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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Feb 24. 2018

크레셴도 크레셴도 : 안목 높이는 법 13

<1828년 12월 2일(2)>

-1828년 12월 2일(2)


 다수의 목격자에 따르면 그 날 화재는 내가 노라 할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늦은 오후쯤 이미 발생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들 중 단 한 명도 혹시 있을 집 안 생존자를 찾기 위해 뛰어들지 않았다. 누구라도 관청에 이 사실을 알렸다면 쉽게 잡혔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행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집은 베이커 씨의 거처였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혐오감은 사람을 이렇게도 비겁하게 만드는 법이다.


 노라 할멈과 이야기를 한 후 집으로 향하던 길, 나는 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한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악마처럼 피어오르는 걸 목격했다.


 베이커 씨의 집이다.


 이웃 주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단' 내지 '신성모독'이라 욕을 내뱉으며 종종 그 건물 안으로 쓰레기를 던지곤 하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달려갔을 때는 이미 전소 직전인 모습으로 많은 사람은 말 그대로 불구경 중이었다.


 누가 가장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겨루는 듯하면서도, 누구 하나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내가 그때 불길로 뛰어든 이유는 당시로는 알지 못했다. 행여나 연기 속에 휩싸여 있을 베이커 씨를 구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의 작업실에 있던 테일러 씨가 사정없이 찢어버린 그 그림이 생각나서, 그것 또한 아니라면 이도 저도 아닌 혐오라는 감정에 매달려 중요한 걸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단순히 화가 나서였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당시 여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독한 연기는 눈과 코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베이커 씨가 가꾸던 정원은 깡그리 불에 탔다. 녹색 윤기로 빛나던 로메인은 그새 수 세기의 시간이 지나간 듯 누렇게 떠 있고, 이슬을 품은 채 이제 곧 꽃 피우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와일드양딸기는 퍼석퍼석한 유물이 됐다. 불길은 개미지옥처럼 집안 전체를 끌어들이는 중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베이커 씨 침실로 몸을 던졌다. 지붕을 지탱하던 기둥들이 하나둘씩 스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안에도 침대와 옷장 등 온전히 남아있는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연 눈에 띌 덩치 큰 그 남자의 흔적은 없다.


 신발 밑창이 점차 으스러지고 있다. 침실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서 빨리 몸을 피하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썩 고맙지는 않다. 작열통(灼熱痛)만큼 큰 고통은 없다. 베이커 씨가 아무리 기이한 사람이라고 한들 앓아누운 게 아니라면, 알아차린 즉시 몸을 피했을 것이다.


 내 발걸음은 나도 모르는 새 작업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종이와 기름 등 불에 잘 타는 소재는 싹 다 모여 있는 공간인 만큼, 한눈에 봐도 가장 불길이 많이 옮아 붙은 것으로 보였다.


 '살려야 한다.'


 주어 없는 한 문장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작업실 문을 여니 그때 테일러 씨와 함께 본 벽에 붙은 그림들은 모조리 사라져 있다. 단 한 장도 없다.


 그 안에 있는 건 쓰러진 올드벅 뿐이었다.




 “자네가 왜 여기에….”


 그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있는 상태였다.


 화상 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연기를 많이 마신 듯 사람 손이 닿은 쥐며느리처럼 몸을 돌돌 만 모습이다. 이때 불길이 용오름처럼 치솟더니 검은 연기가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올드벅은 떨어지는 잿더미를 파헤치며 다가오는 나를 보고 손짓했다.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


 나는 그를 둘러메고 밖을 향해 뛰어갔다. 몸은 종이 인형마냥 구깃구깃했지만, 내 목을 안고 있는 두 팔에서는 필사적인 의지가 느껴졌다.


 올드벅은 베이커 씨 집에서 5m가량 떨어져서야 스르르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내게 다시 한번 자기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그의 몸에 필요 이상으로 크게 부풀어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겉옷을 뜯고나서야 그 비밀이 드러났다. 그의 품속에서 나온 건 수십장의 동그랗게 말린 종이였다. 올드벅은 베이커 씨의 그림들을 끌어안고 쓰러져 있던 것이다.


 그는 나보다도 한참 전에 불길 속에 뛰어들어 베이커 씨의 작업실로 향했다. 불이 그의 작업실을 모조리 태우기 전 죽을 힘을 다해 벽에 붙은 그림들을 떼어 냈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뛰어가다 행여나 손상될까 싶어 한장 한장, 그렇게 수십장을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말았다.


 이미 연기는 이 도시의 아침 안개처럼 작업실을 가득 채운 후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없이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그 자세도, 품속에 담긴 그림들이 바닥에 짓눌려 구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 멍청한 사람아. 평생을 그렇게 모욕을 받고도 왜….”


 “그 사람이야 어떻게 되던…. 이것만은 어쩔 수 없었네.”


 올드벅이 말했다.


 나는 이때 눈물범벅이 된 채 깨어났던 여동생이 나온 그 꿈이 생각났다. 깨달았다. 나는 이미 죽은 여동생을 또 한 번 못 구해서 운 게 아니었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상실감과 부끄러움 등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몸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나와 올드벅은 나란히 구급차에 후송됐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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