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델 - 아이칸 사태가 2025년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바야흐로 밸류업의 시대입니다.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상장 시장 밸류업은 이제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장 참여자들은 이미 '어떻게'가 아닌, '얼마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 주주 환원 강화, 불공정 거래 제재 등 이미 큰 판은 짜인 모습입니다. 시장은 연일 기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최근 시장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드디어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습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롯데렌탈/어피니티'와 '파마리서치/CVC'가 일으킨 갈등입니다. 롯데렌탈의 경우, 호텔롯데 등 대주주가 보유 지분 56.17%를 홍콩계 사모펀드 어피니티에 시가의 2.6배에 달하는 주당 7만7115원에 매각하면서 사태가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같은 날 어피니티를 대상으로 시가보다도 낮은 주당 2만9180원에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결의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어피니티의 전체 매입 단가는 16%나 낮아졌고, 기존 주주들은 지분 희석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습니다.
파마리서치는 더욱 극명한 사례입니다. CVC캐피탈이 2000억 원을 투자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인적분할을 발표했고, 이로 인해 승승장구하던 주가가 17%나 급락하며 9400억 원의 시가총액이 하루아침에 증발했습니다.
이러한 사태들의 핵심은 소액주주의 반격입니다. 롯데렌탈의 경우 VIP자산운용이 선봉에 나서 "구주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반영해 고가에 팔고, 신주는 저가에 발행하여 어피니티만 유리하게 만든 불공정 거래"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유상증자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파마리서치의 2만4000명 소액주주들은 지분을 규합,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제출하며 인적분할 저지에 나섰습니다. 더 이상 PE가 조용히 밸류업을 독식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입니다.
이러한 한국의 변화는 사실 미국에서 12년 전 벌어졌던 유명한 사건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바로 델과 실버레이크, 그리고 칼 아이칸이 맞붙었던 델 자진 상장폐지 사례입니다. 당시 이 사건은 "PE를 위한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시장에 강력히 각인시켰고, 이후 미국에서는 사모펀드가 상장 기업을 인수하는 거래에서 주주보호 장치가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WeeklyEDGE에서는 2013년 미 증시를 흔들었던 이 사태를 되돌아보고 12년이 지난 이 시점에 한국 시장에 던지는 메시지를 탐색해 보고자 합니다.
2013년 2월 5일, 월스트리트를 뒤흔든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델(Dell)의 창업자이자 CEO인 마이클 델이 사모펀드 실버레이크 파트너스와 손잡고 자신이 세운 회사를 주당 13.65달러, 총 244억 달러에 사들여 상장폐지하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술업계 최대 규모의 LBO 거래였으며, 마이크로소프트가 20억 달러를 지원한다는 깜짝 소식까지 더해진 뉴스였습니다.
마이클 델의 계산은 치밀했습니다. PC 시장 붕괴로 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는 위기를 기회로 봤습니다. "월가의 시선과 압박에서 벗어나야만 회사를 재발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13.65달러는 1월 주가 대비 25% 프리미엄이었고, PC 출하량이 14% 급감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합리적인 제안처럼 보였습니다. 더욱이 마이클 델은 자신의 16% 지분을 현금화하지 않고 롤오버하면서 "나는 이 회사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불길한 징조는 발표 직후부터 나타났습니다. 2월 8일, 델의 최대 외부주주인 사우스이스턴 애셋 매니지먼트를 비롯해 Harris Associates, Yacktman Asset Management 등 기관들이 "13.65달러는 턱없이 낮다"며 공개 반발에 나선 것입니다. 조용한 반란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월 5일, 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악역이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바로 행동주의의 대명사, 칼 아이칸이었습니다.
칼 아이칸은 10억 달러 규모의 델 지분을 확보했다고 통보하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전체 지분의 8%가 넘는 규모였습니다. 이틀 후 3월 7일, 그는 델 이사회를 정조준합니다.
주당 9달러 특별배당을 즉시 지급하라.
거부하면 위임장 대결을 벌이고 수년간 소송전에 돌입하겠다.
그렇게 게임의 방향은 순식간에 바뀌게 됩니다.
아이칸의 전략은 체스 마스터처럼 정교했습니다. 3월 22일, 그는 블랙스톤과 손잡고 다층적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블랙스톤은 주당 14.25달러로 전사 인수를 제안했고, 아이칸은 별도로 58% 지분만 15달러에 사겠다는 부분 인수안을 내놓았습니다. 두 제안 모두 델을 상장사로 유지하는 구조였습니다.
