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모리아>2022 리뷰
<메모리아>2022는 관객들에게 예술적 체험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영화이며 기억과 소리에 관한 영화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과 영감이 틸다 스윈튼과의 협업을 통해 어떻게 영화로 탄생하는지 지켜볼 수 있다. 태국의 문화를 자양분으로 한 그의 영화적 특징이 낯선 나라 콜롬비아에서 절묘하게 융합하며 더욱 보편적인 예술성으로 안착한다. 정체불명의 소리를 밝히려는 제시카의 여정은 예상치 못한 것과 조우하게 되는데 해당 결말을 위해 관객들은 감독이 준비한 여정을 함께하며 콜롬비아를 여행하듯 환경과 언어에 스며든다. 입체적인 사운드로 자연의 기억과 만나는 영화 <메모리아>를 살펴보자.
첫 번째로 소리는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됐다. 그는 ‘폭발성 머리 증후군’을 앓고 있었는데(메모리아 촬영 후 그 소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는 보통 잠들기 직전이나 깨자마자 머리에서 매우 큰 소리를 듣거나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느낌이 드는 증세를 말한다. 감독은 상상력을 더해 이 소리를 영감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명상하듯 가만히 앉아 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새의 노랫소리, 동네 소음, 자동차 경보음이 들렸고 이 모든 것들이 이전과 다른 의미로 감독에게 다가왔다. 감독이 폭발음을 우주의 탄생, 빅뱅의 소리로 해석하게 되는 순간 이는 이성과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된다.
아피찻퐁 감독의 예술성은 태국에 뿌리를 둔다. 그는 방콕에서 태어나 자랐고 태국의 문화를 흡수하며 예술적 소양을 쌓았다. 태국은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고 이는 감독의 유년시절에 영향을 미쳐 그에게 혼합된 형태로 내면에 자리한다. 그의 필모그래피 중 국내에서 인지도가 있는 2010년 작품 <엉클 분미>로 그의 내면을 짐작해볼 수 있다. 불교의 환생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며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소가 첫 장면에 등장해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는다. 또한 태국의 신화와 전설로 전해지는 유령, 원숭이 귀신, 메기와 공주도 영화의 일부를 차지한다. 도심이 아닌 시골 환경 특히 푸르고 울창한 잎들과 시종일관 들리는 풀벌레 울음소리는 정글이나 숲이 주요 배경이다. 정치적인 소재도 쓰였는데 전쟁이나 독재 이데올로기가 그의 영화 속 캐릭터의 삶에 녹아있다.
그의 영화 창작 방식 중 주목할 점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식에 있다. 바로 캐릭터의 과거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 <엉클 분미>에서 주인공 분미의 과거가 무엇인지, 그가 왜 사별을 했는지, 어쩌다 콩팥에 관을 달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분미와 그의 처제가 저녁 식사 중 죽은 아내의 유령과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원숭이 귀신이 되어 돌아온 그 상황에 집중한다. 그들은 유령과 귀신을 만나도 놀라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데 이는 초현실적인 현상이나 미신을 믿는 태국인들의 문화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인물들이 벌어진 사건 이후로 환경과 날씨, 분위기를 어떻게 흡수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며 이번 영화 또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메모리아>2022 역시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제시카의 과거를 설명하지 않는다. 첫 장면부터 그녀가 있는 곳이 그녀의 집인지, 여행으로 묶는 호텔인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그녀가 어느 날 잠에서 때 머릿속에서 뭔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뿐이다.
