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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세끼 Jul 16. 2021

어디까지 먹어보셨을까요

난 텍스트로 된 음식묘사에 유독 약하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다가 흰 빵에 대한 식욕을 참지 못해 호빵을 사먹으러 가기도 했고 <신밧드의 모험>에서 다이아몬드 광산 골짜기에 떨어진 신밧드가 산꼭대기에서 다이아몬드 채취를 위해 사람들이 던진 고깃덩이에 매달려 독수리를 타고 올라왔다는 장면에서 책을 집어던지고는 엄마에게 닭다리를 먹겠다고 울며불며 난리를 쳤던 기억들도 있다. <헨젤과 그레텔>을 읽으면서도 위기에 처한 남매의 안위보다는 마녀가 만들어 놓은 과자집에 넋이 나가 있었다. 아무튼 다른 책은 몰라도 음식이 묘사되는 책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강하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 같은 책을 읽는건 그래서 고문에 가깝다. 스크루지의 회심 과정이 뼈대지만 내겐 스크루지의 환상속에 등장하는 만찬의 식탁이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식탁에 산더미처럼 쌓여 임금님 의자 모양을 한 칠면조와 거위고기, 사냥 조류, 가금, 야생 멧돼지고기, 둥글게 썬 고기, 새끼돼지, 길게 이어진 둥근 소시지, 민스파이, 자두를 넣은 푸딩, 나무통에 넣은 굴, 붉게 구운 밤, 복숭아 빛을 띤 사과, 과즙이 넘치는 귤, 혀끝에서 살살 녹는 배, 멋들어지게 큰 공현제 축하 과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폰스주.”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짜릿짜릿해지지 않은가. 이런 부분을 반복해 읽고 입맛을 다시고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먹킷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고 재미다. 그러다보니 한 때는 하이에나가 먹잇감을 찾듯 화려한 음식 묘사가 많은 문학작품 찾는데 온갖 촉을 곤두세웠던 적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엄청난 탐독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책이 아니라 음식이 묘사된 책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치 학창시절 빨간 책의 야한 묘사를 향한 집중력과 관심과 비슷한 걸로 생각하면 된다. 

산해진미, 진수성찬, 주지육림이라 할만한 음식의 향연을 묘사하는 책을 사랑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은, 놀라고 질렸던 책이 있다. 입맛을 다시거나 호기심이 미처 차오르기에 앞서 숨이 턱 막힐 정도였던 묘사가 등장한 책이 있으니 바로 <사티리콘>이다. 고대로마의 정치가이자 작가였던 페트로니우스가 네로 시대의 향락문화를 풍자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렸던 작품이다. 그저 과장된 상상이 아닌, 실제로 이렇게 먹고 마시고 즐겼다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사티리콘>에 묘사된 연회의 스케일은 상상 가능한 수준의 클라스가 아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들이 메인 요리를 기다리면서 맛보는 것은 얼음에 재운 포도주다. 팔레르노 백포도주 중에서 100년된 오피미안. 그리고 이 대목에 등장하는 얼음은 알프스에서 실어온 것이다(이 소설의 시대 배경은 고대 로마다!).  먹기 전 노예 소년들이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에게 각종 서비스와 오락을 제공하는데 발톱을 깎고 다듬어주면서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도 있다. 

 “첫번째 주요 요리를 담은 용기 안에는 코린트 산 청동으로 만든 당나귀가 서 있었는데 흰색 올리브와 검은색 올리브가 담긴 광주리 두 개를 짊어지고 있었다. 또 당나귀는 접시 두개를 떠받치고 있었는데 가장자리에 트리말키오의 이름과 접시에 들어간 은의 무게가 새겨져 있었다. 쇠로 만든 교각 모양의 조그만 틀도 있었는데 안에는 꿀과 양귀비 씨앗을 끼얹은 산쥐가 들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시지도 은제 석쇠에 담겨 나왔는데 그 밑에는 암자색 자두와 석류씨앗이 놓여 있었다.” 

트리말키오는 이 연회를 베푼 로마의 졸부 이름이다. 본문에 나온 꿀과 양귀비 씨앗을 끼얹은 ‘산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찾아봤더니 ‘겨울잠쥐’로 번역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 당시엔 식용의 귀한 재료였을지 몰라도 좀 오싹하긴 하다. 그런데 페트로니우스는 이 전채요리를 묘사하면서 ‘우아한 음식’이라고 썼다.  


