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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집알바생 May 25. 2016

알 수 없는 그 손님의 선택

첫 번째 이야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차가운 물과 얼음들 사이를 비집고 스며드는 에스프레소가 참 예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해주세요.

또렷한 눈매에 앞머리 없는 긴 생머리. 콧날은 길고 웃고 있진 않지만 차갑지 않은 인상. 새초롬한 느낌도 난다.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 여자 손님은 여기 아메리카노가 싱거웠나 보다. 그래도 나름 기본 투샷인데.

평소에 샷 추가 주문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냥 투샷짜리 포터 필터로 에스프레소를 뽑은 후, 샷 글라스에 있는 원액을 절반만 붓고 있는데 그 손님이,


-그거 그냥 다 넣어 주세요.





당황했다.

어차피 남은 샷은 버리니까 나야 상관없지만, 이걸 다 부으면 샷이 총 네 개나 들어가는데... 사약 맛. 상상만 해도 괴로운 맛. 아메리카노를 연하게 마시는 것을 선호하는 나에겐 그런 맛. 무슨 연유로 그분은 아침부터 이 어마어마한 카페인이 필요한 걸까.


-다 넣으면... 샷이 네 개 들어가는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다 넣어 주세요.



그 날 이후, 그 손님은 샷이 네 개나 들어간 씁쓸, 텁텁, 하지만 시원한 아메리카노처럼 나에게 각인되었다. 목소리가 입안을 맴돌며 울리는 느낌이 내 대학 동기를 닮아서 친근한 느낌도 들었다.

사실 나는 손님들을 그리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그 손님이 찾아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를 하면, 더 이상 묻지 않고 샷 네 개를 들이붓는다.


여느 때처럼 적막한 아침 시간, 혼자서 가게를 오픈하고 멍하니 있었다. 이 곳은 테이크아웃 전문점이라 2인용 테이블이 네 개만 배치되어있는 협소한 공간이고, 대부분의 손님들도 커피만 사들고 갈 길 가신다. 명상하기 참 좋달까. 음, 뭐. 빨대나 컵은 얼마나 소진되었나 힐끔 거리는 사이에 그 손님이 왔다. 오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를 하시겠지, 나는 재빠르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습관처럼 포터 필터를 미리 손에 쥐고,


-안녕하세요. 주문 도와드릴게요.

-아이스 초코 주세요.





초코요? 초콜렛(CHOCOLATE)?

혼란의 순간. 미리 포터 필터를 쥐고 있던 왼손이 민망해했다.


왜 오늘은 그 씁쓸함의 끝을 달리는 샷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거죠? 심지어 초코맛 음료는 그 쓰디쓴 탄 맛과는 대척점에 있잖아요... 아닌가. 비슷한가. 흡연자 친구가 담배를 피울 때 아메리카노와 초코칩 쿠키가 당긴다고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건 좀 다른 상황인 것 같기도 하고...


평소와 다른 선택지를 듣게 되어 꽤나 당황스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유를 물어보기도 뭐한 그런... 묘한 상황. 일단 하던 대로 해야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치는 것이 내 표정으로 마구 삐져나올까 봐, 황급히 결제를 하고 뒤돌아서 음료를 제조했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생각을 하자. 웃는 얼굴.

그렇게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아이스 초코맛 음료 한 잔을 그 손님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나도 그렇다. 손님일 때.

집 근처 유일한 단골 카페에 갈 때면 거의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헤이즐넛 시럽을 추가해 마신다. 그러다가 배를 든든하게 만들고 싶은 날에는 고구마라떼를 시키기도 한다. 또 카페에 가고 싶은데 그다지 마시고 싶은 게 없는 날이면 탄산수를, 이유 없는 포근함을 느끼고 싶은 날은 아이스크림을 시키고 그러지 않는가? 나도.

반대 입장이 되면 왜 다 잊어버리는 걸까.

대학생 과외 선생님일 때, 학생들은 이해 안 가는 것들 투성이다. 왜 이 쉬운걸 어려워하는지. 숙제는 왜 또 하지 않는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또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나도 분명 그랬으면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손님들은 알 수 없는 행동들을 한다. 메뉴판을 보며 이것저것 물어본 뒤 정작 주문하는 음료는 다른 거. 눈 앞에 쓰레기통이 있지만 찾지 못하는. 영수증 종이를 가만두지 않는.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는데. 와중에 문득 엄마가 되면 보일 나의 딸내미 노릇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손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만 할 뿐, 초코맛 음료는 더 이상 시키지 않고 있다. 역시나 입맛에 안 맞았는지 아니면 당황해서 흠칫한 나의 표정을 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신 그 긴 머리를 단발로 싹둑 자르셨다. 약간의 컬이 들어간 풍성한 단발이었는데, 정말 잘 어울렸다. 선선한 날씨에 살랑살랑 흩날리면 분위기가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머리 자르셨네요!' 하며 말을 걸기도 애매한 또 그런 상황. 나는 그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그 단골 카페에 가던 날, 괜스레 설렜던 기분만 다시 떠올려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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