감독이 캐릭터의 과거를 창작하지 않는다면 배우는 인물을 연기할 때 개인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경험은 두 번째 주요한 소재인 기억으로 연결된다. 감독은 이 영화를 자신의 ‘기억의 몽타주’라고 표현했다. 아피찻퐁 감독은 주연 배우인 틸다 스윈튼과 약 10년 전부터 이 영화에 대한 기초를 쌓았다. 2019년 <찬란한 무덤> 촬영 이후 태국에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과 틸다 스윈튼과 만나 함께 작업을 해보자고 다짐한 감독의 계획이 영화 <메모리아>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부모님이 의사였던 아피찻퐁 감독은 병원에 들락거리며 그의 신경정신과적 증상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곳에서 트라우마,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나눴다. 그때부터 아이디어가 생기고 틸다 스윈튼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틸다의 개인적인 경험 또한 영화로 어떻게 녹일지 두 사람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화 <메모리아>를 만들기 전 2017년 두 사람은 먼저 단편 영화 작업을 함께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앞으로 만들어질 장편 영화는 감독의 고향인 태국이나 틸다의 고향인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제3의 또 다른 공간을 찾는 것에 동의했다. 그 무렵 감독은 남미 국가로 영화제 참석차 방문했었는데 특히 콜롬비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는 아마존에서 촬영하길 원했는데 콜롬비아 보고타의 변화무쌍한 날씨, 지형, 환경, 분위기를 보고 매력에 푹 빠졌고 틸다도 콜롬비아가 낯선 공간이었기에 두 사람은 콜롬비아로 촬영지를 결정했다.
낯선 환경에서 촬영을 진행한다는 것은 감독과 배우 두 사람 모두에게 신선한 작업 환경이 됐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은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내면과 끊임없이 소통하게 만들었다. 틸다가 제시카를 연기할 때 사용한 경험과 영감들은 오롯이 그녀의 것이었고 아피찻퐁 감독의 작품의 방향성이 그녀를 도왔다. 촬영을 하는 동안 그녀는 시종일관 주변 모든 것에 날이 서 있고 예민하고 의심하는 분위기를 보였는데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반응을 했다고 말했다.
감독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콜롬비아라는 나라, 대지가 갖는 기억, 인류의 역사를 기억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아피찻퐁 감독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멀지 않은 파자오라는 마을에서 터널 공사를 위해 산을 뚫고 공사를 하는 현장을 목격했는데 그 공사 중 나온 어린 여자 아이의 유골이나 6천 년 전 사람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하는 등 자연의 기억으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사건들을 경험한다. 감독의 경험과 틸다의 경험은 융합되어 영화 속 에피소드로 나타나기도 하며 이는 기억의 몽타주로 완성된다.
느낀다는 것, 감상한다는 것, 낯선 공간에서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감독은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덧붙였다. "나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영화에 담고 있다."
영화에는 명확한 내러티브(스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느낌을 담고자 노력했는데 기술적인 방법 중 하나로는 3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촬영 감독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서스페리아>를 작업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으로 정적이면서 옅은 색감을 즐겨 사용하며 아름다운 촬영과 영상미로 손꼽히는 감독이다. 그의 촬영 기법은 콜롬비아의 작은 소도시와 울창한 정글을 훌륭하게 담아낸다. 또한 필름의 1 롤은 14분의 촬영이 가능한데 아핏차퐁 감독의 기존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 그의 영화 호흡은 롱테이크를 즐겨 사용한다. 인물들이 연기하는 템포는 일상의 템포보다 느리기 때문에 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예를 들면 제시카가 흐르는 시냇물에서 초자연적인 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이는데 그녀의 몸짓은 마치 현대 무용을 하는 듯 비일상적이고 정적이고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상대적으로 화면을 자르고 붙이기 용이한 디지털 촬영에 비해 필름으로 촬영하는 방식은 호흡을 길게 갖는다. 최대 14분 동안 끊김 없이 이어지는 방식은 배우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치며 주변 환경을 컨트롤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더 사실적인 인상을 준다.