전채를 먹고 있다보면 바구니를 담은 쟁반이 나온다. 이 쟁반에는 나무로 깎은 암탉이 지푸라기 위에 앉아 있는데 이 지푸라기를 헤치자 공작알이 나온다. 이 공작알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공작알 껍질을 깨자 이 안에는 계란 노른자를 입혀 후추를 뿌린 오동통한 메추리 새끼가 들어 있다. 

다음으로는 열두개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큼직한 원형 쟁반 위에 온갖 진귀한 음식이 차려져 나왔다. 소설의 화자인 주인공 엔콜피우스는 “그리 거창하진 않았지만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참신했다”고 쓰고 있다.


 “백양자리 위에는 병아리콩이, 황소자리 위에는 소고기가, 쌍둥이 자리 위에는 고환과 콩팥이, 게자리에는 화환이, 사자자리에는 아프리카산 무화과가, 처녀자리 위에는 어린 암퇘지의 젖통이, 천칭자리에는 양쪽에 각각 다른 케이크를 얹은 저울이, 전갈자리 위에는 바다전갈이, 궁수자리 위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도미가, 염소자리 위에는 가재가, 물병자리 위에는 거위가, 물고기자리 위에는 숭어 두 마리가 올라 있었다. 접시 한복판에는 벌집과 함께 잔디 뗏장이 놓여 있었다.
… 그가 말하는 사이 무희 네명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앞으로 나오더니 대형 접시 뚜껑을 벗겨냈다. 그러자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가금류, 암퇘지 젖통, 페가소스처럼 양옆에 날개를 단 산토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 부대에선 매콤한 생선 액젖이 흘러나와 그 밑에 있는 생선들이 마치 작은 해협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손님들 앞에서 노예가 음악에 맞추어 고기를 써는 쇼를 선보이고 난 뒤 다시 음식을 담은 쟁반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마어마하게 큰 멧돼지다. 요리되어 나온 멧돼지는 아래와 같이 장식되어 있다.


 “엄니에는 야자나무 잎사귀로 만든 바구니 두개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는데 한쪽에는 방금 딴 시리아산 대추야자 열매가, 다른 한 쪽에는 말린 테베 산 대추야자 열매가 담겨 있었다. 밀가루 반죽을 구워 만든 모형 새끼 돼지들이 마치 젖을 빨 듯 돼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암퇘지인 듯 했다. 모형 돼지들은 알고 보니 집으로 돌아갈 때 하나씩 싸줄 선물이었다.”  


이 돼지 역시 그저 요리된 것이 아니다. 사냥용 칼을 든 남자가 나와 돼지의 옆구리를 가르자 그 안에서 개똥지빠귀떼가 푸드덕거리며 나온다. 개똥지빠귀 한마리가 아니라 ‘떼’다. 다른 하인들이 이 새를 잡아다가 손님들에게 나누어준다. 멧돼지에 이어 나오는 요리는 통채로 삶긴 송아지. 이 송아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카빙쇼를 통해 골고루 해체된 뒤 손님들에게 한조각씩 전달된다. 
이어지는 것은 화려한 케이크다. 천장이 열리면서 내려오는 거대한 쇠테에 매달린 접시에 케이크가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온갖 종류의 사과와 포도가 있고 손만 살짝 대도 샤프란 연무가 뿜어져 나온다. 이게 디저트인줄 알았더니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무려 ‘입가심’이다. 살찐 수탉과 빵으로 만든 두건에 싸인 거위알. 주인공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라고까지 했다. 


손님들에게 나누어줄 선물 목록도 엄청난 것들이다. 돼지 허벅다리, 양 목살, 사과 맛 막대사탕, 건포도, 아테네산 꿀, 고깃덩이, 산토끼, 사탕무 한 단. 

나오는 음식들은 이 외에도 더 있다. 먹고 마시고 즐기며 질펀하게 벌어지는 트라말키오의 연회는 한마디로 목불인견이다. 허세의 대잔치가 이어지다가 결국 취해서 싸우고 대규모 소동이 빚어진다. 이 틈을 타서 엔콜피우스는 현장을 빠져나오고 만다.

드문드문 전달하는 설명을 듣는 것 보다 이 책은 한번쯤 봐야 그 스케일을 실감할 수 있다.


