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ma Cacheuta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가장 좋아하던 수업은 지리다.
특히 2학기 때 배웠던 세계지리.
지리 사지선다 시험문제에 자주 출제되던 문제가 기억난다.
미국, 호주, 남미, 유럽에 가나다라 표시.
이중 '팜파스 대평원'은?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땅덩어리를 가진 아르헨티나.
그 커다란 땅이 대부분 비옥하기에,
한때 세계 5대 부국에 들었던 나라다.
2016년 노동절 주말,
'끝이 보이지 않는' 팜파스를 질주했던 그 행운(?)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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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도사 첫 여행시, 문전박대당했던 안데스 골짜기에 위치한
온천 호텔 사이트를 방문.
주말에 빈방이 2개가 보인다.
바로 ‘클릭’
‘Hotel Terma Cacheuta’
2016년 4월 30일 토요일
산티아고와 멘도사 사이 안데스 중턱에 위치한, 총 객실 16개뿐인 작은 온천호텔로 떠난다.
알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다.
이번에는 새벽 5시에 출발.
어둠 속에 달려갔지만,
초행길보다는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국경 도착쯤 날이 밝는다.
수천 미터 고도에서 보는 일출은 경이롭다.
아침 햇살이 만년설에 반사되며 만들어 내는 신비한 빛이다.
지난번엔 국경 통과 시간만 거의 4시간이었는데…
이번엔 우리 앞에 차량 2대만 대기중.
이제 완만한 내리막 경사길이다.
좌우로 색색 무지개떡같은 지층이 보이고..
2년 전 도원이가 큰 일 해결했던 곳이 어디쯤이었더라?
벌써 흔적도 없이 미생물 먹이가 되었겠지만,
대충 이쯤이라며 장소를 발견하고 낄낄거린다.
11시 반경 Lujan de Cuyo 에 도착.
멘도사 바로 밑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아르헨티나 간판 와이너리들이 근방에 위치한다.
일단 호텔에 들어가면 내일 돌아갈 때까지 밖으로 나올 일은 없을 듯.
아직 체크인 시간은 남았고,
‘말벡’ 좀 사볼까 하고 가까이 위치한 Norton, Terraza 와이너리를 방문.
처음 들른 Norton.
몇병 들고 계산대 섰는데...
카드 기계가 작동이 안되서, 현금만 받는단다.
달러도 안 받는다 하고..ㅠㅠ
Terrazas는 입구 경비직원이 전시장까지 안내를 해준다.
판매직원이 없다. ㅠㅠ
무전기를 연결해 확인하더니, 판매 직원이 한 시간쯤 후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비수기 + 노동절 전날 토요일.
음… 상황이 그렇긴 하다.
와인 구매는 포기.
1시쯤 호텔에 도착하니,
막 점심 뷔페가 차려지고 있다.
테이블마다 방호수 표식이 세워져 있다.
우리 테이블로 안내받는다.
야채, 샐러드 종류는 풍족하게 차려져 있는 반면,
도원이 성주가 기대했던 고기는 종류도 양도 심플하다.
그래도 디저트 포함 다들 세 번 이상씩 담아와 먹는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간다.
조금 낡아 보이긴 하지만, 깔끔하다.
방에서 바라보는 안데스 풍광도 멋지다.
수영복 갈아입고 온천탕으로.
홈페이지에 나온 꼭 그대로지만,
실제 노천탕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다.
멀리 보이는 안데스 봉우리.
절벽 사이를 흐르는 강물 바로 옆에 위치한 노천탕.
대략 크고 작은 탕이 10개 정도.
아래쪽 탕으로 내려올수록 온천수 온도는 낮아진다.
호텔 투숙객, 그리고 당일 투어를 온 관광객 포함,
온천 즐기는 사람들은 20여 명 정도.
남미 사람들은 뜨거운 물에 못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우리랑 별반 차이도 없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6시가 다 돼서야 탕을 나온다.
잠시 졸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3가지 저녁 메뉴 옵션을 알려주고, 선택을 묻는다.
점심때 앉았던 똑같은 테이블에 우리 자리가 세팅되어 있다.
