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하루는 모닝 노트를 챙겨가지 않아 그 내용을 적진 못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모닝 노트를 우선적으로 펼치는 것은 내겐 연속에 대한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있어서다.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전에 내 신념과도 같은 노트를 먼저 펼치는 일을 가장 먼저한다. 그렇게 또다시 특별할 것 없는 내 하루를 읊조린다. 나조차도 재차 읽지 않을 글들을 뱉어내고 나면 한 꼭지의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전에 무엇 하나 우선이랄 것도 없이 평행선에 할 일들이 있다. 이번 명절은 결혼 후 처음으로 내내 친정에만 있었다. 허리가 좋지 않은 엄마를 대신할 요량이었는데 엄마의 일이란 게 사람이 많은 명절엔 오히려 할 일이 더 많게 마련이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설거지를 내내 도맡아 했지만,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오면서 엄마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대식구로 몰려가는 것은 아빠에게는 즐겁고 기쁜 일이나 이제 엄마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가 찾아준 또 다른 감정의 세계였다.
그렇게 며칠을 친정에서 보내고 돌아와 새벽시간, 내 살고 있는 집안을 둘러본다. 한가득 쌓인 빨래, 아이가 자기 전에 찾던 엄마 물(내가 끓인 옥수수 차), 테이블 위에 쌓아 놓은 내 책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우선 할 일은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고 아이가 원하던 엄마 물을 끓이고 달그락 대면 깰까 봐서 저녁 설거지는 그냥 두고 밥통에 밥부터 안치고 아침 반찬으로 무얼 해 먹나 싶어 냉장고를 뒤적인다. 시큼한 냄새를 싫어하는 두 남자를 위해 묵은 깍두기를 꺼낸다. 친정 엄마표 깍두기를 조금씩 가져다가 혼자 먹고는 그게 떨어지면 깍두기 먹고 싶은 날은 조금씩 사서 통에 넣어두는데 그것도 혼자 먹기가 버거웠는지 묵은 냄새가 난다. 묵은 음식은 우리 집에서 인기가 없다. 음식에 딱히 재미가 없는 두 남자를 위해 아침 반찬으로 묵은 깍두기를 베이스로 한 쪽갈비를 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고기라고 부담스러워할 남편의 표정도 마음으로는 신경이 쓰이지만 다양한 음식을 먹으며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고 싶은 아이를 생각하며 물에 푹 잠길 정도로 쪽갈비를 넣고 삶는다. 시골에서 갓 잡은 돼지라며 그 절반을 사 와 근처 정육점에서 부위별로 소포장 부탁을 했던 아빠의 노고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부위 중 하나를 꺼내 아침 반찬용으로 쓰기로 했다.
집안으로 퍼지는 옥수수 차 향기를 고기의 잡내가 덮기 전에 엄마표 된장과 디카페인 커피 한봉을 털어 넣고 파를 넣는다. 갓 잡은 돼지를 부위별 냉동으로 해놓은 상태라 신선도는 유지가 되겠지만 그래도 그 비릿한 고기 냄새는 잡혀야 더 먹을 만해진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나름의 다양한 것들을 하느라 엉덩이가 내내 붙어 있질 못한다. 그렇게 집안 일을 하며 짬짬이 써내는 한 꼭지의 글이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자장면 냄새 같은 게 집안을 물들인다. 아마도 파와 된장의 조합으로 나는 냄새일 거다. 단잠을 자고 있는 가족들이 깰까 봐 환기 시스템을 강풍으로 10분 정도 돌려놓고 주방 쪽으로 난 작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묵은 깍두기 베이스가 한가득 스민 돼지 등갈비처럼 집안에 퍼지는 시큼한 냄새만 작은 창으로 날려보내고 내 정성은 집안에 고스란히 남기를 바라본다.
그 사이 잡곡밥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신호음을 보내오고 착실하게 돌아가는 세탁기도 좋은 향을 넣어달라고 한다. 그렇게 몇 가지가 순차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내게 조금 더 글 쓸 시간이 주어진다. 쪽갈비를 중불로 줄여놓고 나니 오늘 약속이 있었던 듯싶은데 그게 오늘이었나 내일이었나 가물거린다. 만약 오전 10시 약속이 오늘이 아니라면 난 가족들 아침밥 먹고 쉬는 시간에 필라테스를 다녀올 생각이고 오전 약속이 맞다면 점심까진 경주에서 올라오는 친한 동생과 약속 장소에 있을 예정이다. 그렇게 잠시 나가는 일에도 집안 채비부터 해야 하는 나는 정신은 온통 열혈 미래 여자지만 실상은 딱히 그렇지 못하게 산다. 그러느라 나의 내부에서의 충돌을 자주 경험하며 산다.
한 시간 반, 밥하고 물 끓이고 빨래해서 널고, 아침 반찬 하나 만들고 나니 어느덧 배가 고프고 다시 졸음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렇게 적고 나면 벌써 한 꼭지. 글 쓰는 일이 뭐 어려워할 일은 딱히 아니지 싶다. 불안한 마음을 풀어낼 간절함만 있다면 주제는 이렇게도 사소하게 찾을 수 있고 눈앞의 모든 것이 글감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열어둔 창문을 닫고 아이 곁에서 조금 더 온기를 느껴볼까 싶다. 딱히 목적이랄 것도 없이 적어나가는 내 오늘 글에는 나의 어떤 간절함과 욕망이 투영되어 있을까? 그저 오늘도 내 삶이 글 하나를 적게 만들었다. 어느덧 AM 6시.
에두아르 뷔야르 (Edouard Vuillard)
1868년~1940년
나비파(Nabis 派, 프랑스어: les nabis)는 고갱에게 영향을 받은 폴 세뤼지에(Louis-Paul-Henri Sérusier, 1863~1927)가 파리의 젊은 화가들을 모아 이룬 집단이다. 인상주의에 염증을 느낀 젊고 반항적인 화가들이 주였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장식미술가, 판화가였던 장 에두아르 뒤야르의 그림에 대한 제 느낌을 쓰기에 앞서 나비파에 대한 언급을 조금 해 두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일본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색채는 담백한 듯하면서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주로 그렸는데요
평범한 제 일상의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이 이 그림 속 여인과 닮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가져와 봅니다. 집안은 늘 제가 가꾼 그만큼의 온도로 유지가 되는 것 같아요. 신경을 쓰지 못한 때는 집안이 온통 엉망이 되어버리잖아요.
조금 일찍 일어나 제게 주어진 일을 하고 나면 모든 것들이 특별하지 않게 늘 있던 그 자리에 있듯 보입니다. 제가 애쓰는 그 몇 시간이 늘 같은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처럼 빗질을 하는 여인의 뒤로 보이는 가지런한 일상이 제 삶과도 비슷해 보여 마음이 투영되네요.
오늘도 그저 묵묵히 제게 주어진 어떤 책임을 다하며 하루를 열어갑니다. 그 안에서 짬짬이 적어가는 제 글들이 어느덧 참 소중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