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대한 생각들

by 차거운

가끔 삶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더구나 짧게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공히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 느낌들을 예술로 표현하면서 곱씹곤 했다. 칼 세이건이 이 아득하게 넓은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우리뿐이라면 그 얼마나 공간 낭비냐고 말한 바 있지만 우리의 인식 내에서 외계 생명체와 조우한 상황을 듣고 보지 못하였으니 지구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은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SF소설 '삼체'나 영화 '컨텍트' 등과 같은 상상적 서사들은 외계 생명 존재와의 접촉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상상적 서사들에서 익숙한 우리의 경험이 투영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다양한 경험들의 잔상이 서로 뒤섞이면서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듯 하지만 결국 그런 서사의 밑바닥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기억이거나 익숙한 관념들이다.

아무튼 지상의 모든 생명은 이 지구라는 별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생명의 연쇄적 고리에 묶여 있는 모든 층위의 생명체들이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양계를 거의 벗어나려고 하는 보이저 호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이 기억에 새롭게 떠오른다. 희미하게 존재하는 행성 지구. 우리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확인하던 별들보다도 약한 빛을 반사하는 작은 행성 속에서 우리가 산다. 천문학에서 설명해 주는 우주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참 아득하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저 하늘의 별들보다 더 많이 너의 후손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던 그 순간 이후로도 참 많은 세월이 지났다. 현재 지구에는 82억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고 있다. 멸종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는 종들도 많고 위협도 있지만 아직까지 지구상에 생명이 번성하고 있는 편이다.

코스모스적인 규모의 생각이나 상념에 잠겼다가 반대로 마이크로 코스모스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겸허해지기가 쉬워진다. 너무 큰 세계와 놀랄 정도로 작은 세계가 맞물려 세상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보는 세상, 경험하는 세상, 살아가는 세상이다. 기술적으로나 인식상으로나 인류는 전 세계적인 연결망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형제간에 불화하는 경우처럼 원심력에 해당하는 분열과 대립의 관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차원의 일들을 순식간에 이웃의 일처럼 인지하고 감응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관계 맺기에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되는 시기다. 작년 이맘때 지리산 둘레길을 거의 마무리할 즈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놀랍고 기쁘고 하여 마음이 들뜨던 기억이 난다. 가자에서 죽음이 멈추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더 이상 증오에 차서 죽이지도 말고 죽지도 말기를 바란다. 우리나라의 활동가가 이스라엘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계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 역시 무관심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있다는 하나의 상징적 몸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용기를 낸 당사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세상에 대해서 서로 무관심하지 말아야 함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이는 살면서 타인에게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를 한다. 그런 반면 또 어떤 이는 인간이 가진 최상의 품위와 인격을 드러내는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엄청난 위업을 이루거나 인류의 삶을 뒤흔드는 존재가 아니어도 따뜻한 언행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평범함의 비범함을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나는 '평범함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제인 구달은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의 삶을 인간의 관점에서 오랫동안 동행하는 연구와 삶을 살았다. 인간이 연민하고 공감하는 존재를 확장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마치 이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바리사이적인 질문과 비슷할까.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신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신이라는 것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에서 확인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지가 아닐까 한다.

여행이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장소와 삶의 영역으로 잠시 진입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시야가 좁게 살았다는 생각을 한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거나 지식적인 차원에서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외국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어올 때 부담스러워 어른의 옷자락을 잡고 뒤로 숨어드는 아이와 같은 심정인 경우들이 많았다. 우리 안에 이미 많은 이주민들이 살고 있음에도 피부에 와닿게 의식하거나 열린 마음으로 편안하게 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 낯섦과 이질감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 자신이 다른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가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시각을 뒤집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저 창백하고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가 지구라는 점을 볼 때 익숙한 관점과 태도와 판단은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여행은 그런 긍정적 기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여행을 앞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 인생 자체가 여행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꼬물거리며 보살핌을 받는 약하디 약한 한 존재가 누군가의 손주 손녀로 사랑을 받으며 어느 정도 자라면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와 같은 제도 교육을 받는 과정을 거쳐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일을 하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은퇴라는 것을 하게 되고 자신이 젊지도 육체적으로 단단하지도 않다는 자각을 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각자의 노년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죽음과 마주해야 할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도 시간의 궤적을 따라가는 '생로병사'의 흐름에 있는 여정이 된다.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소설에서처럼 국가에 대한 열정으로 전쟁터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진지전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의 한 사람으로 사라져 갈 때 그들이 생각한 전쟁은 그들이 체험한 그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현장에 발 딛고 걸어보기 전에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의 체험의 폭이 인식의 밀도를 담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책상물림이라는 전통적인 폄하의 표현이 있어 온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여행을 떠나려고 계획하고 이제 출발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류가 살아온 흔적들을 잘 보여주고 있으리라 기대되는 지역에서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계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있다. 세상을 많이 경험할수록 세상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내적으로도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지금 세상의 모습은 점점 분열적인 양상이 심해지지 않은가 싶다. 이 단절과 분리의 유형무형의 장벽들을 넘어 다리를 놓고 길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무사히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고 싶다. 인류의 역사는 길 떠나는 사람들과 머무는 사람들의 역할 분담 속에서 발전해 왔다. 머무는 사람도 영원히 머물 것은 아니고 떠나는 사람도 언제까지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는 내려앉기 위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것이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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