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야기
한 차례에 손님 폭풍이 지나가고, 다시 쓸쓸히 매장을 지키던 나에게 가벼운 시련이 찾아왔다.
날씨가 아직 풀리지 않아 동복 교복을 입고 있던, 앞머리가 단정하게 내려진 한 남고생의 주문. 사실 교복을 입은 손님은 처음 본다. 내가 근무하는 시간은 보통 학생들이 학교에 가있는 시간이기에.
아무튼 14잔이라니! 한 번에 혼자 8잔까지는 만들어봤는데... 나름 아메리카노로 통일되었으니까 괜찮아.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여리여리한 체구에 선한 눈매가 강아지를 닮은 그는 과연 혼자서 음료를 다 들고 갈 수 있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1-2분 정도.
머신에서 에스프레소 투샷 뽑는데 대략 25초가 걸리니까... 14잔에 10분 도전! 그렇게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혼자만의 도전을 시작했다.
글라인더로 원두를 평소보다 더 많이 갈아놓고, 머신이 샷을 뽑는 동안 신속하게 컵에 얼음과 물을 채워 놓는다. 그치만 또 너무 조급하지 말 것. 조급한 마음은 오히려 손의 악력 기능을 저하시켜서 음료를 놓칠 수 있다. 조급한 마음 때문에 아이스 그린티 라떼를 바닥에 엎고, 바닥과 내 운동화가 온통 슈렉 색으로 물들었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또 차분히.
완성된 아이스 아메리카노들이 차곡차곡 비좁은 픽업대를 채워가고, 나는 이제 음료 14잔을 담을 캐리어 또한 조립하기 시작했다. 2구짜리를 두 개씩 합친 4구 캐리어 총.... 4개! 4잔, 3잔 그리고 4잔 3잔씩 담으면 되겠다. 비닐팩도 4개 필요하겠다. 캐리어가 아이스 음료들의 무게를 버티도록 도와줄. 머리 속으로 해야 할 일들을 조용히 계산해보며 외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순간 나는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추었고, 동시에 나의 도전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 손님은 가방을 뒤적거려 준비해 온 손바닥 크기의 하늘색 포스트잇을 꺼냈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살짝 훔쳐보니, 그 포스트잇 상단에는 "To. 00" 이런 식으로 사람들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 손님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단지 나는 캐리어에 아직 넣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들에서 홀더를 분리하여 손님 앞에 놓았다.
그 손님은 음료에 쪽지를 붙이고, 나는 쪽지가 붙은 음료에 다시 홀더를 끼워 캐리어에 넣는, 그렇게 묵묵히 각자의 할 일을 해나갔다. 깜짝 이벤트를 하려는 사람 치고 그 손님은 매우 차분해 보였고, 나는 여전히 그 손님이 음료 14잔을 혼자 다 들고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걱정했다. 하지만 그 손님은 씩씩하게 양손에 7개씩 들고나가서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유유히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다시 한가로운 시간, 페이스북에서 접한 만우절 할인 이벤트 "교복 입고 영화관에 오면 학생 할인!".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이 스쳐갔다. 또 대학 새내기 시절에 했던 '만우절 교복 DAY' 도.
그는 다시 오지 않았고, 결국 진실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부러운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