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모로-유령(환영) 편]
"입을 꿰맸으면 좋겠어."
헤로디아 왕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멀리 감옥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듣고 하는 말이었다. 헤로디아에게 요한은 눈엣가시였다. 어째서인지 요한은 다 알고 있었다. 남편 헤롯 왕과 자신 사이 은밀한 부정(不正)을 속속 꿰고 있었다. 요한은 거리낌 없이 폭로하고, 망설임 없이 비난했다. 저 좁은 창살 안에서조차 그러고 있었다. "죽여서라도 입을 막아야 할 텐데." 헤로디아의 혼잣말은 진심이었다.
헤로디아에게는 껄끄러운 과거가 있었다. 원래 헤로디아는 헤롯의 이복동생인 빌립의 아내였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헤롯이 어느 날 남몰래 찾아왔다. "빌립에게 벗어나 내게 오면 부와 권력을 다 주리다." 헤로디아는 그의 꼬드김을 받아들였다. 헤로디아는 망설임 없이 빌립을 버렸다. 얼마 후 시치미를 뚝 떼고는 헤롯과 재혼했다. 헤로디아는 화려한 집과 반짝이는 보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헤롯과 헤로디아는 이 일의 내막을 아는 모든 이를 돈으로 매수했다. 그게 안 통하면 칼과 독약으로 죽여버렸다.
요한이 등장한 건 그쯤이었다. 헤진 낙타 털옷을 걸친 요한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들은 그를 신의 사자(使者) 내지 예언자로 불렀다. 모두가 요한에게 주목했다. 온 백성이 그의 말을 계시처럼 받아들였다. 메뚜기와 들꿀만 먹으며 떠돌던 요한의 발걸음은 왕궁 앞에서 멈췄다. 요한은 그곳에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간결했다. "부정의 포도주를 든 이들은 심판을 받으리라." 그는 헤롯과 헤로디아의 침실이 있는 쪽을 또렷이 노려봤다. 사람들은 술렁였다.
뜨끔한 헤롯과 헤로디아는 요한을 체포했다. 요한은 선동과 혼란 유발 등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 요한은 굴하지 않았다. 그 입만 다물면 풀어주겠다는 회유에도 계속 소리쳤다. 혈육의 아내를 빼앗은 자, 사치에 홀려 남편을 버린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밤새워 저주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지 못했다. 그는 정말 보통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목을 베면 화가 닥칠까 봐 두려웠다. 그런 헤롯을 답답하게 여긴 헤로디아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헤롯의 생일날이었다. "소원을 말하거라. 무엇이든 들어주마." 거나하게 취한 헤롯은 자기 피는 섞이지 않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 공주에게 약속했다. 왕의 생일을 맞아 화려한 춤을 춰준 데 따른 선물이었다. 이렇게까지 큰 보상을 받을 줄 몰랐던 살로메는 당황했다. 헤롯 옆에 앉아있는 어머니 헤로디아만 쳐다봤다.
'요한을, 죽이라고, 해줘.'
헤로디아는 딸을 보며 입 모양을 만들었다. 살로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했다. "요한…. 요한의 머리를 주세요." 예상치 못한 말에 헤롯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요한의 목을 베라. 머리통을 갖고 오거라." 무언가가 복도 바닥에 가차 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받은 은접시에는 요한의 머리가 올려져 있었다. 살로메는 비틀대며 걸었다. 미소를 참고 있는 헤로디아에게 이를 갖다줬다.
성경과 유대 고사기(古事記) 등에는 영악한 헤로디아가 어떻게 요한의 목을 얻게 되는지가 쓰여있다. 소원을 말하라는 왕 앞에 선 어린 딸을 꾀어 끝내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이야기다.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1826~1898)는 살로메가 요한의 목을 얻는 그 순간을 표현했다. 제목은 '유령(환영·The apparition)'이다.
