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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잘 버틴 당신께, 이 그림을 띄웁니다

조용한 기도와 감사가 담긴 편지 같은 그림...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

by 김상래

"나는 올해 무엇을 거두었나"

올해의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2월이 되었습니다.

방 안 벽에 붙여 둔 계획표를 멍하니 바라봅니다. 줄을 그은 칸도 있고, 끝내 손도 못 댄 칸도 있지요. "올해는 꼭 크게 한 번 해보자"라고 마음먹었는데, 돌아보면 거창한 성과보다 매일 겨우겨우 버틴 날들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올해, 무엇을 수확한 걸까?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일까?’

이삭줍는여인들.jpg ▲이삭 줍는 여인들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1857년, 캔버스에 유채, 83.5×110cm, 오르세 미술관(파리) ⓒ Musee d’Orsay

연말에 떠올린 그림

그때 떠오른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넓은 들판에서 허리를 굽혀 작은 이삭을 줍는 세 사람.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입니다.

이 작품은 1857년 파리 살롱전에 처음 걸렸습니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 세 여인이 나란히 서서 허리를 깊이 굽히고 있습니다.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요.

맨 왼쪽 여인은 허리를 거의 90도로 꺾은 채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다른 손을 땅으로 길게 뻗어 막 이삭 하나를 집어 올리려 합니다. 가운데 여인은 빨간 두건과 분홍 팔토시를 하고, 불룩한 앞치마 주머니를 달고 있습니다. 오른쪽 여인은 허리를 조금 덜 굽힌 채 손에 모은 이삭을 묶는 데 집중하지요.

세 사람의 움직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며, 이삭 줍기라는 동작의 처음·중간·마지막을 한 화면 안에 펼쳐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밀레는 세 여인의 피부색을 흙빛에 가깝게 칠했습니다. 사람과 땅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마치 대지에서 솟아난 몸처럼 느껴집니다.

허리를 굽힌 자세는 분명 고되고 힘든데, 화면은 이상하게도 성스럽습니다. 노란 빛을 머금은 저녁 햇살이 굽은 등과 손등 위로 살며시 내려앉으며, 신의 손길이 잠시 머물다 간 자리처럼 따뜻한 기운을 남깁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가이아는 땅 자체를, 데메테르는 곡식과 수확을 상징하는 여신이었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들〉 속 인물들에게는 화려한 옷도, 황금관도 없지만, 땅과 노동, 생명이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오래 보고 있으면, 이들이야말로 대지의 여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시선을 세 여인 뒤로 옮겨 볼까요. 수평선까지 이어진 넓은 밭에는 이미 수확을 마친 밀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고, 멀리에서는 수레에 곡식을 가득 실어 나르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입니다. 말을 탄 인물이 한쪽에서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직접 허리를 굽히지 않는 모습으로 보아 땅의 주인이거나 감독관이겠지요.

앞과 뒤의 풍경은 선명하게 갈라집니다. 앞쪽에는 허리를 굽힌 가난한 여인 셋, 뒤쪽에는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곡식더미와 넉넉한 농장. 같은 땅 위에 서 있지만, 한쪽은 하루를 버티기 위해 땅을 더듬고, 다른 쪽은 그 수확을 관리합니다. 세 여인의 발치에는 두꺼운 그림자가 깔려 있고, 멀리 농장은 노을빛을 받아 환하게 빛납니다. 어두운 앞쪽과 밝은 뒤쪽, 굽은 허리와 곧게 선 사람, 손으로 이삭을 줍는 몸과 수레에 실린 곡식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이 그림의 진짜 목소리입니다.

1982.142_print.jpg ▲ 적색 도기 레키토스 – 에리크토니우스의 탄생 기원전 약 410년경 높이 21.2cm (대략) ⓒ The Cleveland Museum of Art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룻

그렇다면 밀레는 왜 이 장면을 그렸을까요. 답은 그의 삶에 숨어 있습니다.

밀레는 1814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해가 뜨면 밭으로, 해가 지면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일상이던 집이었지요.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를 따라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사람은 아버지보다 어머니와 할머니였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집안의 무게는 여성들에게로 옮겨 갔고, 어린 밀레도 다시 밭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장난삼아 그린 그림을 본 어머니와 할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넌 그림을 그려야겠다."


가난한 농가에서 이런 말 한마디를 꺼낸다는 것은 큰 결심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집안의 장남에게 밭 대신 물감을 쥐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의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파리로 가 화실에서 공부했지만, 오랫동안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빚은 늘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래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어머니와 할머니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습니다.

현실은 잔인했습니다. 그를 키워 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장례식에 갈 차비조차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한 번만이라도 널 보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도 곁에 있어 주지 못했습니다. 지독한 가난이 그와 가장 사랑하는 가족 사이를 끝까지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바로 이 무렵 그려진 작품입니다. 화면 속 세 여인이 누구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밀레의 마음속에서 그들은 평생 허리를 굽혀 가족을 먹여 살린 어머니와 할머니의 얼굴과 겹쳐 있었을 것입니다. 땅 위에 몸을 낮춘 그들의 자세에서, 그는 자신을 위해 삶을 다 바친 이들의 등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이 장면은 성경의 이야기와도 이어집니다. 구약성서에는 "밭 가장자리의 곡식을 남겨 두어, 가난한 이웃이 주워 가게 하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실제로 당시 농촌에는 추수가 끝난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 하루를 버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룻기의 주인공 룻 역시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다가, 훗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증조모가 되지요.