적당한 수준, 무난한 맛...
Tv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는 깊은 안데스 골짜기.
다른 대안이 없기도 하지만,
도원이와 성주는 오랜만에 탁구와 당구를 즐긴다.
우리 부부는 그 옆에 앉아 아르헨티나 맥주 한잔 홀짝이며
아이들 노는 보습을 바라본다.
놀러 와서도 새벽에 눈을 뜬다.
아직 동트기엔 한참 이른 시간이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올라오는 온천수 김을 보면서 한동안 창가에 앉아있는다.
참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러면서도 그 전주 신문지상을 덮었던
회사 뉴스로 한쪽 마음은 무겁다.
이제 막 아침 식사 테이블이 차려지는 식당으로 침입한다
늘 그렇듯, 어딜가던지 아침식당은 우리가 첫 손님이다..
식사를 끝낼 때쯤 다른 투숙객들이 하나둘 내려온다.
체크아웃 시간을 확인하고,
남자 셋은 한번 더 온천욕을 즐긴다.
아무도 없는 우리들만의 넓은 전용 탕.
엄마는 잠시 셀카놀이.
1박 2일 크게 아쉬움도 없고, 부족함도 없다.
11시쯤 체크아웃을 하고, 집으로 향한다.
Uspallata. 이름 참 어렵다.
멘도사와 국경 중간쯤 위치한 자그만 마을에 도착.
아르헨티나 아사도로 점심을 해결하고 국경을 향해 달린다.
Uspallata를 막 벗어나는데, 경찰이 막아서 있다.
살짝 불안한 마음…
앞차가 뒷좌석에 있는 체인을 보여주고 출발한다.
‘어라, 위에 눈이 와서 체인이 없으면 안 보내 주는갑다…
체인을 어디서 사야 하나...’
이런 청천벽력이…
지난밤 눈으로 국경이 폐쇄되었단다.
내일 아침 8시경에 다시 열릴 것이란다.
겨울철이 되려면 앞으로 한두달 남았기에
이런 상황은 전혀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앞서 통과시켜준 차량에 대해 물으니, 국경전까지 가는 차들이란다.
와이프 얼굴엔 안데스 봉우리에 내린 먹구름보다 더 짙은 그늘이 보이고,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아이들은 그저 어리둥절 하다.
어디 인터넷이 접속되는 커피숍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일요일이자 노동절이라고 다들 문을 닫았다.
혹시 해서 두 곳 규모가 있어 보이는 호텔을 찾아간다.
방 없단다.
로비에서 인터넷이라도 연결해 보려고 했지만,
다들 wifi도 없다. ㅠㅠ.
국경 가는 방향으로 다시 가본다.
이번엔 다른 경찰이 서있다.
더 난감해진다.
내일이 아니라 모레, 그 이상으로 국경 폐쇄가 지속될 수 있단다.
이곳에서 교통통제중인 경찰하고 이야기 해봐야
명확한 답 얻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선다.
그저 온천놀러와 토요일 하룻밤 자고 돌아갈 생각에
핸드폰 로밍도 안해온 상태인데..
경찰서를 직접 찾아가 본다.
당직 근무 중인 경찰 말이 일단 국경이 닫히게 되면 최소 이삼일은 다시 열리기 어렵다 한다.
어쨌든 더 정확한 내용은 Gendarmerie 사무실 (국경수비대)을 가보라고 위치를 알려준다.
국경수비대를 찾아간다.
이번엔 낙담한 가족은 두고 혼자 들어간다.
내일 월요일 저녁까지는 일단 무조건 폐쇄된다는 칠레에서 날아온 팩스 공문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 쪽은 전혀 문제가 없단다.
이 국경 폐쇄 조치는 국경을 넘어 칠레 쪽에서 결정했단다.
떠올려 보니,
칠레쪽은 한계령 구불구불 고개 10배쯤 되는 경사와 굽이길 이다.
"그럼, 화요일 오전에는 분명히 개통이 되는지요?"
그때 가서 상황을 볼 수밖에 없다는 답변.
오늘내일 중으로 눈이 더 올 수도 있고, 기상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들다는 거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다...'