그런데, 모로가 그린 그림은 마태복음에 담긴 이야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건 살로메와 요한이다. 모로는 어머니 말을 잘 듣는 순진한 살로메를 마성의 여인처럼 그렸다. 비단, 보석으로 치장한 살로메는 이국적 장식이 가득한 무대에서 헐벗은 채 섰다. 순결의 상징인 연꽃을 쥐고 있다. 그러고는 잔뜩 욕망하는 표정으로 팔을 뻗고 있다. 피를 철철 흘리며 떠 있는 요한의 유령은 그런 살로메가 혐오스럽다는 듯 싫은 표정을 짓고 있다. 끝내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는 원망, 그럼에도 내 존엄은 훼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저항의 기운도 느껴진다. 살로메 뒤 왕좌에 앉아있는 헤롯은 존재감이 없다. 헤로디아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모로는 왜 헤롯과 헤로디아가 아닌 살로메를 힘줘 그렸을까. 살로메를 이처럼 요염하게, 어이없게 죽은 요한을 이토록 기괴하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로도 알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 헤롯과 헤로디아,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었다. 그러나 모로가 가장 큰 매력을 느낀 이는 살로메였다. 어머니를 닮아 해사했을 외모,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췄을 매혹적인 춤, 앳된 입에서 나오는 충격적인 요구…. 살로메는 찰나의 등장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순수하면서도 도발적인, 고상하면서도 치명적인 그녀는 탐나는 뮤즈였다.
살로메에게 빠진 예술가는 과거에도 많았다.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베노조 고졸리(Benozzo Gozzoli·1421~1497)도 살로메를 주연으로 삼아 그림 '살로메의 춤'을 그렸다. 금발의 살로메가 헤롯 앞에서 춤을 추는 순간, 요한이 처형되는 모습, 살로메가 그의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전하는 장면을 한 화폭에 담았다.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를로 돌치(Carlo Dolci·1616~1686)는 우아한 자태의 살로메가 요한 목이 담긴 은쟁반을 든 모습을 표현했다. 시선 둘 곳을 잃은 살로메의 눈은 불안해보인다. 어서 헤로디아에게 안겨준 후 자리를 뜨고 싶어하는 듯도 하다.
모로는 그런 살로메를 상징주의자의 시선에서 재해석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행한 상징주의는 신화와 전설 등 허구 이야기를 은은한 색채, 장식적인 세부 묘사로 표현하는 화풍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의 반작용으로 등장한 흐름이었다. 환상을 그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있었다. 성(姓)적 로망이었다. 그렇기에 상징주의 회화의 단골 소재는 여러 이야기 속 요부였다. 살롱에 모인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삼손을 꾀어 그의 약점을 들춘 데릴라, 홀로페르네스를 꼬셔 목을 벤 유디트, 현혹의 노래로 뱃사람을 잡아먹은 세이렌 등 이야기에 밤새워 심취했다.
모로는 살로메도 이들 못지 않은 팜 파탈로 다시 창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유럽에서 팽배하던 세기 말 분위기도 모로의 창작욕을 부추겼다. 사람들은 19세기 말에 가까워질수록 더 긴장하고, 더 불안해했다. 살아서 한 세기의 끝을 목도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공포였다. 훗날 데카당스(Décadence) 시대로 칭해지는 그 시절 사람들은 당장의 쾌락에 기대 초조함과 허무함을 떨치려고 했다. 자연스럽게 더 향락적인 예술을 찾았다. 퇴폐미 가득한 악녀가 인기 소재로 떠올랐다. 그렇기에 모로는 망설임 없이 붓을 쥘 수 있었다.
살로메라면 어땠을까. 모로는 그녀에 대한 연작을 그리며 수백번은 되뇐 말이었다. 미인 어머니 밑에서 큰 살로메는 자기도 그녀만큼 아름답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다. 웃음을 흘리며 길고 가는 팔다리만 드러내도 뭇 남성들이 얼굴을 붉힌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런 살로메에게 철인 같은 요한의 등장은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무엇 하나 원하는 게 없는 그마저 홀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요한은 부정한 여자의 딸과는 말도 섞기 싫다며 입을 다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 달콤한 몸짓은 단칼에 거부했을 게 분명하다. 누구든 유혹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한 살로메는 생애 처음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수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식의 비뚤어진 욕망을 품었을 수도 있다.