밀레는 이 이야기에 누구보다 공감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와 할머니가 바로 그 룻과 닮아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단순한 농촌 풍경을 넘어, 자신을 키워 준 여성들에게 바치는 조용한 기도이자 지연된 감사의 편지에 가깝습니다.

화면 속 옷차림을 들여다보면 그 마음이 더 잘 느껴집니다. 거친 삼베로 만든 치마와 앞치마에는 흙먼지가 배어 탁한 갈색과 누런빛이 섞여 있고, 어깨를 감싼 남색·짙은 초록 상의는 햇볕에 바래 군데군데 색이 빠져 있습니다. 화려함이라곤 없지만, 그 소박함이야말로 실제 삶의 얼굴입니다.

굽은 허리, 거칠어진 손, 땅을 향한 시선, 묵묵히 반복되는 동작 속에 "힘들어도 오늘을 버티겠다"는 마음이 단단히 박혀 있습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해녀들이 먹고 살기 위해 바다와 밭을 오가며 하루를 버티듯, 이 여인들도 "오늘도 식구들 밥은 먹이자"는 마음 하나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듯합니다.


땅을 일구는 사람들의 현실을 드러낸 그림

1857년 파리 살롱전 전시장으로 다시 가 볼까요. 새 옷을 차려 입은 관람객들은 궁전 벽에 어울릴 법한 역사화나 여신의 초상을 기대하며 전시장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한쪽 벽에는 낯선 그림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허리를 깊이 굽힌 가난한 여인 셋, 그 뒤로 산처럼 쌓인 곡식더미와 넉넉한 농장의 풍경. 일부 관람객은 얼굴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왜 이런 초라한 장면이 살롱전에 걸려 있어야 하지?"

살롱분위기.jpg ▲장 앙드레 릭상, 〈샹젤리제 궁의 살롱전 개막일〉, 1890년경, 유채. 19세기 말 파리 살롱전 전시장의 분위기를 보여 주는 그림/ⓒ 그리스국립미술관, 아테네

그때 사람들에게 미술은 지친 하루를 잠깐 잊게 해 주는, 일상 밖의 특별한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밀레는 가장 낮고 힘든 순간의 농부를 화면 맨 앞줄에 세웠습니다. 1848년 혁명 이후에도 프랑스 농촌은 여전히 가난했고, 도시 파리만 산업혁명으로 눈부시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혁명이 세상을 바꿔 줄 것이라 믿었지만, 땅을 일구는 사람들의 하루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이 고단했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이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드러낸 사실주의 회화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이 노동자의 삶을 정면으로 그렸을 때 사람들은 "혁명을 선동하는 정치적 그림"이라고 의심했습니다. 밀레 역시 ‘농민 혁명을 부추기는 화가’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 연설을 한 적도, 혁명 단체에 몸담은 적도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은 평생 눈앞에서 보아 온 장면, 땅을 갈고 땀을 흘리며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간 사람들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두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불평등과 가난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불편한 그림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직한 기록이었습니다. 오늘날 미술사에서는 〈이삭 줍는 여인들〉을 19세기 프랑스 농촌 사회를 이해하게 해 주는 하나의 시각 자료로, 동시에 사실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합니다. 예술은 단지 예쁜 것만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우리가 피하고 싶은 진실까지 함께 비춰 준다는 사실을 이 그림이 잘 보여 줍니다.


뒤늦게 빛난 가치와 우리의 시간

아이러니하게도 밀레는 이 그림의 진짜 가치를 살아 있을 때 보지 못했습니다. 평생 가난 속에서 살던 그는 1875년에 세상을 떠났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이삭 줍는 여인들〉은 본격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습니다. 1890년, 한 사업가가 이 작품을 처음보다 수백 배 비싼 값에 사들이자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을 만든 화가와 가족은 가난하게 살았는데, 왜 그림은 혼자 부자가 되는 걸까?"


이 질문 끝에 프랑스에서는 ‘추급권(droit de suite)’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화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작품이 다시 팔리면, 그 판매액의 일부가 유족에게 돌아가도록 한 장치입니다. 오늘날 음악 저작권료나 웹툰·소설의 2차 판권 수익과 비슷한 개념을 미술에 처음 적용한 사례이지요. 〈이삭 줍는 여인들〉은 이렇게 예술가의 권리와 미술 시장의 구조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금방 결과가 보이지 않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시험 공부, 연습, 글쓰기, 그림 그리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밀레의 삶과 〈이삭 줍는 여인들〉의 운명은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당장은 아무도 몰라도, 땅 위에서 묵묵히 허리를 굽히는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 그림 앞에 서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보세요. 어느 순간 화면 속 세 여인의 굽은 등이 눈높이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때 오늘의 나를 떠올려 보아도 좋겠습니다.


올 한 해, 우리도 각자의 들판에서 저 마다의 작은 이삭을 줍느라 애썼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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