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심연 편]
'잭슨 폴록, 그는 미국에서 현존하는 화가 중 가장 위대한가?'
1949년 8월8일, 미국의 유력 잡지 라이프(Life)는 지면에 이런 기사를 썼다. 그렇게 서른일곱 살의 화가를 한껏 치켜세웠다. 이 매체는 글과 함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의 전신사진도 실었다. 분량도 네 페이지나 할애했다. 한 예술가에 이토록 공을 들인 건 창사 이래 처음이었다. 잡지 속 폴록의 인상은 매서웠다. 날카로운 눈과 퉁명스러운 표정, 탄탄한 체형, 팔짱을 낀 채 다리도 꼬고 있는 자세는 반항아의 표본 같았다. 근육질 마초 내지 카우보이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라이프는 폴록의 사진 옆에 그의 대표작도 같이 첨부했다. 〈No. 17A〉였다. 이 그림은 비딱하게 서있는 터프가이보다 더 강렬했다. 대체 뭘 어떻게 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온갖 색깔이 거미줄 내지 실타래처럼 뒤엉켜있었다. 그나마 존재감을 갖는 건 짐승의 할큄처럼 그어진 흰색 붓질뿐이었다. 라이프의 후광을 업은 폴록은 곧장 미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유명 언론이 작품성을 인정한 최고의 화가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미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폴록의 전시를 주선했다. 빌딩을 몇 채씩 가진 부자들도 그의 그림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됐다. 폴록은 길거리에 가만히 서있지도 못했다. 어딜 가도 그와 악수 한 번 해보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폴록의 얼굴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폴록은 부와 명예를 한 방에 거머쥔 그때에도 여전히 힘들어했고, 변함없이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인기와 관심 따위 즐기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폴록은 공업용 페인트나 잔뜩 챙겨 작업실로 향했다. 안에서는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눈물 섞인 신음과 발길질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는 그렇게 더 나은 회화, 더 파격적인 예술을 고민하고, 실패하고, 다시 연구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처럼 꽉 막힌 사내는 어쩌다 유력 잡지의 눈에 들어온 걸까. 그의 난해한 그림은 뭐가 그렇게 획기적인 걸까. 무엇보다도, 그는 예술의 아이콘이 되고도 왜 미소 한 번 짓지 않았을까.
폴록을 지배하는 건 다름 아닌 불안이었다. 그리고 이 감정은, 그를 평생 초조하게 만든 한편 중단 없는 성장도 거듭 부추겼다.
폴록은 불안 중독자였다.
그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불안을 놓지 않는 사내였다. 마음을 짓누르는 추가 사라지면 새로운 추를 찾아 거기에 또 깔려들어가는 사람이었다. 불안할 게 없으면 그걸로 또 불안해지는 성향의 소유자였다. 폴록은 최고의 순간이 이어지고 있을 때도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만 느꼈다. 겉으로는 거친 면을 보였지만, 뒤에서는 두통약과 진정제에 더해 불면증 약까지 깨먹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초조함에 시달리며 살 운명이었다.
하지만 불안의 화마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 틈에서 피어나는 게 있었다. 그것은 성장과 발전이었다. 폴록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정도면 괜찮다며 주저앉은 적이 없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압박감 탓에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항상 무언가를 시도하고, 실험했다. 뼈를 깎는 고통이 끝없이 달라붙었지만, 이 덕에 매번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맞을 수 있었다. 그에게 불안은 무조건적인 악이 아니었다. 창작을 위한 충실한 뮤즈 역할도 한 셈이었다.
폴록은 1912년 미국 와이오밍주(州) 코디에서 출생했다.
폴록은 어릴 적부터 어수선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측량사였다. 폴록은 그런 아버지의 직업 탓에 미 서부를 함께 전전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사를 이어갔다. 전학을 자주 가야했던 그는 학교생활도, 교우 관계도 바르게 꾸리지 못했다.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을 통보받기 일쑤였다. 부모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꾼이었다. 술을 마셔도 너무 많이 마셨다. 얼큰하게 들어가면 울고 웃으면서 난리를 쳤다. 언젠가 그런 아버지와 이를 참다못한 어머니가 크게 싸웠다. 아버지는 쫓겨나듯 집에서 떠나야 했다.