살로메가 헤롯 앞에서 춤을 추며 그를 홀린 일도 계획된 일이 아닐까. 절대 권력을 쥔 왕을 이용하면 강제로라도 요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모로의 그림 '헤롯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속 살로메는 작정하고 가장 좋은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듯보인다. 은은하게 빛을 받고 있는 그녀는 화려한 장식품으로 가득한 파티장 안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헤롯은 단상 위에 얌전히 앉아있다. 숨막히게 매혹적인 그녀의 움직임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돌처럼 굳어있다. 살로메는 핑그르르 돌면서 한겹씩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렇게 은밀한 속살을 조금씩 내보인다. '문신을 한 살로메'에서 그려진 살로메의 알몸에는 퇴폐미가 느껴지는 문신이 가득하다. 헤롯의 혼을 쏙 빼게 할 비장의 무기였을 터였다.
넋이 나간 헤롯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할 때, 살로메는 짐짓 놀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고는 끔찍하지만 어머니를 위한 일이라는 양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요한을 죽이고 머리를 가질 수 있다면, 자신에게 모욕을 준 그 남자를 영원히 굴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감옥에 있는 살로메'에 있는 살로메는 요한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벽 뒤에서는 사형 집행인이 무릎 꿇은 요한을 처형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중이다.
사실은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다고 가정한 후 모로의 '유령'을 보면 더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제 희대의 요부처럼 그려진 살로메의 모습은 외려 자연스러워보인다. 살로메는 목이 잘린 요한의 유령에 대고 굴복을 요구하고 있다. 내 치명적인 매력에 이제라도 항복하라는 듯 노려보고 있다. 살로메의 어긋난 욕망 탓에 죽은 걸 아는 요한은 그런 그녀가 밉고도 딱하다. 광기 어린 그녀가 한심한 듯 내려다보고 있다. 모로의 그림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들고 있는 살로메' 속 살로메는 드디어 요한의 머리를 쟁취했다. 그녀는 전리품을 든 전사처럼 당당해보인다. "뭘 보세요?" 옆을 돌아보는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당장이라도 이렇게 말할 듯하다. 모로가 재해석한 살로메는 전시장에 걸림과 동시에 반향을 일으켰다. 마성의 여인이 된 그녀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다. 1884년,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는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 입을 통해 이같이 애정과 존경을 표했다.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육욕의 화신, 불멸의 광기를 지닌 여신, 저주받은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여."
모로는 살로메 말고도 여러 여성을 요부로 표현했다. 살로메에 대한 영감을 준 두꺼운 성서는 물론 고대 로마제국의 긴 역사, 그리스 로마 신화 등 복잡하고 장황한 옛이야기까지 섭렵해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가 빚어낸 또 다른 대표적인 요부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 이아손의 연인인 메데이아였다. "세상 동쪽 끝에 있는 황금 양털을 갖고 오면 왕관을 주마." 부당하게 왕위를 꿰찬 삼촌 말에 이아손은 어쩔 수 없이 동방의 나라 콜키스(Colchis)를 찾는다. 이아손은 곧 황금 양털을 본다. 하지만 잠들지 않는 용이 지키는 탓에 챙기지 못한다. 이아손을 딱하게 본 여신 헤라는 콜키스의 공주이자 마녀였던 메데이아를 현혹한다. 이아손을 밑도 끝도 없이 사랑하게 만든다. 이아손은 자신에게 반한 메데이아와 함께 황금 양털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간다. 메데이아는 마법의 약으로 용을 재워버린다. 이아손은 그 틈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양털을 챙긴다. 모로는 '이아손과 메데이아'를 통해 두 사람이 협업하는 그 순간을 그렸다. 이아손은 황금 양털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손을 뻗고 있다. 메데이아는 그 뒤에 섰다. 전리품 따위 관심도 없다는 양 이아손만 은근하게 바라보고 있다.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또 다른 손으로는 마법의 약병을 꼭 쥐고 있다. 유혹의 자세다. 이렇게까지 해준 내게 무한한 사랑으로 보답하라는 듯하다.
모로는 신화 속 괴물인 스핑크스마저 재해석했다. 스핑크스는 여성의 머리, 암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 뱀의 꼬리를 가진 존재였다. 길목에서 마주하는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그녀는 오답을 듣는 즉시 살점을 뜯어먹는 잔혹한 괴생명체였다. 모로의 그림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에서 스핑크스를 단정하게 만 금발 머리에 티끌 없이 흰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인으로 그렸다. 누구도 맞힌 적 없는 문제를 깔끔하게 푼 코린토스(Corinth)의 왕자 오이디푸스에게 푹 빠진 듯 찰싹 붙어있다. 가지말라는 양 애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모로에게는 사체를 쌓아놓고 사는 그런 존재마저 팜 파탈로 만들 수 있는 표현력이 있었다.
