았다. 아르테미시아의 실력은 독보적이었다. 피렌체 출신의 거장들 틈에서 독기와 존재감을 동시에 뿜어댔다.


1615년. 아르테미시아는 또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피렌체의 실세, 코시모 메디치 2세가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아르테미시아의 화실로 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피렌체를 대표하는 지식인과 예술인도 동행했다. 최고의 권력가가 타지 화가, 그것도 여류 화가의 작업실에 행차한 건 이례적이었다.


메디치 2세는 작업실 한쪽 벽에 걸린 그림과 여러 장의 스케치를 보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기에 그려진 남자는 타시야? 여자는 아르테미시아 당신이고? 나도 당신의 재판 이야기는 잘 알고 있소." 메디치 2세가 아르테미시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맞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디치 2세는 만족스러웠다. "이것 보시오. 아버지 오라치오보다 더 낫지 않소?" 메디치 2세는 최고의 지식인들 앞에서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디치 2세는 돈다발을 쏟아내고 아르테미시아의 이 그림을 사들였다. "종종 그림을 주문해도 되오?" 메디치 2세가 물었다. "고매하신 후원자님. 제가 여성의 몸으로 무엇을 이뤄낼 수 있는지를 보여드리지요." 아르테미시아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르테미시아의 이 말은 그녀의 가장 유명한 어록으로 남게 된다. 이제 피렌체 예술계에서 누구든 아르테미시아를 모르면 말이 통하지 않았다.


“팜 파탈이 아닌 전사” 유디트의 재해석

20230128000014_0_20230128074501492.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메디치 2세가 탄복한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다.


유딧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출신의 유디트는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였다. 당시 아시리아 제국은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쳤다. 홀로페르네스는 유디트가 사는 마을까지 장악했다. 이 혈기왕성한 장군은 승리의 축제를 열었다. 그 날, 스파이를 자처한 유디트가 거짓투항해 연회장에 들어섰다. 홀로페르네스는 유디트에 홀딱 반했다. 그녀를 끝내 침실로 데려왔다. 술독에 푹 빠진 홀로페르네스는 곯아떨어졌다. 고분고분하게 있던 유디트는 그제서야 눈을 반짝였다. 숨어들어온 하녀와 함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벴다. 대장을 허무하게 잃은 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도망쳤다. 돌아온 유디트는 이스라엘 영웅이 됐다.

20230128000015_0_20230128074501497.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디트와 하녀
20230128000016_0_20230128074501502.jpg?type=w647 티치아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1515년께(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묘사한 유디트와 달리 가녀린 소녀 같은 모습이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가 등장하는 악몽을 꾸고나면 꼭 이 그림을 그렸다.


타시의 목을 베는 심정으로 붓질을 했다. 절규하는 타시의 머리통을 들고 있는 마음으로 색을 칠했다.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트를 소재로 둔 작품은 최소 6점이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디트는 근육질의 여성이다. 힘 좋은 대장장이마냥 두 팔을 힘껏 걷어올렸다. 왼손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쥐어뜯듯 잡고 있다. 오른손에 쥔 칼을 깊숙하게 찔러넣고 있다. 유디트는 냉정하다. 피가 쏟아지는데도 놀라지 않는다. 홀로페르네스는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렇게 붓으로 타시를 죽이고 또 죽였다. 말그대로 영원한 복수였다.


"그렇게 세보이는 유디트는 처음 봤어. 생각해보면 그런 곰 같은 사내를 잡는데 여자라도 그 정도 근육은 있어야지. 여태 화가들은 유디트를 가녀린 팜 파탈로 그리기 바빴으니…."


당시 메디치 2세를 따라 아르테미시아의 작업실을 찾은 지식인 중 한 명은 그의 친구들에게 작품을 이렇게 소개하곤 했다.


카라바조의 진정한 후계자로 남다

20230128000017_0_20230128074501505.jpg?type=w647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자화상

메디치 2세의 간택을 받은 아르테미시아는 거의 평생을 잘 나가는 화가로 살았다.


아르테미시아는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명성 높은 예술가 길드인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의 첫 여성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성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자신감에 찬 아르테미시아도 고객이 그림을 주문하면 이런 글이 담긴 답장을 썼다. 1627년. 아르테미시아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요청을 받았다. 1639년에는 영국 왕비 앙리에트 마리의 의뢰로 그녀 집에 장식한 그림을 도맡아 제작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인맥도 화려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조카 소(小)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등이 친구였다.

20230128000018_0_20230128074501511.jpg?type=w647 오라치오, Moses in the basket

아르테미시아는 로마, 나폴리 등을 돌다가 1638년에 영국 런던 땅을 밟았다.


당시 오라치오가 영국 왕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오라치오가 이듬해 갑자기 사망한 후에도 런던에 남았다. 1642년 잉글랜드 내전 이후 나폴리로 돌아갔고, 그 도시에서 생을 마쳤다. 사망 시점은 1651~1653년으로 추정된다. 아르테미시아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작품에는 목이 두껍고 어깨도 넓은 여자가 자주 등장했다.


훗날 평론가 로베르토 롱기는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디트를 놓고 "누가 이처럼 잔혹한 여인을 묘사할 수 있는가. 두 방울의 물감만으로 폭력에 얼룩진 피와 불꽃의 열기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건 그녀 스스로가 칼자루를 쥐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카라바조의 진정한 후계자. 파란만장한 삶에서나, 다부진 성격에서나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도 얻게 된다. 한편 아르테미시아를 평생 괴롭게 한 타시, 그는 제자였던 그녀가 남긴 작품으로 ‘성폭행범’ 수식어가 수백년이 흐른 지금도 따라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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