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위기의 차단인가 위기의 시작인가
주말동안 실리콘밸리를 강타한 실리콘밸리은행(Silicon Valley Bank, SVB)의 파산 소식은 연준과 재무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모든 예금 인출을 보장하겠다는 발표로 우선은 일단락되는 모습입니다.
SVB의 자산규모는 277조 원 수준, 고객 예치금의 규모는 220조 원에 육박한 기업 금융 전문 은행이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하루만에 50조 원이 한꺼번에 인출되면서 뱅크런의 발단이 되었고, 나머지 170조 원의 자금은 갑작스럽게 은행이 폐쇄되면서 주말동안 불확실성에 묶여버린 것이죠. 국내 IBK기업은행 3분기 말 은행원화예수금이 130조 원 규모이니 사실 이정도 규모의 금융기관이 갑자기 영업이 정지되고 파산한다는 공포가 시장을 덮친 것입니다.
스타트업들의 기업뱅킹을 전문으로 하는 은행이 갑자기 문을 닫아버리니 모든 예금이 동결된 것은 물론 SVB를 주거래은행으로 사용하고 있던 고객들의 업무활동이 막혀버렸습니다. 당장 3월 15일 직원들 월급이 나가야하는데 계좌에 접근이 안되고 월요일에 자금 인출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이어지자 벤처캐피탈이 나서 긴급자금을 대출해주는 사례까지 등장하였습니다.
결국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공포의 전염'을 차단하기위해 모든 예금 인출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치가 나오며 당장의 뱅크런은 막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과연 SVB의 특수성에 기인한 해프닝일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스템 리스크의 일부에 불과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는 단계입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인지
실리콘밸리은행이 사라진 실리콘밸리가 의미하는 점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왜 이번 사태가 끝이 아닌 또다른 시작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번 사태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경과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에서 잘 분석이 되어 있어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고자 합니다. 요점만 요약해보면
팬데믹 기간 급격히 불어난 스타트업 고객들의 예치금이 투자 혹한기가 되자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이를 지급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해지자 보유 자산을 매각하여 예금 인출에 대응해야 했고
가장 빠르게 팔 수 있는 매도가능증권을 보니 대부분 장기 미 국채에 투자되어있어 금리인상에 따른 손실도 커졌고
국공채는 위험자산으로 분류되지않아 바젤3 기준에서도 리스크 캐피탈을 쌓을 필요가 없어 Tier-1 자본도 부족했고
그래서 손실을 안고 자산을 매각하면서 Tier-1 자본 보충을 위해 유상증자를 발표했는데
시장이 SVB의 실상을 알아차리고 주가 60% 급락으로 대응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리콘밸리는 충격과 긴장의 96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사태가 발생하고나서 사후적으로 여러가지 해석을 덧붙이는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SVB의 주가가 급락하기 시작한 목요일 이전, 미디어에서 아무도 SVB에 주목하 않을 때 나왔던 분석과 메세지들을 살펴보는것이 중요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뱅크런이 발생하면서 생긴 일시적인 유동성 이슈가 은행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2022년 12월 SVB의 파산 위험성을 지적한 글을 찾아보면 SVB의 건전성은 이미 지난 분기부터 심각하게 훼손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SVB가 가지고있던 만기보유증권이나 대출채권은 상당한 규모의 미실현 손실이 누적되고 있는 단계였습니다. RMBS와 CMBS로 구성된 만기보유증권의 누적 손실은 20조 원으로 추정되었고, 스타트업을 대상000으로 한 벤처대출, 벤처캐피탈의 보유 지분을 담보로 한 대출이 포함된 80조 원의 대출포트폴리오 또한 상당한 감액이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해당 손실만 고려하더라도 은행은 이미 Tier-1 자본을 넘어서는 부실이 쌓인 것입니다.
