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했듯이 혼란스러운 학교 생활과 선배들의 강압적인 태도로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그냥 조용히 지냈어도 됐을 텐데 열심히 하려고 하다 보니 실망도 큰 것 같았다. 결국 가출을 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가출을 두 번 했는데 첫 번째는 어머니가 교복 사라고 준 돈을 가지고 나간 가출이었는데 며칠을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두 번째 가출. 이번에도 교복 사라고 준 돈을 가지고 나갔다. 참 이런 아들도 없겠지. 결과만 보면 참 불효자식인데 그때 학교 생활은 내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길었던 두 번째 가출. 금호동에 살았던 나는 응암동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하고 있는 친구네 집으로 갔다. 아침이면 친구는 등교를 했고 나는 친구 방에서 지냈는데 방 구조가 특이해서 친구 부모님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있다가 그 친구와 두 명의 친구, 나까지 총 네 명이 본격적인 가출의 여정을 떠났다. 은평구 어느 동네 옥상에서 며칠을 지냈다. 근처 분식집에서 떡볶이도 먹고 음반 가게에 가서 음반도 구경하고 한 이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동네를 빈둥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다시 건물로 들어가려는 찰나 옥상에서 어른들이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옥상에 가방과 기타 등이 있었는데 챙길 세도 없이 그냥 놓아둔 채 도망갔다. 거기에 학생증까지 있었느니 당연히 학교로 연락이 갔고 아버지가 학교에 가셨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도망간 우리는 갈 곳이 없어 공사장 건물 지하에 내려가 시멘트 바닥에서 잠을 잤다. 돈이 다 떨어져 길거리 자판기 잔돈 나오는 곳에 혹시 떨어진 돈이 없나 찾아다니다가 동전 몇 개를 줍기도 했다. 땅에 떨어진 돈이 있을까 고개를 푹 숙이고 동전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다. 결국 제3의 장소로 가기로 상의하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친구 중 한 명이 자기 친구가 동대구에 있는 공장 기숙사에 사는데 거기로 가보자고 했다. 그런데 함께 한 친구 중 한 명이 자기는 서울에 남겠다고 한다. 그러라고 했다. 돈을 긁어모아 겨우 입석 차표를 사서 기차에 올랐다. 새마을호 기차 통로에서 넷이 쭈그리고 앉아 겨우 산 계란 두어 개를 나눠 먹으며 대구로 향했다.
도착한 동대구는 깜깜한 밤이었다. 물어물어 친구가 있는 공장 기숙사를 찾았다. 회사 관계자에게 들키면 안 돼 몰래 들어간 기숙사는 굉장히 넓었다. 그냥 넓은 방이었다. 꼭 찜질방이나 수련회 장소처럼 컸다. 친구가 마련해 준 이불을 깔고 자리에 누었다. 배가 너무 고파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지만 그 시간에 먹을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잠이 빨리 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아침, 공장 친구는 우리를 데리고 대구 시내에 있는 중국집으로 갔다. 아마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친구가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짜장면을 시켜 줬는데 서울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많았다. 허겁지겁 면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날 먹었던 짜장면이 내 평생 먹은 짜장면 중 최고였다. 배가 부르니 여유가 좀 생겼다. 친구들하고 수다도 떨며 시내를 잠깐 구경하다 다시 공장 기숙사로 돌아갔다.
공장 친구는 기숙사에 도착 후 잠시 어디를 다녀왔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 친구들을 기숙사에 데리고 왔다고 회사 관계자에게 맞았다고 했다. 너무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나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기숙사 방바닥에 앉아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숙사 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났다. 나와 친구들은 황당해서 말도 못 하고 어버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뭐라 하지 않고 조용히 가자고 하셨다. 나와 친구들은 말없이 따라갔고 동대구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우동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발했다. 알고 보니 서울에 남았던 친구가 부모님들을 만나게 돼 어쩔 수 없이 우리 행선지를 말했다고 한다. 변절자 같은 놈.
그렇게 길고 긴 두 번째 가출이 끝났다. 학교에 돌아와 유기정학을 맞은 것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한 1~2주 정도 유기정학 기간이었던 것 같다. 선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었겠는가. 가출한 친구들과 불려 가 각목으로 엉덩이를 맞았다. 허벅지와 엉덩이가 검은색이 될 정도로 많이 맞았다. 각목 휘두르는 속도가 프로야구 선수 저리 가라다.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한 친구는 허리를 잘못 맞았는데 미안하다고 하면서 다시 때렸다. 내 평생 가장 많이 맞은 날이었다. 그렇게 맞고 쉬고 있는데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한때 잠시나마 축구선수가 꿈이었으니 운동장으로 절뚝거리며 뛰어갔다.
그렇게 맞은 게 차라리 후련하기도 했고 죗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니 아픈 다리를 이끌고 축구를 해야겠다 싶었다. 비 오는 질퍽질퍽한 운동장에서 열심히 달렸다. 그렇게 폭풍우가 한차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