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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Oct 20. 2020

모주와 뱅쇼, 그리고 술

모주와 뱅쇼


각 나라의 음식은 기후조건, 종교, 사회문화가 어우러져 발달한다. 사람들은 에너지원으로서 밥을 먹기도 하지만 병을 예방하고, 심지어 즐기기 위해 요리를 하고 맛을 본다. 음식을 만드는 이들은 창의적 사고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맛을 보는 이를 황홀함에 빠지게도, 눈물을 흘리게도, 실망감을 주기도 한다. 인간의 뇌에 영향을 주는 이러한 음식들과 더불어 술의 역사가 화려하게 발달했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와인에 물을 타서 밤새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술은 긴장을 이완시키고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브레인 미디어에 실린 미국의 제니퍼 미첼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술을 마시면 엔도르핀 성분이 분비되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이때 일회에 많이 마실수록 엔도르핀이 더욱 많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가 나오는 것 같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독이 되는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누룩으로 술을 빚어 장독에 되직하고 단맛이 나는 '단술'을 담으셨다. 처음 위에 떠 있는 것을  맛보았을 때의 단맛이 생각난다. 마치 오늘날의 떠먹는 요구르트 맛이 났다. 알갱이가 떠 있는 다소 진한 상태를 동동주라 했다. 위의 맑은 부분으로 만든 술이 청주다. 누룩을 빨아들여 아래에 가라앉게 된 것을 조금 묽게 만든 상태가 막걸리다. 아이들은 마시면 큰일 난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나는 몰래 장독을 열어 맛보기도 했는데, 마음이 콩닥거려 그만두었다. 시간이 지나 발효되면서 효모가 당을 먹고 알코올을 자꾸 내뿜는다. 알코올 성분이 무르익게 되면 먹기 좋은 술의 상태라고 하셨다.


바쁜 농사철이면 누룩으로 빚은 막걸리를 노란 주전자에 담아 농사일을 도와주시는 아저씨들의 새참으로 내 갔다. 그럴 때면 할머니나 엄마를 도와 주전자를 들고 따라갔는데, 흘리지 않도록 무척 조심해야 했다. 울퉁불퉁한 논길을 가노라면 뱀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막걸리가 흘리지 않도록 이리저리 들어 올렸다.


막걸리 들고 새참 나갈 때 따라가는 모습

노란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힘들게 풀밭 사이를 가고 있는 나
엄마 손잡고 새참 내가는 모습(헝겊인형, 인사동, 독일 전시회 작품. 황토 천연염색 바디,  천연염색 의상)


어느 날 엄마가 막걸리를 끓이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나도 이미 성인인지라 당당하게 술맛을 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맛보았던 '단술'이 아닌 인공적인 단맛이라 그런지 맛이 덜했다. 아주 달달하고 알코올 냄새는 나지 않는 '설탕 막걸리'를 엄마는 좋아하셨다.


아빠는 약주에 약하시고 엄마는 한두 잔 정도 즐기셨다. 아빠는 엄마를 위해 여러 가지 과실주를 유리병에 담그셨다. 친정집에 가면 엄마는 과실주를 유리병에 담아주시면서 "너도 직장에서 스트레스받으면, 저녁에 한 잔씩 마셔라." 하시며 건네주셨다. 나는 단맛이 강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과일이 예쁘게 든 과실주 병을 들고 와서, 요리의 베이스에 사용했다.

전주의 콩나물 국밥집에는 항상 모주가 있다. 여름날엔 시원하게 겨울엔 뜨끈하게 모주를 주문한다.

어느 날부터인지 전주의 '모주'가 유명해졌다. 생강, 계피, 대추, 배, 정향 등의 과일과 한방 재료를 넣어 끓였기 때문에, 알코올은 거의 없어서 막걸리 음료라고 생각된다.  모주에 관한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어머니의 술'을 의미한다. 전주에서는 식당에 가면 대부분 모주를 판매하는 곳이 많다.

