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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GAZINE JEBI Jun 20. 2024

나는 지겹도록 자유로웠다

아베 코보가 전하는 주체성과 자유에 관한 이야기

따스한 봄을 느낀 건 오직 며칠뿐. 세상이  금방 여름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선 벌써 올해가 많이 지났구나 뜨끔한다.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지는 요즈음, 나는 왜 바깥 세상의 속도에 맞춰 애써 따라가야 하는지, 왜 하루하루를 서두르며 사는지 의문이 든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생각들이 흩어져가는 일이 요즘 특히 무섭다. 나를 잃고 다른 사람 혹은 이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내가 변형되어 간다면 나의 본체는 어디로 도망가는 걸까 상상해본다. 내 마음 깊숙한 칠흑 같은 바다에 잠겨 누가 깨워줄 때까지 가라앉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 머릿속에 편재하는 감정에서 색이 사라져 버리는 걸까… 나의 본체가 어떠한 중력으로 인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두려운 오늘날이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주체성을 가지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전하고자 한 단편 소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의 근대문학 작가 중에서도 유명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아베 코보(安部公房)는 인간의 부조리한 부분에 대해서 작가 특유의 기괴한 표현들로 많은 글을 써왔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The Grinning Moon (笑う月)에 수록된 ’가방(鞄)‘에서도 그러한 기괴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필자가 고등학생 시절 가장 인상깊게 읽은 단편소설 중 하나이다. 아쉽게도 한국어 번역판이 없어서 어설픈 실력이지만 번역을 해보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방이 어떤 상징적 기능을 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란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각자가 지닌 무게를 잠깐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방 鞄


빗속을 젖으며 그대로 막연하게 마를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는 느낌의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게다가 눈가가 밝고, 제법 솔직한 인상을 주는 청년이 나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신문의 구인광고를 보았던 것이었다.


그렇군.. 구인 광고를 낸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광고라는 것이 하여튼 반년이나 지난 일이란  말이다. 새삼스레 뻔뻔하게 지원하고 온다는 건 아무리 그래도 비상식적인 건 아닌가. 마치 뽑히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 지원하기를 기다린 듯 말하는 짓과 다름없는 것 아닌가.


어처구니없어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곁눈으로

“역시나 안 됐군요”. 라며 오히려 안도한 듯 시름을 더는 느낌으로, 나타났을 때와 같은 당돌함으로 돌아드는 것이다. 얼버무리며 나는 무심결 허둥지둥 그를 붙잡았다.


“뭐, 기다려봐요. 나도 고집부리는 게 마땅하지. 왜 반년이나 전에 올린 구인 광고를 이제 와서 지원할 생각이 든 건지. 그 부분을 납득가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네. 납득만 할 수만 있으면 돼요. 마침 빈자리가 나서 새로 보충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였어서 고려할 여지는 있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된통 고민한 터에 일종의 소거법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어코 여기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셈이예요”.

말투에 따라서 몹시 간보기가 될 수도 있는 말을 청년은 티 없이 말하며 나도 묘하게 꾸밈없는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봐요”.


“아마도 이 가방 때문이겠지요”. 라며 그는 발밑에 놓은, 일을 구하기 위해 들고 다니기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갓난아이 시체라면 무리하면 세 채 정도 들이밀 수 있을 것 같은, 너무나도 큰 가방에 시선을 떨어뜨리며  “제 체력과의 균형이 너무나 잘 잡혀 있는 거예요. 그냥 걷기에 편하게 들 수 있는 건데, 잠깐이라도 가파른 언덕이나 계단이 있는 길을 걷게 되면, 이제 안 되더라고요. 덕분에 갈 수 있는 길이 저절로 제한이 된다는 것이란 셈이지요. 가방 무게가 저의 갈길을 정해버리는 겁니다.”


나는 살짝 한풀 꺾여 “그럼 가방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꼭 우리 회사가 아니어도 괜찮았다는 것이겠군”.

“가방에서 손을 놓다니, 그런 있을 수 없는 가설을 세워 봐도 의미 없지 않겠습니까 ”.

“손에서 놓았다고 해서 따로 폭발하는 것도 아니잖나”.