감독은 한 장면(씬)을 길게 촬영하면서 무수히 많은 여백을 남긴다. 카메라 움직임이나 배우의 행동이 없는 장면으로 몇 분을 사용하기도 한다.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그 움직이지 않는 장면을 바라본다. 대사도 없고, 움직임도 없고, 그 상황과 주변 사운드만 존재할 뿐이다. 그 여백은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철저하게 계획된 부분은 사운드였다. 사운드 디자인을 맡은 아크릿차람 깔라야니밋 음향 감독은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폭발성 머리 증후군의 사운드를 아피찻퐁 감독과 함께 구현해냈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운드를 의도적으로 계획해 사용했다. 다양한 종류의 사운드 레이어를 쌓아 올려 입체적이고 풍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사실적인 연출과 촬영 방식은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소재와 혼합되며 영화의 고유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콜롬비아의 절경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며 마치 관객들이 그곳에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을 전달한다. 하지만 제시카는 마치 꿈속에서 유형을 하는 것 같다. 제시카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은 감독의 의도대로 변화한다. 제시카의 동생은 자신이 병든 이유를 개의 저주나, 아마존의 어느 부족의 저주로 해석한다. 가장 비현실적인 요소는 바로 에르난의 존재다. 에르난은 제시카가 머릿속의 폭발음을 재현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만 사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함과 동시에 에르난은 감독과 감독의 분신으로 연기한 제시카가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존재였다. 숲에서 만난 중년의 에르난은 내내 알 수 없는 말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자신은 "자연의 내면에 존재하는 음파를 듣고 과거를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 지점이 영화의 핵심이다. 기억과 소리를 메인 아이디어로 시작한 영화는 자연의 모든 기억이 소리(파형)로 존재한다는 결말에 이른다. 제시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발하는 듯한 머릿속 소리를 반복적으로 듣지만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타자에게 그 소리를 언어로 한 표현은 이렇다. "콘크리트 공이 금속으로 만든 우물에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예요." 제시카는 우주의 존재인 그를 만나고 난 뒤 기억이 음파의 형태로 모든 자연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에르난의 팔을 자신의 팔에 얹자 마침내 음파의 파형은 언어의 형태로 변환돼 제시카가 과거의 소리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에 이른다. 에르난은 자신을 저장 장치라고 비유하며 그녀를 안테나라고 설명한다. 그녀가 지속적으로 들었던 정체불명의 폭발음 소리는 파형 형태로 존재하는 자연의 기억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아이디어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2017가 있다. 외계인의 언어는 원형으로 존재하고 마침내 그것을 해석한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본다. 영화 <메모리아>2022의 마지막 장면에서 숲과 하나로 융합되어 있던 미확인 비행물체가 동력을 받아 하늘을 날 때 그 소리의 파동은 원형으로 디자인 됐다.
관객들을 혼란에 빠드림과 동시에 연결하는 것, 비현실과 초현실을 연결하면서 작품의 고유의 색깔과 톤을 유지하는 아피찻퐁 감독의 연출과 틸다 스윈튼의 연기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설정은 아피찻퐁 감독이 실제로 자신이 듣던 소리를 우주의 탄생, 빅뱅과 같은 소리를 하나의 예술적 영감의 소재로 삼으면서 시작한다. 영화의 전체 과정이 그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극 중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언급되는데 달리는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는 괴짜이자 천재 미술가였다. 흘러내리는 시계로 유명한 대표작 <기억의 고집>1931이 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두통이 그에게 시계가 녹아내리는 듯한 환영을 보여주었고 그는 약속도 취소한 채 그 순간을 붙잡고자 노력했다. 감독은 다른 예술 매체의 유사한 표현 방식을 가진 예술가를 언급하면서 깊이를 더하는 한편 유사성을 찾고자 했다. 한 인간이 예술적 영감에 둘러 쌓인 환경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 체험해보고 느껴보는 것이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내면의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의 체험 가능한 형태인 영화로 이를 재현하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예술적 영감을 캐치할 수 있는 날 선 안테나를 세우고 이 땅을 두 발로 딛고 서 있다는 것, 쏟아지는 빗소리를 귀로 듣고 자연 만물과 연결되어 소통하는 것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예술적 체험인 것이다.
개봉:2022.12.29
장르: 드라마/ 콜롬비아, 타이, 멕시코, 프랑스, 독일, 카타르/ 136분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주연: 틸다 스윈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