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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Mar 04. 2018

크레셴도 크레셴도 : 안목 높이는 법 16(完)

<1828년 12월 31일>

-1828년 12월 31일     


 예상대로였다. 다음 날 아트파이낸스의 전시회 또한 큰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듀크 미술관 안이 아닌 맞은편 벽면으로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열에 아홉은 넋을 잃은 채 한참을 쳐다보다 미술관도 들어가지 않고 기운 빠진 발걸음으로 온 길을 돌아갔다. 그림에 대고 두 손을 모아 중얼대며 기도를 하는 사람도 보였다. 거인의 재능에 압도된 것이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베이커 씨는 모두에게 미움받는 미치광이였지만, 이번 사태 이후 전문가도 알아주지 못한 비운의 천재 화가가 됐다. 작은 울림은 큰 돌풍이 됐다. 그 기운은 전염병처럼 도시를 장악했다. 테일러 씨마저 자신의 전시를 망치고 있는 이 그림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테일러 씨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서 자신의 두 손바닥을 펼쳐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동공이 잔뜩 확장돼 있었다. 약속한 듯 그 날 오후 쏟아진 비에 그림들은 점차 너덜너덜해지더니, 몇 시간 후 거적이 돼 모두 씻겨 내려갔다. 


 빗방울이 굵어져도 아무도 그림에 감히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미 진흙투성이가 된 그림들을 하나하나 주워들었다. 몇몇 사람들은 빗속에서 나를 붙잡으며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을 질문들을 퍼부었다. 


 “내가 이런 그림을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그렸다면 말일세. 나는 내 인생을 그 자체로 만족했을 것이네.” 


 노라 할멈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있는 힘을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베이커의 마지막 부탁이었다네.” 그날 새벽 간신히 몸을 추스른 노라 할멈은 그 말을 조심스레 내 옆으로 떨구고는 한 발짝 한 발짝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베이커 씨가 애초 왜 나에게 접근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뚜렷하게 잡히는 게 없었다. 이런 일을 터뜨리고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점만 커졌다. 그 화재는 무엇이며, 유유히 사라질 것이면 노라 할멈에게 왜 그런 부탁을 한 것인가. 그리고 부탁의 대상은 왜 내가 아닌 노라 할멈이었는가. 내가 몸져누워있었다고 한들 그런 부탁이야 노라 할멈의 입을 통해서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그의 영감을 일으키는 데 촉매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나를 보며 내 여동생을 떠올렸고, 그림을 그리는 데 이런 부분들을 영감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화상으로 돌아와 비에 젖은 그림들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았다. 


 “날이 추워요. 그렇죠?” 


 지나가 나를 안아줬다. “결국 나는 그 사람과 인사 한 번 제대로 못 했네요.” 그녀가 책상 위에 있는, 이젠 종잇조각에 더 가까운 그림 뭉텅이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제 더는 땡땡이칠 핑계도 없을 텐데, 어쩌시려고요?” 지나가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때쯤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아무래도 베이커 씨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 .”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데 놀랐다. “궁금한 점이 많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가 어쩔 수 없겠다는 표정을 띄우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가실 거죠? 짐은 같이 챙길까요? 그 사람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요?” 


 “당신도 가려고?” 


 “당연하죠.” 


 지나가 오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화상 문만 닫으면 되는 터라 지금 당장 움직여도 나쁘지 않다. 지나가 함께 간다면 되레 큰 활력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둘만의 시간이 적었던 시점에서 다시 소원해진 관계를 풀 수 있는 계기를 하루빨리 만들고 싶기도 했다. 


 “한 달 정도 짐 챙겨서, 시계탑에서 만나기로 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니테일로 묶여있는 한 줄기의 긴 머리가 강아지의 꼬리처럼 흔들린다. 그녀는 습관처럼 블라우스의 주름을 정리한 후, 바로 집에서 짐을 챙겨오겠다며 롱 부츠를 찾아 신었다. 발걸음은 경쾌했다. 


 “무슨 고민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녀가 홱 돌아서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른쪽 어깨에 매달린 그녀의 가방에서 두툼한 노트 몇 권이 보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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