모주(母酒)

한국 전라도 전주의 해장술로 유명한, 모주는 막걸리에 여러 한약재를 넣고 끓였다. 모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어느 고을에 술 많이 마시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어머니가 막걸리에다 각종 한약재를 넣고 달여 아들에게 주었다는 설. 둘째,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 씨 부인이 제주로 귀양 가서 술지게미를 재탕해 막걸리를 만들어 팔았는데, 대비 모주에서 '대비'를 빼고 모주라 불렀다는 설. (두산백과 참조)

겨울에는 뜨끈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마시는 '모주'의 생산이 가장 많은 곳이 전주라고 한다. 모주는 원기회복과 혈액순환, 숙취해소 등 여러 가지로 몸에 좋은 역할을 한다.


한식에 '모주'가 있다면 양식에는 '뱅쇼'가 있다. 뱅쇼(vin chaud)는 와인을 뜻하는 뱅과 따뜻하다는 의미의 쇼가 합쳐진 단어다. 와인에 레몬, 사과나 오렌지 또는 오렌지 껍질, 통계피, 정향(또는 허브), 생강, 설탕을 넣고 끓인다. 알코올 성분은 거의 날아가고 여러 가지 몸에 좋은 성분만 남게 된다. 특히 비타민이 많기 때문에 감기 예방 또는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마시는 와인 음료에 해당한다.

뱅쇼

배낭여행으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즈음, 감기를 앓게 되었다. 마침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숙박을 하게 되어서 한국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나는 원래 여행을 가면 그곳의 음식을 잘 먹기 때문에, 한국요리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국땅에서 동포를 만나 우리의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조금 기운이 났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경우는 자국에서 와인이 생산되므로 우리나라보다 맛 좋고 가격이 적정한 와인이 많았다. 내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을 아신 주인장께서 다소 부드럽고 중간 바디감을 지닌 멜롯을 사 오셨다.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와인 용량은 750ml인데 그것은 두배 가까이 되어 보였다. 멜롯을 냄비에 붓고 설탕을 넣어 끓여주셨다. '설탕 와인'이다. 와인공부를 해서 익히 뱅쇼를 알고 있던 나였지만 그녀가 끓여준 설탕 와인은 엄마의 설탕 막걸리를 떠 올리게 해서 그런지 한잔 마시고 나니, 기력이 다소 회복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약재가 들어가거나 과일이 들어가면 더욱 좋은 맛과 향이 나고 건강에도 좋겠지만, 단지 설탕만 넣어 끓인 베네치아 민박집 쥔장님의 와인은 나에게 '엄마의 맛'을 느끼게 했다.


모주나 뱅쇼는 술이라기보다는 '술 음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재 시판되는 모주는 알코올 성분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뱅쇼의 경우, 어느 정도 끓여서 휘발시키는지에 따라 알코올 성분이 남아 있을 수 있어서, 조금 취할 수도 있다.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마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사람에 따라서 해독이 안 되는 경우에, 단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치명적이다. 몇 년 전, 한 사건을 소개한다. 와인 강의를 함께 받던 어떤 이가 단 한 모금 마신 후, 곧바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갔다. 이처럼 많은 문제를 지닌 술이란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다루면 약이 되고, 잘못하면 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식에서 와인은 요리의 맛을 살리는 역할을 하므로 , 테이블 세팅에 와인잔의 위치가 있을 정도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의 선택이 중요하다. 이를 '마리아주'라 칭한다. 마리아주는 불어이고, 영어로는 결혼 Marriage이다. 즉, 와인과 음식의 화합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밥상에 술잔 자리가 차지할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선조들 역시 요리와 어울리는 술을 즐겼다. '주안상'이 그것이다. 술과 그에 맞는 안주를 내는 상을 '주안상'이라 한다.

주안상

나는 불금의 여름밤에는 치맥을, 비가 오면 막걸리와 파전을, 가을날 와인을, 겨울날 모주나 뱅쇼를 즐긴다. 때로는 혼술로 때로는 친지들과 마신다. 쌀쌀하게 바람이 부는 날, 정을 나누는 따뜻한 한잔의 술을 맛있는 안주와 더불어 가족과 친구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은 행복하다.


무엇이든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 나는 부담스러운 술자리는 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니 거절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마시는 한잔 술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도 미리 스스로 양을 정한다. 그런데 혼술보다는 가족과 지인과 함께 나누는 술자리가 좋다. 요즘 친구들과 만나면, "우리 이만큼만 마시자" 하고 선을 그어 놓는다.  어떤 목표를 정하는 것은 약속이고, 우리는 그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말도 행동도 술도.






(주안상의 이미지는 가평 우리 술 주안상 대회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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