의기소침한 꼬마였던 폴록은 이 장면도 다 지켜봤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폴록은 방구석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렇게 마음속 혼돈의 씨앗을 열심히 가꿨다. 그것은 야속하리만큼 성실하게 움텄다.
폴록은 1930년 열여덟 살 때 뉴욕에 정착했다.
폴록은 그림을 그리는 형을 따라 곧장 예술을 공부했다. 그는 그 시절 유럽에서 유행한 초현실주의에 눈길을 줬다. 탁 트인 평원의 와이오밍주 출신답게 인디언 미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형형색색 모래를 갖고 표식을 만드는 그 행위에 여운을 느낀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폴록은 과거의 여러 천재 화가처럼 일찍부터 두각을 보이지는 못했다. 되레 열등생에 가까웠다. 다 포기하고 싶을 무렵 그는 가까스로 취업에 성공했다. 그는 연방 정부의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 소속 화가로 출근했다. 이는 경제 대공황 늪에 빠진 미국이 고안한 일종의 실업 대책이었다. 폴록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1896~1974) 밑으로 갔다. 시케이로스는 벽화 전문가였다. 혁명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멕시코에서 온 그는 항적(抗敵)과 투쟁 등 과격한 주제의 대가였다. 폴록은 그에게서 물감을 쏟고 흩뿌리는 격렬한 화풍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폴록은 어떻게든 여러 장르의 그림을 익힐 수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격정적이었던 시케이로스의 특이한 기법도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머릿속에서 마구 섞고 버무렸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하나를 쑥 집어넣고 휘저었다. 어느덧 가지를 쭉쭉 뻗고 있는 혼돈의 감정이었다. 폴록은 이 무렵 이미 알코올 중독자였다. 벌써부터 불안의 열차에 올라탔던 그는, 철길처럼 굽이치고 뒤틀리는 감정선에 시도 때도 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폴록은 어느새 아버지처럼 술꾼이 돼가고 있었다.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든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937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들끓는 증기처럼 부글부글 차오르는 내면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 감정이 한편으로는 외려 삶을 이끌어갈 연료로 활활 타올랐다.
자기 인생이 언제 끝장날지 모른다고 본 폴록은 술병에 더불어 붓과 캔버스도 붙들고 있었다. 폴록은 작업실에 처박힌 채 주체할 수 없는 불안의 마음을 마구 쏟고 흩뿌렸다. 광기에 푹 젖은 채 그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폴록은 1943년 〈벽화〉를 그렸다. 세로 243cm, 가로 604cm의 대작이었다. 폴록은 굵은 붓질로 각양각색의 소용돌이치는 형상을 표현했다. 그것은 전장에서 피어나는 혈풍 같았고, 빙산의 끝단에서 올라오는 칼바람 같은 모습이었다.
전설적인 미술품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Marguerite Guggenheim·1898~1979)이 이 그림으로 자기 집 입구를 장식했다. 폴록은 비로소 스타가 될 준비를 마쳤다.
"끝에 털이 달린 막대기, 붓을 타도하라!"
구겐하임에게 간택 받고도 매번 밤잠을 설친 폴록이 곱씹는 장면이 있었다. 스승 시케이로스가 벌인 펼침막 작업을 도운 순간이었다. 당시 예술계의 급진주의자들은 붓과 캔버스, 유화물감이 중심되는 이젤 회화를 한물 간 관습으로 보고 있었다. 국민을 현혹하는 선전선동용(用) 도구로 전락했다며 깎아내렸다. 이들은 획기적 변화를 이끌 첫걸음이 그리는 방식의 변화에 있다고 여겼다. 물감을 찍고 칠하는 그 전통적인 방식부터 달라져야 모든 게 바뀔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시케이로스 또한 붓질을 탄압하는 내용의 펼침막을 거리낌 없이 만든 것이었다.