1826년 파리의 중산층 집안에서 출생한 모로는 건축가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 밑에서 어릴 적부터 예술을 접했다. 미술에 두각을 보인 모로는 부모의 지원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모로의 스승은 특유의 밀도 높은 표현력을 가진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Francois Edouard Picot·1786~1868)였다. 명문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 다닌 모로의 절친은 관능적인 여성화의 대가 테오도르 샤세리오(Theodore Chassseriau·1819~1856)였다.
1856년, 모로가 제2의 스승처럼 대한 샤세리오가 요절했다. 상실감에 젖은 모로는 그다음 해에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했다. 르네상스 시절 거장들의 작품들도 살펴봤다. 그때가 서른한 살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1490~1576) 등에게 영감을 받은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환상적 이야기와 극적이고 뇌쇄적인 화풍의 결합을 꿈꿨다.
그렇게 2년을 보낸 후 파리에 돌아온 모로는 1864년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로 살롱전에서 메달을 받았다. 정상에 오른 모로는 곧 슬럼프를 겪었다. 작품 발표까지 멈춘 그는 은신과 칩거, 내성과 인내의 기간을 보냈다. 그런 그가 1876년 살롱전에 출품한 그림이 '유령' 등 살로메 연작이었다. 모로는 그녀 덕에 재기에 성공했다. 그림 속 살로메는 요부였지만, 모로에게 살로메는 번아웃의 늪에서 그를 꺼내준 은인이었다.
이후 대중과 평론가의 관심을 몰고다니던 모로는 1880년을 끝으로 살롱전 출품을 멈췄다. 이후 아담과 이브 이래 인간의 역사 전체를 화폭에 담겠다며 이른바 '인류의 생애' 연작 작업에 힘 쏟았다. 하지만 이를 다 그리기에는 너무나 대서사시였다. 결국 미완성에 그쳤다. 그는 작업 도중 평소 관심 많던 렘브란트 반 레인을 연구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나기도 했다.
말년의 모로가 남긴 최후의 대작은 '제우스와 세멜레'였다. "그놈이 정말 제우스가 맞아요? 사칭하는 가짜일지도 모르지요."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유모로 변장해 세멜레를 꼬드긴다. 난봉꾼 제우스와 정을 나누고 있던 세멜레는 이 말에 넘어간다. "올림포스에 있을 때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세요." 제우스에게 세멜레는 요청한다. 당황한 제우스는 결국 제일 빛이 덜 나는 옷, 가장 작은 번개를 챙겨온다. 그럼에도 세멜레는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옷과 번개가 뿜어내는 열기에 불타 죽고 만다. 모로의 그림 속 위엄에 찬 제우스는 감출 수 없는 광채를 뿜고 있다. 각양각색 건축물과 장식품이 올림포스 최고 신의 위세를 더해준다. 제우스 무릎에 놓인 세멜레는 뜨거운 빛을 맞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듯 보인다. 이들 밑에 있는 여러 신과 사람, 반인반수들은 감히 신을 의심하지 말라는 듯 두 눈을 부릅뜬 모습이다. 모로는 구상부터 완성까지 7년의 세월을 쏟아 이 작품을 완성했다.
모로는 1892년부터는 교육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학생으로 다녔던 에콜 데 보자르에 교수로 부임했다. 예순여섯 나이였다. 부드러운 성격의 모로는 제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자신도 개성의 화신이었던 만큼, 학생들도 독자적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그는 상징주의 화가 페르낭 크노프(Fernand Khnopff·1858.9.12~1921), 야수주의 거장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와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등을 가르쳤다. "모로는 우리가 상상하게끔 만들었다." 모로를 존경한 마티스의 평가였다. 모로는 1898년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살던 집은 지금도 모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영원히 남는 그림은 생각과 꿈, 마음으로 만들 수 있다. 손재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곳에서는 그의 철학이 물씬 묻은 유화 850점, 수채화 350점 등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성경
유대 고사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살로메, 오스카 와일드, 소와다리
Gustave Moreau, Carey, Juliet, Paul Holberton Publishing
Gustave Moreau, Mathieu, Pierre-Louis, Penwarden, Charles, ARC E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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