그럼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국경은 어딘가요?
북쪽으로도 대충 10시간 이내 국경은 현재 다 폐쇄되었고,
사실 북으로 올라 갈수록 안데스 산맥이 점점 더 높아진단다.
북쪽 국경 통과지역들은 4500m대에 위치해서 더 어렵단다. ㅠㅠ.
남쪽으로는 Pino hachado라는 곳이 열려 있지만,
직선거리로도 무려 1000km 정도 거리라고 친절히 설명해준다.
혹시라도 그곳으로 향한다면, 안데스를 끼고 바로 내려가는 40번 국도보다는,
조금 돌더라도 네우켄이라는 도시를 경유해서 가라고 조언해준다.
도로 상태가 훨씬 좋단다.
멘도사 공항에서 출발하는 칠레행 비행 편에 대해서 문의해본다.
국경경비대는 항공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차로 돌아와 가족회의.
1000 km 이상 남으로 달려 내려간 후에,
또 1000km 이상 북으로 올라오는 것은 일단 고려않는다.
멘도사 공항으로 달려서 비행기표를 알아보기로 한다.
만약 오늘 저녁표가 있다면, 차를 공항에 두고 비행기를 타고 칠레로 간다.
다음 주말 내가 혼자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차를 끌고 가면 된다.
Uspallata라는 작은 마을에서
카페 찾다가.. 호텔 찾다가.. 경찰서 찾다.. 국경 수비대 찾다…
벌써 시간이 한참 지나서, 오후 3시가 훌쩍 넘었다.
이제 상황 파악은 되었고, 방향은 정해졌다.
핸드폰 로밍이 없으니, 차를 타고 가면서 알아볼 방도는 없다.
그저 비행기표가 있기만을 기대하며 다시 멘도사 쪽으로 달린다.
5시경 공항 도착.
LATAM 항공과 Aero Argentina 두 항공사가 있다. 와이프와 한쪽씩 나누어 줄을 선다.
Aero Argentina는 아르헨티나 국내선 노선만 운영한단다.
유일한 희망은 LATAM.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 뜨는 산티아고행 오늘 비행기는
30분전 이미 떠났다. ㅠㅠ.
공항 커피숍에 앉아 wifi접속을 한다.
이리저리 칠레 지인들에게 카톡을 통해 도움을 구한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은 없다 ㅠㅠ
인터넷으로 내일 표를 알아본다.
헉.. 평소 150-250불 정도 하는 편도표가 거의 천불이다.
넷이면 4천 불.. 항공사는 독점의 지위를 아주 만끽하고 있다.
'그럼, 반대방향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날아가서 그곳서 산티아고 행 비행기를 타는 것은 어떨까?'
항공사는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있다...
역시 천 불대다...
눈이 와서 국경이 폐쇄되는 순간,
항공사 프라이싱 시스템은 이곳에 갇힌 칠레 관광객 주머니를 털어버릴 태세로 바로 전환한 거다.
'멘도사 아무 호텔이라도 가서 하루 이틀 기다려 봐야 하나?'
특별한 일 없이, 막연히 기다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 없다.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고, 노트북도 안들고 왔고,
로밍 안된 전화기는 장님이나 매한가지다.
와이프는 내 회사일은 뒷전이다.
애들 학교 하루 빠지면 곧 세상이 무너지는 거다.
아까 국경수비대에서는 심각히 듣지 않았지만,
Googlemap을 통해 남쪽 국경까지 가는길을 검색한다.
그 국경 이름이 모라 했더라...?
Pino... Ha..cha..do.. 간신히 찾는다.
'Neuquen으로 가라고 했었지?'
'내가 길을 찾아갈 수는 있는 건가?'
'이정표는 있겠지?'
'졸음을 참고 밤새 운전을 할 수는 있나?'
'혹 밤새 눈이 더와서 Pino Hachado 국경도 막히는 건 아니겠지...?
정상적이라면 지금쯤은 칠레 집에 도착할 시간인데,
아직 어찌할지 갈피도 못잡고 있다.
와이프와 최종 상의.