유명 시장분석가 Byrne Hobart는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3주 전인 2월 24일 자신의 뉴스레터를 통해 SVB는 이미 지난 분기 기준 지급불능 상태에 빠졌고 미실현 손실을 반영할 경우 자산부채비율이 185배에 달한다는 분석을 공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워싱턴에 최대치의 기부금을 내고있는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SVB의 예금 고객들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적다는 전망까지 덧붙였습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먼저 자금을 인출하기 시작한 일부 펀드와 기업에서 찾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사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해석입니다. 마치 영화 '마진콜'의 한 장면처럼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상황이었고, 누구든지 판단이 섰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는 것이 뱅크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FDIC가 개입한 지 하루만에 은행폐쇄를 결정한 것은 시간을 더 끌어봐야 회생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실리콘밸리에 오래 거주한 사람들도 이번 뉴스를 통해 SVB를 처음 들어봤다는 사례가 꽤 있습니다. 사실 스타트업이나 벤처캐피탈 업계 종사자가 아니라면 구지 찾아갈 필요가 없는 특화 은행이 바로 SVB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탈은 왜 SVB에 계좌를 열고 거래하기를 선호했을까요?
SVB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다양합니다. 처음에는 스타트업 전문 예금은행으로 시작하였다가 90년대부터 스타트업 대상 벤처대출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지금은 스타트업 종사자 뿐 아니라 벤처캐피탈 펀드에 대한 출자지분 인수, 구주 거래, 지분 담보 대출, GP 출자금 대출, 캐피탈콜 대출, 벤처 펀드 수탁업무 등 VC-스타트업 특화 서비스를 제공했던 곳이 바로 SVB 입니다.
전 세계 스타트업 창업자가 모이는 곳이 미국이지만, 당장 금융거래기록도 없고 비자도 불분명한 창업자가 법인은행계좌를 쉽게 열기 어려운 곳 또한 미국입니다. 이런 엄격한 미국의 금융시스템에서 완충공간을 제공하는 곳이 바로 SVB와 같은 특화된 금융 기관입니다. 미국 뿐 아니라 캐나다, 유럽, 중국 등의 지사를 통해 현지 스타트업과 창업자가 미국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관문 역할을 수행했던 기관도 SVB가 유일합니다.
또한 초기 스타트업의 비상자금과도 같은 벤처대출을 가장 활발하게 취급하던 곳이 SVB였습니다. 대출을 받고 싶으면 우선 예금계좌부터 열고 금융거래이력을 쌓는 것이 순서인것처럼, 미국의 스타트업이라면 누구든지 벤처대출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스타트업 = SVB'라는 등식이 성립한 것입니다.
게다가 SVB의 주력 대출상품 중 하나는 벤처 펀드들을 위한 '캐피탈콜 대출'입니다. 국내의 사모펀드나 벤처캐피탈은 대부분의 출자자들이 국내에 있기 때문에 길어도 일주일 정도 캐피탈콜 기간을 가져가지만 전세계에서 출자자를 모으고 개인 및 패밀리오피스 자금 비중도 상당한 미국 벤처펀드들은 길면 한 달 까지도 캐피탈콜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투자 자금을 먼저 집행하고 추후 캐피탈콜 자금이 유입되면 상환할 수 있는 초단기 대출이 '캐피탈콜 대출'인데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취급한 곳 또한 SVB입니다. 벤처캐피탈 펀드들도 언제 발생할 지 모르는 금융니즈에 대응하기 위해 SVB와 거래하는 것을 선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금융기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뱅크런은 막았습니다. 미국 정부에서는 이번 사태가 타 금융사의 부실로 이어지는 가능성은 일단 차단한 셈인데, 과연 시스템 리스크가 여기서 멈출 수 있을지는 앞으로 타 금융사의 잠재 부실 여부에 달렸다고 보입니다.
문제는 이번 사태로 홍역을 치른 실리콘밸리입니다. 닷컴붕괴에 버금가는 전방위적인 리스크를 경험한 실리콘밸리는 이제부터 그 충격의 여파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상반기 신규 벤처 투자는 이미 끝났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기존 포트폴리오 기업들의 현금 상황과 런웨이를 모니터링하는 것도 벅찬데 갑자기 금융 부실이 생기며 통장에 있는 현금이 사라지는 위험까지 경험했으니 이제 벤처캐피탈들은 보이지 않는 위기에도 대응해야하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SVB는 1,000곳 이상의 벤처펀드에 수탁서비스를 제공하던 은행입니다. 조만간 실리콘밸리에도 펀드 수탁 대란이 닥칠 전망입니다.