주주들이 현금도 받고 미래 성장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아이칸이 전면에 내건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4월 19일 블랙스톤이 "급속히 악화되는 재무 전망"을 이유로 철수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이제 링 위에는 마이클 델과 칼 아이칸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5월 10일, 아이칸은 사우스이스턴과 연합하여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주주들에게 주당 12달러를 현금으로 돌려주되, 주식은 그대로 보유하게 하자." 레버리지 재자본화라는 이 전략은 일부 주주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6월 18일, 아이칸은 사우스이스턴으로부터 10억 달러어치 지분을 추가로 사들여 델의 최대 외부주주로 등극했습니다. 같은 날 그는 더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델이 11억 주를 주당 14달러에 자사주 매입하라. 필요하면 내가 20억 달러를 직접 출자하겠다." 구체적인 자금조달 계획까지 제시하며 끊임없이 델-실버레이크 진영을 흔든 것입니다.
7월 12일, 아이칸은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주당 14달러 현금에 더해 행사가 20달러인 워런트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패키지의 실질 가치는 주당 15.50~18달러에 달한다며 마이클 델이 애초에 제시한 13.65달러를 압도하는 제안이라고 자신했습니다. 시장은 아이칸의 승리를 점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7월 18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델의 주주총회가 개회 직후 연기된 것입니다. 마이클 델 측이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는 신호였습니다. 7월 24일 두 번째 총회마저 연기되자 아이칸은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날, 마이클 델이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가격을 13.75달러로 올리고 특별배당 0.13달러를 추가해 실질 13.88달러를 제안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투표 규칙 변경이었습니다. 기권표를 반대로 간주하던 기존 룰을 실제 투표 참여분만 기준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이칸이 "델과 독재정권의 차이가 뭐냐? 독재정권도 승리를 위해 투표 규칙을 바꾸지는 않는다"고 독설을 퍼부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8월 1일 아이칸이 델라웨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8월 16일 법원이 신속심리를 기각하면서 그의 법적 공세는 막히게 됩니다. 그리고 9월 9일, 아이칸은 마침내 백기를 들었습니다. "이 전투는 승산이 없다(impossible to win)." 그는 마지막 서한에서도 "마이클 델에게 행운을 빈다. 하지만 그에게 행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냉소적 인사를 남겼습니다.
9월 12일, 8개월간의 대서사시가 막을 내렸습니다. 일반 주주의 65%가 상장폐지 거래에 찬성하며 마이클 델은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칸의 투쟁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압박으로 거래가격이 5억 달러나 올랐고, 3년 후인 2016년 델라웨어 법원은 델의 공정가치가 주당 17.62달러였다고 판결했습니다. 아이칸은 전투에서는 졌지만, 결국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델 사태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한국 시장에서도 유사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PE들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활동해왔습니다. 20% 남짓한 규모의 대주주 지분만 인수하고는 주주가치 향상보다는 자신들의 지분만 더 비싸게 팔기 위해 상장사를 필요로하는 기업사냥꾼들에게 지분을 넘기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소액주주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기관투자자들도 대체로 수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밸류업 시대를 맞아 이런 안온한 시절은 끝나가고 있습니다. 롯데렌탈 사태에서 보듯이, 이제 한국의 투자자들도 '공정한 가격'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델 사례가 한국 시장에 주는 교훈은 투명성과 공정성의 중요성입니다. 마이클 델이 CEO이면서 동시에 주요 구매자였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경영진이나 대주주가 관련된 거래에서는 이해상충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거래에서 독립적인 특별위원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고,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절차적 장치들이 강화될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상장폐지나 합병 과정에서 감정평가나 공정가치 산정에 대한 투자자들의 이의제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PE들은 이제 '조용한 바이아웃'을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모든 거래에서 주주들의 면밀한 검토와 때로는 격렬한 저항에 직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PE들이 더 공정한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면, 그만큼 기업가치 평가의 정확성이 높아지고 시장의 효율성도 개선됩니다. 소액주주들의 권익이 보호받는다면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것입니다. 델 사태 이후 미국에서 감정평가권 행사가 늘어났듯이, 한국에서도 투자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게 될 것입니다.
PE를 위한 공짜 점심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성숙한 자본시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CapitalEDGE 팟캐스트 시리즈 두번째 에피소드가 공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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