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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슨 Oct 02. 2023

<에세이즘>을 출간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마다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지 당최 가늠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있다. 일례로 행복, 사랑, 슬픔과 같은 말들. 파인애플이나 물집 같은 단어와는 달리 몇몇 이미지나 개념만으로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규정하기 어려운 낱말들. 그리고 그런 단어들의 목록 안에는 에세이도 있다. ‘나는 에세이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으로 운을 떼는 문장을 우리는 수도 없이 만나지만, 정작 그 문장에서 에세이가 가리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듣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내심으로 안다. 국내 출판문화의 장에서 에세이라는 단어가 유령의 말이 된 건 그 단어의 불명확성 때문이라기보다 그 단어에 대한 편견, 수치, 무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기 책을 에세이라고 어엿이 말하는 작가를 우리는 몇이나 보았나?


작가들은, 편집자들은 왜 본인 책에 에세이집 대신 산문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할까? 왜 에세이라는 말을 구태여 거부할까? 메리 루플의 <나의 사유 재산> 표지에는 산문집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다. 이 책에는 정녕 에세이집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세이와 초단편 소설, 산문시 따위가 때로는 확연하게 때론 막연하게 뒤섞인 글들의 모음집이라서. 무엇보다 평소 운문을 쓰는 작가가 운문을 제외한 모든 형식의 글, 즉 산문 형식의 글을 운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담아낸 책이라서. 한편 이번에 출간한 <에세이즘>에는 에세이라는 근사한 장르명을 마음껏 붙일 수 있어서 좋았다. 에세이라는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문학 형식을 대놓고 내세우며 갈파해 나가는 느낌을 살짝이나마 풍길 수 있어서.


물론 에세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어째서 그토록 복잡한 마음을 갖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한다. 국내에도 좋은 에세이 책이 많다고도 생각한다. 관습적이며 지루하게 쓰는 에세이스트도 있지만, 신선하고 흥미롭게 쓰는 에세이스트도 있다. 무엇보다 더욱 지저분하고, 우습고, 난삽하게, 그러면서도 불필요한 허세나 꾸밈 없이 정결하게 글을 쓸 줄 아는 매력적인 에세이스트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나는 나부터가 고리텁텁한 문장 스타일에 익숙한 뻔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껄그럽고 특이한 구석이 있는, 어딘가 멋들어지게 찢어지고 뒤틀린 글을 만날 때 좋은 자극을 받는 것 같다. <에세이즘>은 그런 에세이가 어떤 글일 수 있는지, 에세이가 어떻게 독자의 마음을 울리고 팬심을 자극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논한다. 그리고 <에세이즘>을 읽고 나면, 브라이언 딜런의 에세이즘 말고 다른 이들의 에세이즘 또한 만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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