“물론입니다. 보세요, 지금도 손에서 잘 떼고 바닥에 놓고 있잖아요”.

“이해가 안 가네. 왜 그런 힘을 쓰면서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하는지…”.

“힘 같은 거 안 쓰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멈추라고 하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거라서 멈추지 않는 겁니다. 억지로 이런 바보같은 짓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만약 일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

“또다시 새삼스레 일을 부탁드리고자 방문하겠죠. 지형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한…”.

“그런데 자네 체력에 변화가 생기거나 가방 무게에 변화가 생겨서 도무지 못 걷게 되거나 택지 조성으로 새로운 길을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저를 뽑기 싫으세요”.

“가능성을 논하는 거뿐이지. 자네도 더욱 자유로운 입장에서 일을 구할 수 있으면 그만한 게 없잖아”.

“이 가방에 대해선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

“그렇다면 잠깐동안 맡아봐줄까”.

“아닙니다. 그런 뻔뻔한 일…”.


“안엔 뭐가 들어있나”.

“대단한 것들은 아닙니다”.

“말하면 안 되는 것들인가”.

“재미없는 것들뿐입니다”.

“금액으로 따지면 얼마 정도 되는데”.

“특별히 귀중품이라고 해서 항상 갖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네는 음, 힘이 좋은 편도 아닌 것 같고 소매치기나 강도한테 찍히면 속수무책이겠지”.

청년은 작게 웃었다. 나의 이마에 뚫린 구멍을 통해 어딘가 먼 풍경을 보고있는 듯한 노련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웃기만 하는 것뿐, 따로 대답은 안 했다.


“ 뭐, 괜찮네”. 나도 못지않게 웃음소리를 내며 이마에 손을 대며 그의 시선을 돌리고

“꼭 설파 당한 건 아니지만, 자네 입장도 살포시 이해가는 것 같네. 일단 일하는 걸로 해요. 근데  그 가방은 참으로 커. 자네를 뽑아도 가방을 뽑은 건 아니니까 사무실에 들고오는 거는 자제해줬으면 좋겠네. 그 요건으로 괜찮으면, 오늘부터 일을 시작해줬으면 하는데 어떤가”.

“괜찮습니다”.


“근무 중, 가방은 어디에다 놓을 건가”.

“하숙집이 정해지면 거기에 놓고 오겠습니다”.

“감당할 수 있겠나”.

“무슨 뜻입니까”.

“하숙집에서 여기까지 가방없이 올 수 있냐는 말이네. 가뿐해져서 중간에 빠져나가거나 하지 않겠나“.

“하숙집과 사무실 거리는 길이라고 할 수 없어요”.


청년은 이제서야 표정에 맞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며 나도 천천히 어깨의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는 중개인을 전화로 소개해줬더니 그는 곧바로 방을 보러 나섰다. 매우 자연스럽게, 당연한 듯한 흐름으로, 나중엔 그 가방이 남겨졌다.


생각없이 가방을 들어보았다. 묵직하게 팔에 힘이 들어갔다. 힘은 들어갔지만 들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한 번 두, 세 걸음 걸어보았다. 더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동안 걷고 있으면 역시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 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갑자기 허리뼈 사이에 등뼈가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되면 이젠 한 걸음도 못 간다. 정신을 차리다보니 어느새 나는 사무실을 나와 가파른 오르막길에 접어들어 있었다. 방향을 바꾸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대로 사무실에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마음대로 잘 안 된다. 아무리 가는 길을 떠올려 보아도 평소에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던 언덕이나 돌계단에 가로막히는 바람에 갈가리 끊겨서 쓸모없게 되버린다. 어쩔 수 없이 무작위로 가볼 수밖에 없었다. 머지 않아, 내가 어디를 가고있는지 모호해졌다.


딱히 불안하지는 않았다. 가방이 나를 잘 이끌어가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없이 어디까지나 그냥 걷기만 하면 됐다. 고를 길이 없으면 망설일 일조차 없다. 나는 지겹도록 자유로웠다.









아베 코보의 주요 작품들


S・카르마씨의 범죄 (1951)

벽 (1951)

모래의 여자 (1962)

타인의 얼굴 (1964)

불타버린 지도 (1967)

상자 인간 (1973)

The Grinning Moon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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