'붓을 타도하라, 붓을 타도하라….' 1947년 겨울, 폴록은 시뻘게진 눈으로 또 그림을 그리며 그 구호를 거듭 되새겼다. 폴록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 말에 홀린 듯 돌연 붓을 꽉 쥐었다. 이젤을 걷어차고 캔버스를 눕혀버렸다. 폴록은 붓을 든 채 그 위로 올라가 쪼그려앉았다. 한 방울, 두 방울…. 빳빳한 붓털에 맺힌 페인트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폴록은 다시 한 번 페인트통에 붓을 푹 찍었다. 이번에는 붓을 칼처럼 쥔 채 난도질하듯 휘둘렀다. 후드득 떨어진 페인트는 제멋대로 뻗어갔다. 폴록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고요한 분위기를 깬 건 "이거다!"라는 폴록의 외침이었다. 그간 없던 혁명적인 기법, 추상 표현주의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폴록은 이제 캔버스 위에서 그림을 그렸다.
시작을 위한 스케치는 필요 없었다. 그는 붓을 든 채 춤추듯 날뛰었다. 내면에 둥둥 떠다니는 무거운 감정들을 폭발시키는 데만 집중했다. 1948년, 폴록은 이 방식으로 〈No. 17A〉를 그렸다. 이어 그 무렵 〈No. 1〉을 함께 완성했다. 이 그림도 손바닥 자국이 대놓고 있을 만큼 혼돈 그 자체였다. 그림 자체가 고함을 치는 것 같았다. 주체 할 수 없는 화폭 속 기운은 보는 이 또한 함께 비명을 지르고 싶게 만들었다.
"폴록의 재능은 화산 같다. (…) 예측할 수 없고, 규율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행보에서)광물이 풍부하게 쏟아지고 있다." 당시 비평계의 거물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폴록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도 결별하지 못한 윤곽선마저 없앤, 순도 백퍼센트의 추상만을 갖고 감정을 표현한 혁명을 성공시켰다고 평가했다. 드디어 문화 불모지인 미국에도 조국을 대표할 수 있는 예술가가 생겼다고 극찬했다. 이쯤 〈라이프〉가 폴록에 대해 크게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폴록이 신드롬급 인기를 얻은 데는 또 다른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1950년, 사진 작가 한스 나무트(Hans Namuth·1915~1990)가 폴록을 찾았다. 나무트는 폴록에게 그의 작업 현장을 찍고 싶노라고 했다. 나무트는 얼마간 폴록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가 본 폴록의 모습은 예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폴록은 작업복 따위를 따로 두지 않았다. 굴러다니는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채 캔버스와 마주했다. 그는 바로 그리지도 않았다. 눕혀진 화폭을 한참동안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번개 치듯 갑자기 거침없이 움직였다. 폴록은 때로는 순례길에 오른 종교인처럼 차분하게 움직였고, 때로는 굶주린 짐승처럼 미친듯 날뛰었다.
"(…) 그는 내가 거기게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카메라 셔터의 소리마저 듣지 못하고 있었다. (…) 폴록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움직임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이 모습을 보는 나무트의 회상이었다. 폴록은 연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외려 나무트가 연출을 요청하자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가짜가 아니야!" 나무트의 참견을 참다 못한 폴록이 테이블을 엎으며 소리를 질렀다는 말도 있다. 대중은 날 것 그대로인 폴록의 모습에 또 한 번 열광했다. 거짓이 없다는 걸 안 순간 더욱 반하고 말았다.
자유로운 반항아, 음울하면서도 정열적인 카우보이….
