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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집알바생 Apr 03. 2017

그 남고생 손님의 하루

세 번째 이야기

활짝 열려있는 카페 문이 손님들을 항상 반갑게 맞이한다.


한 차례에 손님 폭풍이 지나가고, 다시 쓸쓸히 매장을 지키던 나에게 가벼운 시련이 찾아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14잔!!!!!!!!!!!!!!



날씨가 아직 풀리지 않아 동복 교복을 입고 있던, 앞머리가 단정하게 내려진 한 남고생의 주문. 사실 교복을 입은 손님은 처음 본다. 내가 근무하는 시간은 보통 학생들이 학교에 가있는 시간이기에.

아무튼 14잔이라니! 한 번에 혼자 8잔까지는 만들어봤는데... 나름 아메리카노로 통일되었으니까 괜찮아.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여리여리한 체구에 선한 눈매가 강아지를 닮은 그는 과연 혼자서 음료를 다 들고 갈 수 있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1-2분 정도.

머신에서 에스프레소 투샷 뽑는데 대략 25초가 걸리니까... 14잔에 10분 도전! 그렇게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혼자만의 도전을 시작했다.

글라인더로 원두를 평소보다 더 많이 갈아놓고, 머신이 샷을 뽑는 동안 신속하게 컵에 얼음과 물을 채워 놓는다. 그치만 또 너무 조급하지 말 것. 조급한 마음은 오히려 손의 악력 기능을 저하시켜서 음료를 놓칠 수 있다. 조급한 마음 때문에 아이스 그린티 라떼를 바닥에 엎고, 바닥과 내 운동화가 온통 슈렉 색으로 물들었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또 차분히.

 

완성된 아이스 아메리카노들이 차곡차곡 비좁은 픽업대를 채워가고, 나는 이제 음료 14잔을 담을 캐리어 또한 조립하기 시작했다. 2구짜리를 두 개씩 합친 4구 캐리어 총.... 4개! 4잔, 3잔 그리고 4잔 3잔씩 담으면 되겠다. 비닐팩도 4개 필요하겠다. 캐리어가 아이스 음료들의 무게를 버티도록 도와줄. 머리 속으로 해야 할 일들을 조용히 계산해보며 외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갑자기 그 손님이 캐리어에서 음료들을 다시 다 꺼내고, 서툴게 컵홀더들을 분리하는 것이다.





어라?

순간 나는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추었고, 동시에 나의 도전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 손님은 가방을 뒤적거려 준비해 온 손바닥 크기의 하늘색 포스트잇을 꺼냈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살짝 훔쳐보니, 그 포스트잇 상단에는 "To. 00" 이런 식으로 사람들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아하! 쪽지? 오늘 무슨 특별한 날인건가? 반 친구들한테 깜짝 선물을 주려는 건가. 귀엽다. 친구들이 좋아하겠네. 그런데 왜? 전학이라도 가는 건가. 요즘 고등학생들은 아메리카노를 잘 마시나 보네. 나는 너무 쓰고 맛없어서 재수생 때 겨우 시작했는데...

이런저런 쓸데없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 손님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단지 나는 캐리어에 아직 넣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들에서 홀더를 분리하여 손님 앞에 놓았다.



-아, 감사합니다.



그 손님은 음료에 쪽지를 붙이고, 나는 쪽지가 붙은 음료에 다시 홀더를 끼워 캐리어에 넣는, 그렇게 묵묵히 각자의 할 일을 해나갔다. 깜짝 이벤트를 하려는 사람 치고 그 손님은 매우 차분해 보였고, 나는 여전히 그 손님이 음료 14잔을 혼자 다 들고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걱정했다. 하지만 그 손님은 씩씩하게 양손에 7개씩 들고나가서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유유히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교복이라니. 반가운 교복.

나는 그저, 그 손님이 학생이라는 사실이 부러웠다.

대략 5년 또는 그 이상 전에 나도 교복을 입는 나이였다. 매일 획일화된 교복을 입는 것이 너무 싫고 지겨웠다. 심지어 교복이 너무 예쁘다고, 교복을 입을 수 있어서 부럽다는 어른들의 반응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복장 문제로 선생님께 혼나고 벌점 받는 일은 더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당시에 내가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 가방과 신발이었던 것 같다. 특히 중학교 2학년 때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고 싶어서 열과 성을 다했었고, 비비드한 청록색 키플링 가방과 밤색 바탕에 로고가 아이스 블루 색인 아디다스 운동화를 사달라고 엄마를 졸랐던 기억도 난다.


웃긴 건, 아직도 그때의 청록색 배낭이 있긴 한데 맬 수가 없다. 어느새 나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색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옷장을 살펴봐도 회색, 검은색처럼 칙칙한 무채색 투성이다. 나는 분명 남들과 다르고 싶어서 안달 났던 사람이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최대한 비슷해지려고 노력하는, 노력해야 하는 보통의 존재일 뿐이다.




다시 한가로운 시간, 페이스북에서 접한 만우절 할인 이벤트 "교복 입고 영화관에 오면 학생 할인!".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이 스쳐갔다. 또 대학 새내기 시절에 했던 '만우절 교복 DAY' 도.

그는 어쩌면 고등학생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교복을 꺼내 입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다시 오지 않았고, 결국 진실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부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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