이대로 기다리면 아무리 빨라도 화요일에 국경이 열릴 것이고...
지금 국경에 대기 중인 화물차, 컨테이너 트럭을 감안하면,
국경이 열린 후에도 여러 시간 지연될 터...
최고로 상황이 좋아도 수요일쯤 칠레에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가 될지 기약조차 힘들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멘도사 시내로 간다.
Santander 은행을 찾아서, 자동지급기에서 아르헨티나 페소를 찾는다.
저녁값, 주유비로 현금이 필요하다.
노동절이자 일요일 저녁.
도심 한복판에도 열린 식당이 몇 안된다.
피자, 스파게티를 주문한다.
난 평소 안마시던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만 한잔 마신다.
식당 wifi로 Googlemap을 down 받는다.
Googlemap은 Pino Hachado 국경까지
죽 내려가는 40번 국도를 1순위로 안내한다.
거리는 150km 정도 짧고,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먼저 도착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아까 국경수비대에서 들었던 말이 자꾸 신경 쓰인다.
Neuquen 쪽으로 가라고 했었다.
이유는 '길이 좋다!!'
Googlemap을 믿어야 하나?
아까 국경수비대 아저씨 말을 믿어야 하나?
남미 살면서 한국 다녀올 때 비행을 기억해 보면,
마지막 한두 시간으로 완전히 진이 빠진다.
아마 내일 아침 국경 도착 즈음,
이 2시간이 죽도록 괴로울지 모르겠다.
구글이 알려주는 짧은 길로 갈까...?
그땐 건성으로 들었지만...
국경수비대 아저씨 그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Pino Hachado로 가게 되면, 꼭 네우켄을 거치는 길로 가, 그쪽이 길이 훨씬 좋아..."
'그래! 믿어보자...'
Neuquen을 거쳐가는 길을 택한다.
San Rafael- General Alvear - Santa Isabel - 25 de Mayo - Neuquen
Off line Googlemap을 다운로드한다.
아이들은 태평이다.
피자에 스파게티 잘도 드신다..ㅠㅠ
저녁 9시. 드디어 출발.
무슨 전쟁터 나가는 심경이다.
이래서 시작이 반이라 하는가 보다.
조금전까지도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은 가신다.
고민할때가 어렵지...
결정을 내렸으니,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된다.
국경이 모레 열릴지, 글피 열릴지, 일주일 후에 열릴지...
상관할 바 없고, 걱정할 필요 없다.
달릴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우린 점점 더 집에 가까워지는 거다.
시내를 벗어나고 처음 보이는 주유소에서 기름 만땅으로 채우고,
주유하는 청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Neuquen 가는데, 이길로 죽 가면 되는 거니?"
"응. 맞아.. 이길로 쭉 그냥 달리면 돼"
"너 네우켄 가본 적 있어? 몇 시간이나 걸리니?"
"아주 많이 걸려. 한 10시간쯤..."
"Toll은 많이 나오니?"
"응 중간중간 한 번씩 나와"
멘도사를 벗어나니, 이정표가 크게 나온다.
1차선 '부에노스 아이레스'
2차선 '산 루이스'
'이대로 죽 달리면 되는구나'
'첫 번째 목표 도시가 산 루이스였었지...'
한 시간쯤 달렸을까...
구글맵이 우회전을 가리킨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빠지는 길은 없다.
불안하다.. 모지? 모지?
빠질곳도 없는 고속도로에서
자꾸 우회전하라고 삑삑거린다.
'불안하다'
앞에는 계속 '산 루이스' 이정표가 보이는데...
다행히 얼마 못가 주유소가 보인다.
잠시 정차하고, 아이들이 비스듬히 누울 수 있도록 뒷자리를 정리한다.
주유 중인 사람들에게 Neuquen 가는 방향을 묻는다.
온길을 되돌려 15분쯤 가다가 Las Catita라는 곳에서 좌회전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난 계속 '산 루이스' 이정표를 보고 왔는데.. 맞는 방향으로 온거 아니니?
라고 물으니...
Neuquen을 가려면, 산 루이스가 아니고 산 라파엘로 가야 한다고
옆에서 주유 중인 다른 아저씨가 끼어든다.