폴록은 어느새 미국의 정신으로 받들어졌다. 당대 미국이 열광하던 배우 제임스 딘과 함께 마초남의 정석으로 자리 잡았다. 폴록은 유명 패션잡지 〈보그〉를 장식했다. 그가 내놓는 그림은 족족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무렵에 선보인 〈No. 31〉은 우주와 은하수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크게 화제몰이를 했다. 흩어진 점들은 별과 행성, 얽히고설킨 선들은 이들의 궤적과 잔상을 떠올리게 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공간감을 안기는 대작이었다. 폴록은 이제 존재 자체로 아이콘이었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입김마저 서리처럼 차가워진다. 하늘에서는 독수리도 휘청이게 하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발밑에서는 녹지 않는 눈더미가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어느새 마음 속 넓게 혼돈의 숲을 가꿔버린 폴록에게 이러한 꼭대기의 한기가 너무도 매섭게 다가왔다. 정점을 찍은 폴록은 그때부터 급격하게 혼미해졌다. 자신의 모든 창작 행위가 획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거듭 휘청였다. 아기새마냥 새로운 걸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평론가들의 모습 또한 부담스러웠다. 폴록은 그쯤부터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폴록의 곁을 평생 지킨 불안은 그가 어떻게든 나아가도록 이끌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무거워진 녀석은 그를 그대로 짓누르려고 하고 있었다. 폴록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폴록은 정신줄을 동여맨 채 1953년에 〈심연〉을 그렸다. 흰색 덩어리는 층층이 쌓인 구름 내지 안개 같았다. 천사나 백조가 흘리고 간 하얀 깃털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결한 흰 형상 사이 피어나는 검은 색채는 그 자체로 깊은 상실감을 줬다. 끝내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공포감도 안겨줬다. 한때 눈부셨던 시절, 그리고 이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려는 내면의 병든 마음을 뜻하는 듯도 했다. 폴록은 이렇듯 그만의 방식대로 구상화(具象畵)와 추상화를 섞는 시도를 이어갔다. 그의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폴록의 발악은 먹히지 않았다.
1956년, 유력 매체 〈타임〉은 폴록을 유명 살인자 '잭 더 리퍼'에 빗대 '잭 더 드리퍼'라고 명명했다. 폴록의 파격 행보가 전통 회화를 죽여버렸다는 뜻도 있었지만, 잭 더 리퍼가 시신을 심하게 훼손했듯 그 또한 도 넘게 회화를 훼손한다는 식의 경멸적 의미도 강했다. 폴록의 영원한 우군을 자처했던 그린버그마저 이제는 그의 그림들이 부자연스럽다고 평가했다. 사실 폴록도 알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손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혁명을 이룰 수 없다는 걸.
폴록은 결국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겨우 거리를 두고 있던 술독에 다시 기어 들어갔다. 머리 끝까지 풍덩 빠진 채 꼬르륵거렸다. 그는 더는 작품활동에 집중하지 못했다. 인터뷰도 죄다 거절하고,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런 폴록의 끝은 허무했다. 〈타임〉에 기사가 실린 그 해 8월11일 밤, 폴록은 만취 상태로 오픈카 운전대를 잡았다. 곧장 액셀을 힘껏 밟았다. 광란의 질주였다. 속도계의 숫자는 폭주하듯 올라갔다. 어느새 시속 120㎞, 140㎞, 160㎞를 오가고 있었다. 폴록은 운전대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 길가의 자작나무를 들이받고 말았다. 폴록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고작 마흔 네 살이었다. 미국의 신화는 그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언론은 천재 화가가 창작에 심취한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식의 서사를 깔았다.
폴록이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삶은, 불안 따위의 감정도 완전히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어쩌면 열정 내지 갈망처럼 이런 부정적 감정들도 연비 좋은 연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시선도 생기게끔 한다. 녀석들이 매번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갇힌 듯한 고통을 안기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게라도 깨어있게는 해준다는 점 또한 되짚도록 해준다. 그러나 직후 끝없는 내리막길을 탄 폴록의 삶은 이와 함께 분명히 알아야 할 점도 강조한다. 다른 것 없이 그 감정들에만 집착하고, 결국 짓눌려 잠식되기 시작하면 그 끝은 얼마나 암울해질 수 있는지를.
〈참고 자료〉
잭슨 폴록, 캐럴라인 랜츠너, 알에이치코리아
발칙한 현대 미술사, 윌 곰퍼츠, 알에이치코리아
잭슨 폴록(J. Pollock)의 '드리핑(dripping)' 작품에서 '대상 a'(object a)와 반복 강박적 이미지 분석, 정수덕, 한국조형교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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