트리말키오의 이 연회는 미국 작가 피츠제럴드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쓰면서 원래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 라는 제목을 붙이려 했다고 한다. 개츠비의 모델로 삼았던 인물이 트리말키오여서다. 책에 등장하는 개츠비가 살던 저택이 있던 곳이 웨스트에그다.  <위대한 개츠비>에도 사치스러운 파티가 나오긴 하는데 트리말키오의 향연에 댈 건 아니다. 


이탈리아의 거장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만든 <펠리니의 사티리콘>은 이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다. 간간이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었다는데 본 적은 없다. 영화에서 트리말키오의 향연을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하다.


진수성찬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폭풍성찬. 서양을 대표하는 것이 고대 로마의 향연이라면 이에 맞서는 동양의 연회는 중국 청나라 강희제 때 시작된 만한전석일 것이다. 원래 강희제가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해 양 민족의 음식을 차려놓고 베풀던 잔치. 청나라는 오랑캐 만주족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한족 왕조를 몰락시키고 세운 나라이므로 소수의 지배층 만주족 입장에선 한족을 끌어안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과제였다. 화합은 역시 마음을 터놓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 만한 것이 없을터. 만주족과 한족의 노인들을 전국에서 초대해 이들에게 만주족과 한족의 음식들을 즐기게 했으니 그 음식이 108가지였다. 한번에 절대 먹을 수 없는, 2박3일간 먹고 마시며 즐겨야 할 스케일이었다. 당시 이는 정치적으로 나름 성공적인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아무튼 난 이 108가지의 음식들이 너무 궁금했다. 예전 홍콩영화 <금옥만당>에는 만한전석으로 요리실력을 경쟁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구체적인 요리가 세세히 묘사된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 자료들에서 조각정보를 얻기는 했으나 정리된 내용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러다 알게 된 책이 한국중국소설학회 교수님들이 쓴 <중화미각>. 여기에 만한전석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정보가 정리돼 있다. 고려대 중문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지선 선생님이 쓴 내용인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산팔진, 해팔진, 금팔진, 초팔진 즉 산짐승, 해산물, 날짐승, 채소 및 버섯으로 만든 각각의 여덟가지 진미를 아울러 가리키는 사팔진을 모두 갖춰내야 만한전석이라 인정되는데 이같은 인식은 청나라 말에 생겨났다고 한다. 여기에 요리 재료로 사용되는 것들을 보면 낙타, 성성이, 백조, 표범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구체적 요리 목록은 이렇다. 붕어의 혀와 곰발바닥으로 만든 즉어설회웅장, 성성이의 입술을 지게미에 재어 만든 미조성진, 돼지 뇌로 요리한 탕 저뇌갱, 양 뱃속의 새끼로 만든 가표태, 낙타 등을 찐 증타봉, 너구리 고기로 만든 이편반증과자리, 사슴고기를 찐 증녹미, 복어 부레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어두외화퇴, 상어껍질과 닭으로 만든 사어피계즙갱, 생선 간으로 만든 가반어간.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좀 오싹해지긴 하다. 무시무시한 요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합과 무채를 넣고 끓인 선정나복사갱, 버섯과 닭을 끓여 만든 마고외계, 닭과 죽순으로 만든 계순죽, 누에고치로 끓인 견아갱 등등. 
 

이 화려하고 어마무시한 식탁의 정신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화합하려는 의지였을 것이고 그렇게 서로가 섞여 의미있게 만들어낸 결과물이 이 식탁이다. 문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정신이나 의미보다는 향락과 기교, 탐욕이 식탁을 덮는다는 것. 위키피디아에서 페트로니우스를 찾아보면 루벤스가 그린  <트리말키오의 향연>이라는 그림이 나온다. 향연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걷잡을 수 없는 탐욕과 비극을 표현한 것 같다.

 

음식은 소통의 수단이고 화합의 표현방식이지만 반대로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수단이자 상대를 배척하는 표현방식이 되기도 한다. 역사상 어느 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런 추악한 탐욕을 ‘미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그런데 문득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봤다. 나의 탐식인생은 어떠했나. 이 글을 쓰면서도 내내 이런저런 요리를 들먹이며 언제쯤 먹어볼 수 있을까, 과연 이건 어떤 맛일까를 생각하다가 뒷부분에 와서 가식적으로 글을 수습하고 말았다.  내 탐식인생? ‘어디까지 먹어봤니’를 지상과제로 한 탐욕과 쾌락추구에 가까웠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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