산루이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방향에 나오는 도시고,
산 라파엘이 네우켄 가는 방향에 나오는 도시란다.
아 맞다.. San Luis가 아니고 San Rafael이었다.ㅠㅠ.
온 길을 돌아간다. 왕복해서 한 40분은 족히 손해를 봤다.
조금 전까지는 긍정의 기운이 싹트던 가슴속에 걱정 근심이 자리잡는다.
'과연 네우켄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마음속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아 있었구나!
돌아가 보니 Las Catita에서 San Rafael 이정표가 있다.
San Luis로 간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San Rafael 이정표를 그냥 흘려버렸나 보다.
이정도라서 다행이다. 처음부터 예방주사 제대로 맞았다.
조그만 마을길을 지나면서 153번 국도가 시작된다.
가로등이 없는 세상은 정말 깜깜하다.
지나는 차도 없다.
그저 우리 차에서 비추는 전조등만이 사방 수 킬로에서 유일한 빛이다.
도로 상태가 어떤지 확신이 없다.
혹시 중간에 구멍이라도 있으면...
이런 곳에서 타이어 펑크라도 난다면...
온갖 걱정에 속도를 올릴 수가 없다.
10분-20분쯤 달렸을까,
백미러에 반짝하고 빛이 보인다.
멀리 뒤에서 차가 한대 따라오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뒤차 헤드라이트 빛이 강해지고 있다.
날 제쳐가라는 뜻으로 우측 깜빡이를 넣으며 달렸다.
드디어 뒤차가 나를 추월한다.
흰색 벤츠다.
한결 운전이 편해진다.
앞차 속도에 맞춰 120km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며 달린다.
"도원아.. 이런 상황을 모라 하더라?"
맞다.. 페이스 메이커.
우리 앞차는 우리를 견인하는 페이스 메이커다. ㅎ.
두 시간 정도 달렸을까.
죽 뻗은 일직선 길..
그저 앞차 후미등만 따라 편안히 달렸는데..
조그만 마을에 들어선다.
San Rafael에 도착했나 보다.
마을에 진입하고 두 번 정도 코너를 도니, 주유소가 보인다.
앞차 흰색 벤츠는... 그냥 주유소를 지나쳐 달린다.
놓치기 아깝지만, 기름부터 채워야 한다.
주유를 하면서, 아이들은 아르헨티나 아이스바를 하나씩 먹고,
나는 다시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잔 더 마신다.
정신이 더 반짝한다.
네우켄 가는 길을 다시 한번 물어본다.
주유 청년이 진행방향을 가리키며, 마을을 벋어 나서 그냥 똑바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이 밤에 멀고 먼 네우켄을 찾아가려는 동양인 가족이 꽤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조그만 마을이지만, 동네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서
마을을 요리조리 한 바퀴 돌게 된다.
Santa Isabel 방향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마을을 벗어나니 금방 또 적막강산이다.
이젠 의지할 페이스 메이커도 없이
홀로 외로운 길을 달린다.
뒷좌석에 앉은 와이프와 성주는 잠이 들었다.
핸드폰 충전이 잘 안되어 한번 껐다 키니
off line googlemap 작동이 안된다..
중간 경유 낯선 도시 이름을 계속 되뇌이며,
어둠속 뜨문뜨문 등장하는 이정표에 운명을 맡겨야 한다.
긴장감 만땅이다.ㅠㅠ
옆자리에 앉은 도원이는 살짝 긴장된 모습으로,
계속해서 아빠가 졸리지는 않는지 묻는다.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어렸을 적 브라질 살던 이야기.
한국으로 전학 가서 아무도 모르게
몇 번 주먹질하고 싸웠던 이야기.
얼마전 칠레 여학생에게 대시받은 이야기... ㅎ
평소 대화가 적다고는 생각 안했지만,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다.
차 시계는 1:30이 지난다.
낮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도원이도 잠이 들었다.
살짝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앞창으로는 습기가 낀다.
온풍기를 틀자니, 졸음이 무섭다.