때문에 당분간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는 벤처캐피탈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창업에 나서는 스타트업들에게도 악재가 될 전망입니다. 대부분의 투자사들은 3 - 4월 동안 기존 포트폴리오 관리에 나서며 동시에 펀드 관리 측면에서도 계좌를 다변화하고 리스크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데 집중할 것입니다. 만약 미국에서 투자 유치를 추진 중인 스타트업이라면 올해 상반기는 피해야할 것입니다.
이번 SVB 사태가 확인시켜준 내용은 지난 1년 간의 금리 인상의 여파가 가져올 수 있는 의외의 나비효과입니다. 미국 자산규모 18위의 은행이 단 2일만에 문을 닫을 정도의 충격이라면 오히려 앞으로의 위기는 이보다 규모가 작은 금융기관에서 연쇄적으로 터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근 2 - 3년 사이 등장한 은행서비스를 표방한 핀테크 기업들은 시골의 작은 은행을 인수하여 라이센스를 획득한 후 비대면으로 고객을 모아 빠르게 성장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디지털 실리콘밸리은행'을 내세운 Mercury라는 스타트업인데 아칸소주의 소규모 은행 Evolve Bank & Trust란 곳을 통해 금융서비스를 제공해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핀테크 기반 은행들의 리스크 관리나 자산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Mercury는 이번 사태에도 SVB의 대안 기관이라고 열심히 홍보하며 고객을 모으고 있지만 파트너 은행인 Evolve Bank는 이미 FTX와 거래한 사실이 들통나며 의심을 눈초리를 받고 있는 곳입니다. 신뢰의 위기는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인 것입니다.
지난 2년 간 SaaS, 이커머스어그리게이터, 챌린저뱅크, BNPL, 프롭테크 기업이 자산 확보 및 매출 기반 대출을 위해 활용한 Debt Facility는 또다른 시한폭탄이 될 전망입니다. 예를 들어 대규모 벤처 투자를 유치한 은행으로 유명한 Cross River Bank는 핀테크 기업에게 고금리 대출을 제공하고 이자와 수수료를 받는 사업 모델로 고속성장하였는데, 지금과 같은 고금리 상황에서는 SVB와 유사한 유동성 위기에 빠질 위험이 높아졌습니다. '핀테크 섀도우뱅킹'으로 불리던 Debt Facility의 연쇄 디폴트는 실리콘밸리 핀테크 산업을 5년 이상 뒤로 후퇴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투자 혹한기에 비상자금 역할을 하던 벤처대출은 당분간 시장에서 퇴출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나마 스타트업 대출을 이어오던 SVB가 공중분해되면서 '벤처대출' 또한 위험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브릿지 자금에 의존해오던 기존 스타트업들의 생존은 앞으로 더욱 위협받을 전망입니다.
기존 투자자들 또한 미래불확실성을 이유로 추가 자금 지원에 인색해진다면 머지않아 대규모 스타트업 도산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2020 - 21년 호황기 당시 자금을 조달한 기업들이 다시 펀딩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 시점이 2023년 말 - 24년 초였는데 경제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벤처 투자 환경은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존 펀딩 자금으로 버티던 스타트업들이 백기를 들고 포기하는 사태가 도미노처럼 번질 수도 있습니다.
위기의 시기에 과도하게 공포를 조장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은 상황에 대한 냉정한 인식도 필요합니다. 이번 SVB 사태로 인해 당분간 가장 큰 폭의 구조조정을 경험할 곳은 월스트리트도, 메인스트리트도 아닌, 지난 2년 간 가장 극심한 유동성의 변화를 경험한 실리콘밸리가 될 것이란 점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실리콘밸리의 겨울이 시작될 것이란 느낌이 단지 기우에 불과하기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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