할 수 없이 에어컨을 켜고 달린다.
든든한 옷도 준비 못해 왔는데..
다들 추위에 웅크린 자세로 잠이 들어 있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을 한 번씩 마주친다.
저 멀리 반대편 차량 불빛이 점처럼 시작된다.
금방 지나칠 줄 알았건만, 처음 불빛을 만나고
대략 10분은 지나야 그 차량을 스쳐 지나간다.
팜파스 대평원을 남북으로 달리는 이 도로는
"수십 킬로, 아니 수백 킬로 일직선임이 틀림없다"
주유계 바늘이 마지막 한 칸에 걸쳐 있다.
지금껏 달려와 보니,
팜파스에 주유소가 있을 이유가 없겠다.
통행량도 거의 없는 팜파스 대평원 중간에
주유소를 만들어 놓을 턱이 없다.
걱정스럽다.
앞으로 100km 이내에 마을이 나와야 할 텐데...
다행히 얼마 못가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앞에 초소에서 차를 세운다.
식물이나 동물을 싣고 있는지 묻는다.
'주 경계구나...'
뒷문을 열어보라 한다. 성주가 짐칸 좌석을 펴고, 웅크린 자세로 자고 있다.
다행이다. 금방 주유소도 나왔다.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
언제부터인가 Neuquen 이정표가 크게 보인다.
도로 주위로 가로등이 나타났다.
새벽 5시를 조금 넘으면서 Neuquen에 진입한다.
도시 외곽을 돌아 우측으로 틀어 안데스 방향으로 향한다.
밤새 긴장하며 달려왔는데...
이제는 마음이 많이 풀어진다.
적어도 길 잃을 걱정, 주유소 걱정은 안해도 될듯 싶다.
금방 또 주유소를 만난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Pino Hachado 국경을 묻는다.
죽 직진이란다.
밤새 달려오면서,
어제저녁 내가 옳은 결정을 내린데 대해,
내 스스로에 대해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이 길도 이러 했는데,
만약 그 안데스를 끼고 죽내려오는 40번 국도를 선택했더라면,
과연 적당한 거리에 주유소는 있었을 것이며...
칠흑 같은 어둠에 제대로 속도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휴~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내 스스로 이런 결정을 내린데 대해
정말 고맙고도 대견하다.
7시가 가까워 오면서 점점 동이 튼다.
조금씩 오르막이 시작된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보니
대평원 팜파스를 지나고,
북쪽 파타고니아가 시작되는
지역에 도착한 것이다.
이 풍광은 대체 모야??
아침 햇살이 붉게 물드는 파타고니아 대지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소떼...
그리고, 바위 절벽 위로 자리 잡고 있는 아라우꼬 나무들...
밤새 한숨 안자고 달려온 피곤함이 싹 날라가 버린다.
Pino Hachado 국경을 넘는다.
아르헨티나 국경 초소를 통과하고 Pino Hachado 정상에 도착한다.
안데스 산맥이 낮아진 해발 1300m쯤으로 길이 나 있다.
이젠 칠레 세관이다.
아침 9시.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칠레 땅이다.
전화기도 팡팡 터진다..^^.
이젠 운전도 교대로...
하루종일 달려 저녁 9시 무사히 집에 도착
만 24시간 2200km
문제 없이 달려준 차도 고맙다.
세계지리 시간이면 꼭 등장하던,
그 팜파스를 직접 달려보았다.
내가 본 팜파스는 까만색 도화지에
한 번씩 반짝하고 빛이 등장하는 모습으로만 기억된다.
환한 햇살이 내려쬐는 한낮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을 달리는 모습은 어떨까
궁금하다만...
팜파스 질주는 일생에 한 번으로 족하다.^^
P.S 그 첫 주유소 청년이 알려준것 처럼 Toll비용 내는 곳이라도 나왔다면,
돈을 왕창 내더라도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며 한번씩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팜파스위 도로는 통행료 받는 톨게이트가 없다.
국경을 넘어 비슷한 거리를 남에서 북으로 올라 올때는 대충 10번 정도
톨비를 내기위해 멈춰야 한다.
매번 4불 정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